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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Jun 13. 2024

[장자11]제물론(8) 여희의 후회/ 명상의 진짜 목적


[장자11] 제물론(8) 여희의 후회 / 명상의 진짜 목적


여희(麗姬)의 후회


26.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미혹 아닐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어려서 집을 잃고 돌아갈 줄 모름과 같은 것 아닐까? 미녀 여희(麗姬)는 애(艾)라는 곳 변경지기 딸이었네. 진(晋)나라로 데려갈 때 여희는 너무 울어서 눈물에 옷깃이 흠뻑 젖었지. 그러나 왕의 처소에 이르러 왕과 아름다운 잠자리를 같이하고 맛있는 고기를 먹게 되자, 울던 일을 후회하였다네. 죽은 사람들도 전에 자기들이 삶에 집착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장자의 수많은 비유의 이야기들 속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는 것을 한 줄로 요약해보자면 상대적인 것의 통합을 통한 절대성의 추구일 것이다. 결국 이 절대성을 우리네 삶 속에서 풀어내자면 흔히 말하는 사자성어로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아주 사소한 사건과 경험에서 조차 좋고 나쁨을 가린다. 그러나 상대성을 통합하여 보려는 장자의 관점에서는 좋은 일도 없고 나쁜 일도 없다. 좋고 나쁨의 판단의 극단에 있는 일이 결국에는 삶과 죽음이다. 가까운 가족, 지인, 더 나아가 자기자신의 삶과 죽음은 좋고 나쁨의 극단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기독교인이 암에 걸렸다고 한다. 의사에게서 시한부 6개월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신앙심 깊은 이 신자는 오히려 기뻐했다. 아! 내가 드디어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되었구나! 그렇게 기쁜 날을 하루하루 보냈고 6개월이 지났는데 죽지를 않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병원을 다시 찾았더니 암세포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실화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은 있을 것이다.


흔히 산고(産苦)라 하여 출산하는 어머니의 괴로움을 살면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괴로움 중 하나로 여긴다. 그런데 어떤 연구 결과에 의하면 태아가 산도를 통과하여 출생할 때의 괴로움은 산고의 50배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힘든 길, 좁은 문을 통해 이 세상에 나왔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그 당시의 괴로움은 엄청났을 것이다. 산도 밖으로 나온 아기는 자지러지게 운다. 어머니의 뱃속, 태 안에서 따뜻하고 편안하고 불편함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지내다가 너무나 좁고 꽉 끼는 좁은 길을 통과하는 일은 여리고 작은 아기에게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런데 나와서 보니 바깥 환경은 너무나 춥고 낯선 세상이니 이 또한 어찌 힘들고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출생 이후의 삶은 밝고 행복한 경험들로만 가득 차 있을까?


독자 여러분 각자의 세세한 삶에 대해서는 내가 알 턱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랬다. 행복하지만은 않은, 변화가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내다 (필자는 전학을 여섯 번 했는데 초등학교 때 다섯 번, 중학교 때 한 번 이었다. 어느 해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1년 동안 두 번 하기도 했었다) 하필이면 사춘기가 막 시작되던 중학교 2학년 때 하나뿐이던 동생이 죽었다. 반항심이 극에 달했었는데 그건 기성세대나 세상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삶 그 자체에 대해서였다. 도대체 이 삶이란 건 뭔가? 이렇게 살다가 적당히 대학에 가고 졸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늙다가 죽으면 끝나는 그 뻔한 과정을 왜 해야 하는가? 더군다나 그런 뻔한 삶이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무한히 반복해야 하다니? (나는 모태신앙 - 카톨릭 - 에서 온갖 불합리한 점들을 보았고 상대적으로 불교의 세계관이 합리적으로 보였다) 나는 윤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파고들었고 그럴수록 더욱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끝없이 큰 바위를 굴려서 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그것이 다시 굴러 떨어지고를 반복해야 하는 신화 속 시지프스의 이야기가 남 일이 아니었다. 그 속에서 단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보았다. 그것이 ‘해탈’ 이었다. 치기 어린 마음에 앞뒤 모르고 해탈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지금 돌아보면 우습기 짝이 없을 뿐이다. 그저 전후좌우 사정도 모르고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나의 본격적인 중고등학생 시절은 시작되었고 지나갔다. 학생이니까 공부는 ‘적당히’ 했지만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나름 명상에 시간을 쏟았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10 년의 시간이 흘렀다. 어쩌다 보니 대학원까지 진학했는데 학부와는 다른 타과 진학에다가 엄청난 일벌레인 지도 교수님에게 찍힌 탓에 무척이나 힘든 2년 석사 과정을 보냈다. 겨우 논문 심사를 통과하고 모처럼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던 어느날이었다.


어느날 문득 밝은 햇살 속에서 나는 웃었다.

인간에게 웃음이란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이겠지만 그 때 내게 그 웃음은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생겨난 공기방울이 수면으로 떠올라 퐁 하고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보통 웃음에는 이유가 있다. 누가 웃긴 소리를 했다거나 기분 좋은 일이 있다거나 TV에서 개그맨들이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했다거나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뭔가 이유도 없이 웃는 사람을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내가 딱 그랬다. 다행히도 그런 나를 유심히 본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고 하루인가 이틀쯤 뒤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났다.

비유하자면 깜깜한 방에 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밝은 전등 스위치를 확 켠 것 처럼. 나는 거의 무한한 빛 속에 있었다. 오후 서너 시쯤? 오후의 부드러운 빛이 방안으로 부드러운 커튼처럼 드리우던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물리적인 빛은 그 빛과 도저히 견줄 수 없는 밝기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 빛 속에서 내가 찾던 모든 답이 전해졌고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 그런 질문들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어떤 질문들은 답을 찾으면 그 빛을 잃는다. 아니, 어떤 어두운 질문들이 빛을 만나 어둠을 잃는다고 할까. 마치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만나면 0이 되는 것처럼. 그 빛은 느낌상 30분 정도 지속되다가 갑자기 스위치를 내린 듯이 사라졌지만 1년 정도는 가슴에 여운으로 남아 모든 일상에 영향을 끼쳤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세상과 삶을 지극히 염세적으로 보았고 ‘세상은 고해’ 라는 불교적 진술을 너무나 확실한 진리라고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이 경험 이후에 ‘삶은 축복이며 은총’ 이라고 보게 되었다. 거의 푸쉬맨이라도 필요한 듯한 만원 지하철의 출퇴근길에서 콩나물처럼 끼어 다니면서도 아 사는 건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하면서 웃으며 다녔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에는 그 어떤 마음도 스스로 가지는 믿음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관점’ 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또 시간이 흘러 10년쯤 후에는 제대로 명상에 몰두하면서 그런 (빛의) 경험들이 갖는 불교적 의미를 제대로 알고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처음에 나는 그런 경험들이 불교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은 아닐까, 그것이 내가 찾던 여정의 끝일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전체 여정에서 그것은 긴 여정의 일부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물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흔한 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명상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불편한 마음이 좀 내려놓아졌으면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는 일 장애 없이 잘 되라고 기도처럼 하기도 한다. 특히 근래 몇 년 전에 특정 베스트셀러가 된 책에서 ‘원하는 것을 다 끌어온다’ 는 식의 개념으로 명상에 접근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기도 하였다. 어쨌든 사람들의 포커스는 삶에 맞춰져 있고 죽음을 멀리하는데 있다. 좋아하는 것을 바라고 싫어하는 것을 피하는데 있다.


명상의 참된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장자는 말한다. 길흉화복에서 초연해지라고. 삶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필자도 전부터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 물론 나 또한 완벽하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무엇이 바른 길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명확하게 알고 행하려 할 뿐이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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