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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May 23. 2024

[장자7] 제물론 (4) - 지혜가 지극한 경지

어떻게 되돌아갈 수 있을까?


[장자7] 제물론 (4) - 지혜가 지극한 경지 / 어떻게 되돌아갈 수 있을까?


세 가지 지극한 경지


14. 옛 사람들 중에는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얼마나 깊은 경지에 이르렀을까?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지극하고 완전한 경지로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이 생겨나긴 했으나 거기에 아직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다음은 사물에 구별은 있으나 아직 옳고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면 도(道)가 허물어진다. 도가 허물어지면 욕망(愛)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루고 허물어지는 것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룸과 허물어짐이라는 것이 따로 없는 것 아닐까?


15. 이룸과 허물어짐이 있다는 것은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타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룸과 허물어짐이 없다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타지 않음에 해당하는 것이다. 소문이 거문고 타는 솜씨, 사광(師曠)이 북채를 들고 장단 맞추는 솜씨, 혜자(惠子)가 책상에 기대어 변론하는 솜씨는 모두 완벽에 가까워 그 이름이 후세에 남았다. 세 사람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특출해서,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로 남을 깨우치려 했다. 그러나 남을 깨우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남을 깨우치려 했기 때문에 [혜자 같은 사람은] ‘단단한 것, 흰 것(堅白論)’ 같은 아리송한 변론으로 끝장나고 말았다.


소문의 아들은 아버지의 거문고 타기를 이어받았지만 일생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것을 이룸이라 한다면 나도 이룬 것이 있다 하겠고, 이런 것이 이룸이 아니라면 나나 다른 아무도 이룸이 없다 해야 할 것이다. 성인은 사람들을 현혹하는 현란한 빛을 없애려 한다. 그러기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구별하려 하지 않고 ‘보편적인 것(庸)’에 머문다. 이것이 바로 [대립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明)’이다.



‘있음’과 ‘없음’


16. 이제 말 한마디 해보자. 이 말이 ‘이것’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같든지 다르든지 그것들과 한가지임이 분명하므로, 사실 그것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도 한번 말해 보자.


17. ‘시작’이 있으면 아직 ‘시작하기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또 ‘아직 시작하기 이전의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있음(有)’이 있으면 ‘없음(無)’이 있게 마련이다. 또 ‘있음(有) 이전의 그 없음(無)’이 아직 있기 이전이 있어야 한다. 또 없음이 아직 있기 이전이 아직 있기 이전, 그것이 아직 있기 이전의 없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데 갑자기 있음과 없음의 구별이 생긴다. 있음과 없음 중에 어느 쪽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뭔가 말했지만 이렇게 말한 것이 정말로 뭔가 말한 것인지 말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털끝과 태산


18. 세상에 가을철 짐승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도 그지없이 작은 것이다. 갓 나서 죽은 아기보다 오래 산 사람은 없으니 팽조도 일찍 요절한 사람.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모든 것이 나와 하나가 되었구나.


모든 것이 원래 하나인데 달리 무엇을 더 말하겠느냐?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은 하나라고 했으니, [내가 한 말의 대상이 생긴 셈이라] 어찌 아무것도 없어서 말을 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라는 것과 내가 방금 말한 '하나'가 합하여 둘이 되었고, 이 둘과 본래의 하나가 합하여 셋이 된다. 이처럼 계속 뻗어 가면 아무리 셈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그 끝을 따라잡을 수가 없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야 일러 무엇하겠나?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도 이처럼 금방 셋이 되는데, 하물며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갈 때야 일러 무엇하겠나? 그러니 부산하게 쫓아다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因是)고 받아들이자.


- 오강남, 장자에서 번역문 발췌




장자가 이야기를 시작하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옛 사람들’ 의 ‘지혜가 지극한 경지’ 에 대한 언급이 나오기 시작했다. 장자가 말하는 옛날은 도대체 얼마나 옛날 일을 말하는 것일까?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인류의 시원을 이야기하는 것일 게다. 이것은 현재의 고고학자나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 호모 사피엔스 등이 인류의 시초가 되는 -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비주류의 세계관에서 현재의 문명이 전부가 아니라 종종 리셋 되어 반복되고 있다는 설에 대해서는 잠깐이라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들은 필자가 저술한 책인 <비움과 치유의 근원 에너지>를 통해서 모았던 자료들을 재인용해본 내용이다.



옛날 사람들은 본성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어서,

신명(神明)과 합치되고 하늘과 땅에 어울려 만물을 생육시키고,

온 세상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여

은혜와 혜택이 온 백성들에게 미쳤다.

그들은 근본적인 원리에도 밝았지만 말단적인 법도에도 잘 적응했다.

그래서 그들의 도는 천지사방으로 통하여,

크고 작고 가늘고 굵은 모든 사물의 운행에 도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 장자, 잡편 33-3편 (김학주 옮김판) 중에서


현재 진행되는 이야기는 장자의 내편에 관해서인데 장자의 뒷부분의 잡편에 들어서는 다시금 본성을 완전히 갖춘 옛날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장자만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이런 내용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반복되는 듯이 보인다.


신라 때 박제상이라는 이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우리 고대의 역사를 다룬 부도지(符都誌)라는 사서(史書)가 있다. 부도지의 창세편에 따르면 태초에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마고성(城)이라는 곳이 있었다. 마고성의 사람들은 모두가 품성이 순수하여 삶이 조화로웠으며 누구나 스스로 지키는 자재율(自在律)로써 질서를 이루었다고 한다. 성 안에는 땅에서 젖이 샘처럼 솟아나는 지유천(地乳川)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지유(地乳)만을 마시고 살았기에 혈기가 맑았고 수명은 한없이 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소라는 사람이 지유천에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오랫동안 마시지 못했다. 지소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근처의 포도나무에 열린 열매를 먹고 기운을 내게 되었고 이것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권했다. 이런 결과로 지소뿐만 아니라 성안의 많은 이들이 포도를 먹게 되었다. 포도가 비록 식물의 열매이긴 하지만 다른 생명인 것은 사실이다. 이런 까닭에 몸이 탁하게 되어 수명이 줄고 치아가 생기면서 동물을 닮은 모습을 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마고성 사람들은 마음이 사납고 어지러워져 본래의 순수했던 품성을 잃어버렸고 성 밖으로 나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 지유(地乳) – ‘땅 지(地)’ 자에 ‘젖 유(乳)’자가 쓰였다. 글과 문맥을 통해 땅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 섭취 가능한, 젖을 닮은 영양소의 일종으로 짐작해볼 수 있겠다. 성경 내용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라는 표현을 눈 여겨 볼만 하다.


- 전용석, <비움과 치유의 근원 에너지> 중에서



태초의 사람들은 ‘지혜가 지극한 경지’에 있었고 - 장자 내편 - ‘본성을 완전하게 갖추어서 신명과 합치’ 된 상태였고 - 장자 잡편 - ‘품성이 순수하여 삶이 조화롭고 질서를 이루었다’ - 부도지 - 고 함을 여러 출처를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추가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천지의 마지막 겁(劫)이 다해 무너질 때, 중생은 목숨을 마치고 모두 다 광음천[1]에 태어났다. 그들은 자연히 화생(化生)하였으며, 기쁨으로 음식을 삼고 살았다. 그 뒤에 땅은 다 물로 변하고 큰 어둠이 있었다. 이 물이 다시 변해 천지가 되었고, 모든 광음천의 무리들은 복이 다해 땅에 태어났다.

그들은 땅에서 솟아나는 단샘을 먹고 살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자 단샘은 말라버렸다. 그 대신 지비(地肥)[2]가 나타나 그걸 먹었다. 그러다가 지비가 다하자 이번에는 멥쌀을 먹고 살게 되었다. 그 사이에 사람들은 점점 얼굴이 추하게 변해갔다. 멥쌀을 먹게 되면서 남녀의 음욕이 왕성해져서 드디어 집을 짓고 아이를 낳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어느 때부터 멥쌀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땅을 갈라 표지를 세워 경계를 삼기 시작했으며, 도둑이 생기므로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임금을 뽑아 다스리게 했으니 이를 왕족, 귀족이라 했다.


[1] 광음천(光音天) – 불교에서 말하는 여러 차원의 하늘나라 중 한곳을 뜻한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입으로 빛을 내어 소통하므로 광음천이라 부른다. 인류의 시조는 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2] 지비(地肥) – ‘땅 지(地)’ 자에 ‘살찔 비(肥)’자가 쓰였다. 글과 문맥을 통해 땅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나 섭취 가능한 영양소의 일종으로 짐작해볼 수 있겠다.


- 아함경(장아함 6권 5경) 중에서 (비움과 치유의 근원 에너지 내용 중 재인용)



장자는 옛 사람들의 지혜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부도지의 내용과 붓다는 더욱 구체적으로 어째서 그렇게 조화로운 지혜의 상태에서 지금처럼 지혜와 멀어져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어리석은 상태가 ‘기본’ 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장자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말아야 한다’ 고 반복해서 이야기하지만 장자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듣고서 ‘그래! 이제부터는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말자!’ 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을 백 번 한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 상태가 그렇게 조화로운 태초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일일까? 그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비록 위에 인용된 내용들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하기는 하나 어느 정도 굵은 줄기의 힌트는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우선 태초의 사람들은 뭔가 아주 순수한 음식을 섭취했었으나 어떤 이유에서든 몸과 마음을 탁하게 만드는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그 본래의 심성이 바뀌었고 곡식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축적하면서 마음에는 욕심이 생기고 비온 뒤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났다.


흔히 DIY(Do it yourself, 직접 만들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조립은 해체의 역순’ 이라고 한다. 위와 같이 인류가 타락하게 된 과정을 되짚어 따라간다면 순수한 상태에 다시 도달할 수 있을까?


우선 두 가지 사항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순수한 음식과 무소유(쌀, 재물 등을 축적하지 않도록) 에 관해서일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순수한 음식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채식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위의 인용글들의 내용에서 그것이 아님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부도지에서 지소씨를 비롯한 기타 사람들은 식물인 포도를 먹고 망했고(?) 아함경에서의 사람들은 멥쌀을 먹고서 심성을 망쳤으니 말이다. 위에서 표현하는 지유와 단샘, 혹은 성경의 표현처럼 태초에 땅에서 흐르는 젖과 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실적으로 찾기 힘든 음식임에는 틀림 없다.


또한 많은 이들이 붓다는 불교를 창시한 사람이므로 채식을 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현실과는 다르다. 붓다는 직접하는 살생을 금하고 남에게 어떤 동물 등을 정해서 죽여달라는 등의 행위를 계율로써 금하기는 했지만 육식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공양을 받아야 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말이 공양이지 걸식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당시 불교는 교세를 나름 크게 확장했지만 온갖 수행자와 외도들이 많은 사회 구조였다. 그 중에서 불교도만이 바른 수행자이므로 더욱 대우 받았을 리도 만무하다) 나는 풀만 먹으니 알아서 구별해서 주세요 라고 할만한 처지도 아니었던 것이다. 남방불교의 스님들은 당시의 전통이 그대로 전해져 육식의 섭취를 금하지 않고 있다.


인간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지금 현재에도 여전히 큰 논란거리다. 채식주의자들은 채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육식의 폭력성을 강조한다. 또 어떤 의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인류의 400만 년 역사 중 채식의 비중이 극단적으로 커진 것은 불과 1만 년 전인 농경이 시작된 이후이며 이로부터 각종 질병들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또 채식만으로는 몸에 필수적인 비타민 B12 등을 섭취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영양제로라도 섭취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신체구조상으로도 맹장이 퇴화되었고 위산의 산도 또한 완전 육식동물인 고양이과 동물보다도 더 강한 산성이기에 육식동물이라고...... 이것이 맞는 것도 같고 저것이 맞는 것도 같지만 결국 어떤 쪽을 선택하든 우리를 ‘태초의 맑음’ 으로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인 것은 사실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심신이 완전히 청결함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무소유 하기만 하면 우리는 근본적인 천국을 잃어버린 실낙원(Paradise Lost)의 상태에서 복낙원(Paradise Regained)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필자는 그 방법이 명상이라고, 명상뿐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명상? 좋지. 나도 한 번 해볼까? 검색창에서 명상이라고 쳐보자. 온갖 명상법들에 대한 설명과 다양한 방법을 비롯해서 심지어는 이상한 냄새(?) 가 나는 사이비스러운 내용들까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필자가 명상을 시작하던 1980년대에는 인터넷도 없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명상이라는 단어도 흔치 않은 단어였다. 필자가 어린 시절이었던 당시 우리집 책장에는 낡은 요가 서적 한 권이 꽂혀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상한 체조 같은 것을 하는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었다. 어린(초등) 필자가 보기에도 정말 묘하고 이상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다 중1때 집에 오신 손님 중 한 분이 ‘소설 단丹’ 이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와서 아버지께 주고 가셨는데 우리집에서는 나만 신나게 읽고 또 읽었다. 책의 뒷편에는 부록으로 호흡법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읽고 열심히 따라했다. 독립문을 도술로 뛰어넘는 상상을 하면서. 명상이라는 말도 흔치 않던 시절, 명상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후로 단전호흡이라고 하는 호흡법이 나름 흥행했는데 너무나 우연히도 필자의 먼 친척뻘인 분으로부터 수행의 핵심 내용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하라는 대로 배우기만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한민족 전통 수련법의 계승자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현실적으로 먹고 사는 일에 바빠서 현실에 치여 사는 젊은 삼촌 같았다고나 할까).


NLP (Neuro Linguistic Programming) 라고 들어본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 글자 그대로 신경언어 프로그래밍이라고 하는데 가장 쉽게 설명하자면 인간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기법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NLP 기본적인 기법 중에서 모델링(Modelling) 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이 또한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와 관련된 모든 조건을 완전히 똑같이 따라서 재현할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끌린다는 이유로 뚜렷한 목적도 없이 어떤 일에 뛰어든다. 명상도 그렇다. 사실 명상에 대한 초기 반응은 두 가지다. 한쪽은 너무 분별 없이 뛰어드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너무 큰 편견을 가지고 방어적으로(거부반응, 두려움, 일반화의 오류) 대하는 것이다. 이 두 사례에서 전자는 운이 좋으면 좋은 길로 나아가거나 운이 나쁘면 인생을 망칠지도 모르며 (사이비에 빠져서) 후자는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상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른 길을 판단할 것인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NLP에서 좋은 길을 제시하고 있다. 최고의 성과를 낸 잘못될 수 없는 성공자를 찾아서 따라하면 된다. 그 길에는 실패가 없다. 스스로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명상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실력자는 누구인가? 뻔하지 않은가? 그것은 석가모니 붓다이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행적과 가르침이 그대로 담긴 문서인 니까야 경전(초기경전)까지 존재한다. 그래서 온갖 이상한 사이비 단체들(뉴에이지 등)에서조차 붓다를 성인으로 추앙한다. 그의 가르침을 훼손하면서까지 그렇게 한다. 그의 바른 가르침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것에 쉽게 휩쓸리고야 만다.


요약해보자.

바른 명상은 우리를 근원적 상태, 장자부터 시작해서 여러 인용문들이 가리키는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릴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런데 찾아보면 온갖 이상한 명상법들이 난무하기에 무엇이 바른 길인지 찾기에는 정보도 경험도 부족하다. 이럴 때 가장 전문가를 찾아서 그의 가르침을 따라 나아가면 된다.


그런데 너무 종교적인가?

그래서 필자는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명상적 방편으로써 붓다의 가르침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강조한다. 여러분은 얼마든지 자신의 종교를 고수해도 상관 없다고 장담한다. 사실상 종교의 냄새(?)가 아주 심한 것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대승불교(한국 불교, 일본 불교 모두 대승불교다)이다. 붓다의 가르침 중 일부 내용을 차용하지만 종교적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관세음보살을 믿으면, 그런 다라니(주문)를 외우면 원하는 일이 다 이루어진다든지 하는)의 혼합된 결과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있다. 붓다의 본래 가르침은 다분히 경험적이고 분석적이다. 와서 보라! 보고 자신의 마음을 다루는데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면밀히 살펴라. 그런 후에 결정하라.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필자가 지도하는 명상반에 어떤 분이 새로 들어왔다. 이분이 최근에 어떤 단체에 평생 회원으로 꽤 큰 비용을 내고 가입했다면서 필자의 명상반과 함께 병행해도 될지를 물었다. 안 될 일이 뭐 있겠는가. 당연히 가능하다. 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물이 필수적이다. 물을 마시고 또 몸을 씻고 빨래도 한다. 그런데 원래 쓰던 물과 새로 쓰게 된 맑은 물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새로 알게 된 맑은 물을 두고 상대적으로 오염된 물을 굳이 쓸 일이 있겠는가? 결국에는 더 맑은 물만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물질 세계의 물만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에너지(氣)의 작용으로 돌아가고 있다. 마침 이런 이야기가 나온 이 단락이기에 한 가지만 강조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기가 어쩌고 한다고 해서 너무 신기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주변이 전부 그것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작용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기치료니 뭐니 해서 신기하게 바람(?)을 넣는 이들을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모르니까 신기한 것이지 알고 보면 전혀 신기할 것이 없다.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너무나 많은 현상들이 신비 그 자체였다. 물론 지금의 과학도 갈 길이 멀었지만.


결국 두 길을 병행하려던 그 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알아서 평생회비가 아깝지 않게 내려놓게 되었다.


이번 장자 본문 텍스트의 마지막 이야기를 끝으로 긴 글 끝내려 한다.


‘부산하게 쫓아다니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그러하다(因是)고 받아들이자.’


여기서 장자의 핵심 키워드의 하나인 인시(因是) - 있는 그대로 - 가 등장했다. 나중에 다시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명상에서 두 가지 핵심 구절이 ‘지금 여기’ 와 ‘있는 그대로’ 쯤 되겠다. 너무나 평범한 단어들이지만 그 깊이를 따지자면 한량 없을 터다. 지금 여기는 팔정도 여덟 방편 중에 바른 사띠(正念)에 해당하며 있는 그대로는 바른 선정(삼매)인 정정(正定)에 해당한다. 우리는 평상시의 산만한 마음으로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늘 편견과 관념의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는 마음은 그 어떤 행복의 조건 하에서도 괴로움의 원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더더욱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닦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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