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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May 28. 2024

[장자8]제물론(5)- 도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이름은 정신을 분열시킨다?


[장자8] 제물론(5) - 도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 이름은 정신을 분열시킨다?


도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19. 사실 도(道)에는 경계가 없고 말(言)에는 실재가 없다. 말 때문에 분별이 생겨나는데 이 분별에 대해 말해 보기로 하자. 왼 쪽(左)과 오른쪽(右), 논의(倫)와 논증(義), 분석(分)과 변론(辯), 앞다툼(競)과 맞겨룸(爭) 등이 있는데 이를 일러 여덟 가지 속성이라 하지. 성인들은 우주 밖에 있는 [초월적인] 것에 대해 존재 정도는 이야기하지만, 논의하려 하지는 않는다. 성인들은 세상 안에 있는 [내재적인] 것에 대해서도 논의하기는 하지만 논증하려하지는 않는다. 또 역사적인 기록과 선왕들의 역대기에 대해 논증하기는 하지만 변론하려 하지 않는다. 분석하려 해도 분석할 수 없는 것이 있고, 변론하려해도 변론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왜 그럴까? 성인들은 [도를] 마음속에 간직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서로 보이려고 변론을 한다. 그러므로 변론은 [도를] 보지 못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20. 무릇 위대한 도는 이름이 없다. 위대한 변론은 말이 없다. 위대한 인(仁)은 편애하지 않으며 위대한 겸손은 [밖으로 드러내는] 겸양이 아니다. 위대한 용기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도(道)가 훤히 들여다보이면 도가 아니고 말도 변론만을 위한 것이라면 부족하다. 인(仁)이 융통성 없이 굳으면 두루 퍼질 수 없다. 겸손도 드러나게 하면 믿기지 못하며 용기가 사람을 해치는 것이라면 될성부른 것이 못 된다. 이 다섯 가지는 본래 둥근 것이지만 잘못하면 모가 난다. 그러므로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다. 누가 말로 하지 않는 변론과 도라고 말 할 수 없는 도를 알 수 있을까? 만약 이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하늘의 보고(寶庫)라 하리라. 이 보고는 부어도 차지 않고 퍼낸다고 비는 일도 없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모른다. 이런 경지를 일러 ‘은근한 빛’이라 한다.


- 오강남 번역 <장자> 본문 중에서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라 하였다. 모든 것의 근원이므로 세상의 모든 이름들조차 이 도로부터 나온 것임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그래서 노자는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가도 비상도 - 도를 도라 부르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 라고 한 것이다. 세상은 구체화된 존재의 절정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구체적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형체가 있고 손에 잡히고 부딪치면 부서지고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진다. 개개의 사물들과 존재들이 모두 제각각이다. 이 구체화된 세상에서 상위인 반대극으로 포커스를 이동하면 할수록 각 개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개개성이 희미해지고 서로가 합쳐지고 점점 더 하나(THE ONE)가 된다.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던 개체들이 점점 더 두루뭉술해진다. 이런 구체화의 상위의 반대 극단의 정점의 성질을 추상화라 할 수 있으며 결국에는 이에 대해서 우리는(옛 현인들은) 도(道)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화 되었을 때 하늘(天), 하느님, 하나님, 신(神) 등이라고 하며 인격화되고 형상화된 어떤 실체적인 존재로 보게 된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실체화되고 형상화되고 구체화된 존재’ 는 근원의 도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추상화’의 성질에서 한참 멀어졌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12연기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12연기를 순서대로 따라가면 끝없는 생과 사가 펼쳐지는 괴로움의 무한반복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그 시작은 무명(無明, 어리석음) 에서 시작해서 행(行, 형성), 식(識, 알음알이), 명색(名色), ...... 으로 전개된다. 12연기의 하위 요소들에서 결국 태어남을 원인으로 노병사가 일어나고, 이런 괴로움의 반복에서 헤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명색이라는 요소에 대해서만 상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명색(名色)이란 글자 그대로 이름과 물질을 뜻하는데 빨리어 원어에서도 namarupa(나마루빠) 라고 하여 ‘이름과 물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대체로 의역해서 정신과 물질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름’ 이라고 쓰고 ‘정신’ 이라고 이해할까? 우리는 이 부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름이란 정신현상에 있어서 상당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어떤 사물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미리 정해진 이름으로 부르는가? 일단 ‘그것이 그것’ 이라고 관습적으로 정해진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따라한다. 웬만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듯이 의심을 갖지 않고 말이다. 그런데 혹시 독자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어떤 사물의 이름인 글자를 봤을 때 그것이 너무나 이상하게 여겨지는 경우 말이다. 평소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던 단어가 순간적으로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마치 시계의 초침이 잠시 잠깐의 순간 동안 영원히 멈춰진 것처럼 느껴지듯이.


우리의 정신은 각각의 사물들에 대해 이름 붙이면서 그만큼 사물들과의 분리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원래 세상과 하나였다. 지금은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아기 때의 일이다. 그런데 언어 - 단어 - 를 하나 하나 배우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과, 저것은 바나나, 엄마, 아빠, 집, 강아지, 고양이 하면서. 그렇게 세상과 점점 더 멀어지고 분리되기 시작한다. 아주 어린 아기는 원래 세상과 하나였다. 처음 몇 개월 동안 말은 못하겠지만 서서히 알아 듣는 단어들이 늘어나면서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약간 오버해서 표현하자면 이것은 ‘정신의 분열’ 이나 마찬가지다.


이 분열을 의도적으로 되돌려서 통합시킬 수 있고 근원인 도의 방향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른 명상’ 을 통해서 가능하다. 강조한다. 아무 명상이 아니라 바른 명상을 통해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는 하지 말자. 우리가 똥 오줌 못 가리는 아기 때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명상의 기능이 지극히 활성화되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하나로 통합되고 완전히 일상적이지 않은 - 한편으로는 초월적인 -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럴 때 일상 속에서 얼핏 얼핏 느꼈던 단어의 생소함이라든가 시계침이 멈추는 현상은 길어지고 의도적이 되며 그 이상의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아기와 같은 의식적 통합이 의도적으로 가능해지지만 그것은 똥오줌을 못가리는 신체적 유아기의 상태와는 다르다.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표현대로 ‘말 때문에 분별이 생겨난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이하의 구절들은 미사여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도에는 경계가 없는데 그 하위의 개념인 말과 이름으로 사물의 경계를 짓고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번 장자의 텍스트에서 마지막 구절을 되뇌이며 그저 가슴에 새겨본다.


오직 모를 뿐.

그저 할 뿐.


‘그러므로 알지 못함을 알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다. 누가 말로 하지 않는 변론과 도라고 말 할 수 없는 도를 알 수 있을까? 만약 이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하늘의 보고(寶庫)라 하리라. 이 보고는 부어도 차지 않고 퍼낸다고 비는 일도 없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모른다. 이런 경지를 일러 ‘은근한 빛’이라 한다. ‘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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