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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Jun 01. 2024

[장자9]제물론(6) 앎과 모름/ 그날은 밤의 도둑처럼

그날은 밤의 도둑처럼 벼락치듯이 온다

[장자9] 제물론(6) - 앎과 모름 / 그날은 밤의 도둑처럼 벼락치듯이 온다


요 임금과 세 나라

  21. 옛날에 요 임금이 순 임금을 보고 말했다. ‘내가 종(宗), 회(膾), 서오(胥敖) 세 나라를 치려하오. 내가 왕위에 오른 후 [이 나라들이] 마음에 걸려 꺼림칙하니 웬일이오.’

  순 임금이 대답했다. ‘이 세 나라의 왕들은 아직도 잡풀이 우거진 미개지에 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꺼림칙해 하십니까? 전에 해 열 개가 한꺼번에 나와서 온 세상을 비춘 적이 있습니다만 임금님의 덕을 비춘다면 어찌 해 같은 데 비길 수 있겠습니까?’

- 장자, 오강남 교수 번역본 


이런 해설 저런 해설 말이 많은 단락이다. 요와 순 임금은 중국 역사에서 성군으로 칭송이 자자한 인물들로 알고 있다. 물론 실재 인물이 아닌 전설이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 중에서도 순 임금은 자신을 죽이려한 계모와 못된 형제도 품에 안은 덕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장자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이름만 빌렸을 뿐 대부분 픽션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어쨌거나 이 단락은 유난히, 그야말로 뜬금 없는 단락이다. 갑자기 요와 순 임금이 나와서 다른 나라를 치거나 비하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후대에 삽입된 문단이라는 주장과 나름의 해설을 펼치는 학자의 말들이 섞여있다. 굳이 토를 달자면 어쩌구 저쩌구 할 수야 있겠지만 워낙 오래된 글들이다 보니 노이즈가 좀 섞였구나 하며 넘어가도 무방할 일이라 생각된다.



앎과 모름 


  22. 설결(齧缺, 이빨 없는 이)이 스승 왕예(王倪, 왕의 후예)에게 물었다. ‘스승께서는 누구나 그렇다고 동의할 수 있는 무엇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스승께서는, 스승께서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면, 사물이란 알 수는 없는 것입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말이나 좀 해보세. 도대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 장자, 오강남 교수 번역본 


설결과 그의 스승 왕예의 대화에서 설결은 ‘아십니까?’ 라고 반복해서 묻고 스승은 ‘모른다’ 고 답한다. 설결이 재차 질문하자 결국 스승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는 것도 아니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결국 앎과 모름의 명확한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말장난을 하는 것 같다. 


이 단락을 통해서 필자는 선승들의 화두를 떠올리게 된다. 화두를 위한 질문과 답변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마치 말장난인 듯한 내용들을 발견하게 된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똥 묻은 막대기!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 부처나 조사를 만나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 잘 생각해서 대답해야 한다. 되는 대로 대답하다간 선승의 지팡이에 실컷 두들겨 맞게 될 것이다. 아니, 생각 없이 대답해도 결국은 아프게 될 것이다. 뭐 어쩌란 말인가?


사실 이 또한 장자의 가르침과도 많이 닮아있다. 옳다 그르다 하는 말을 초월하라. 화두의 질문과 대답은 논리적인가? 아니, 논리도 초월해야 한다. 왜냐면 말이 근원에서 나왔고 근원보다 하위의 무엇이듯이 논리조차 근원보다 하위의 것이기 때문이다. 화두는 말과 논리, 생각을 초월한, 그보다 상위 차원의 무엇을 가리킨다. 그러니 그것을 생각해서 말로 표현하려다가는 몸이 멍들고 상처입도록 실컷 두들겨 맞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명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두는 현재 한국 불교 등 동북아 대승불교의 주된 수행법으로 흔히 참선이라 불린다. 정좌하고 앉아서 화두에 몰입한다. 단순한 문구를 놓고 정신적으로 씨름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씨름이라고 해서 이게 어떻고 저게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 삼매 - 선정을 일심(一心) 이라고 표현한다.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는 뜻이다. 평상시의 마음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다. 이것 저것 여기 저기 온갖 현실적 사물과 정신적 현상들에게 주의를 빼앗기고 흩어져 있다. 이런 주의를 하나로 통일하여 모으는 것이기에 집중이라고도 한다. 반대로 주의가 흩어지면 산만하다고 한다. 


흔히 집중력이라고 표현하듯이 주의는 무엇을 대상으로 하든 모을 수 있다. 볼록 렌즈가 태양빛을 모으면 종이에 불을 일으킬 수도 있듯이 큰 힘을 발휘하는데 정신도 마찬가지다.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공부에 집중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엉뚱한 생각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던 일. 이것은 집중력과는 다른 정신력의 한 축인 ‘주의력’ 과 관련된 일이다. 즉 숲 전체를 보는 힘은 주의력이고 그 속에서 나무 하나를 보는 힘은 집중력인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집중력과 주의력 둘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집중력도 더욱 커질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의력에 비해 집중력만 불균형하게 커져있으면 자신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이것 저것 사이에서 집중을 반복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공부에 집중하다 말고 잡생각 A에 집중하다가 잡생각 B에 집중하다가, ... 그렇게 온 잡생각들 사이를 떠다니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즉 ‘알아차림’ 이 안된다는 뜻이다.


다시 본주제로 돌아가서 화두는 마음의 대상을 화두에 집중함으로써 점점 더 의식의 깊은 영역으로,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아마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집중했더니 그것을 꿈에서 경험하거나 해답을 찾게 되었던 경험 말이다. 이것이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있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꿈을 통해 열리면서 서로 소통하게 되었다는 증거다. 화두에 집중하면 꿈에서도 화두로 참선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거 집착 아니야? 그렇다. 어찌 보면 엄청난 집착이다. 


그런데 우리 몸이 극도로 이완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근육을 극도로 긴장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주먹을 최대한 강하게 오래 쥐어보자. 팔뚝을 구성하고 있는 전완근이 극도로 긴장될 것이고 결국에는 힘을 놓아버릴 수 밖에 없다. 그 때 이 근육은 최대한으로 이완된다. 마찬가지로 화두는 집착에 가깝다. 이뭣고? 이뭣고? 백날 떠올려도 답이 나올 리 없다. 그래도 집중해야 한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 동안, 잠들기 전에도, 잠든 후에도 (그냥은 안되겠지만). 그렇게 시일이 지나면 어느 순간 잠자면서도 이뭣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만이 답은 아니겠지만.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뜻하지도 않은 순간에 벼락 치듯이 답이 묵직하게 내려친다. 이건 뭐 논리고 사색이고 그런 게 아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로 답을 얻었구나도 아니다. 그저 온다. 


‘예비하라, 주의 날은 밤의 도둑처럼 올 것이다’ 


성경구절이지만 그렇게 오고야 말 것이다. 

단 예비하라 - 즉 준비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명상을 할만큼 하라. 많이 하면 좋겠지만 얼만큼 많이? 글쎄, 너무 많이 해서 본 수행과정을 망칠 만큼 억지로 하지는 마라. 사람마다 사이즈가 다르다.  동양적인 표현으로 근기가 다르니 그릇의 크기가 다르니 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알 수 없다.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라 다른 누군가가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에게 달려있다. 우리는 (이 글을 읽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 재가수행자이므로 현실적인 일도 충실히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준비하면서 현실적으로나 수행에서나 너무 큰 욕심 갖지 말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의 날’ - 한 소식 - 이 온다. 밤의 도둑처럼, 도둑이 언제 들지 모르는 것처럼 슬그머니,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벼락치듯이 온다. 


그러니 미리 예단하지 마라.

나는 안될 것이다 라고 해서는 안된다.

나는 될 것이다 라고 해서도 안된다.

그냥 하라.

할만큼 하면 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직 모를 뿐.

그저 할 뿐.

하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 明濟 전용석


P.S. 

오늘 글을 끝맺음 하다 보니 유명한 시 한 구절이 떠올라...

시인의 텅 빈 마음 하나될 수 있기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 내 안의 탐진치 모두 비워낼 수 있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반복되는 삶과 죽음, 일시적인 쾌락도 모두 괴로움이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 모든 존재들에게 괴로움이 없기를, 내 마음 자비심으로 가득하기를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 가야겠다。
-— 게으르지 않고 바르게 정진할 수 있기를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윤동주의 서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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