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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Jun 26. 2024

[장자14] 양생주(1) 삶에는 끝이 있으므로

억지를 쓰면 탈이 나므로 매사 적당히(?)

[장자14] 양생주(1) 삶에는 끝이 있으므로 / 억지를 쓰면 탈이 나므로 매사 적당히(?)


삶에는 끝이 있으므로


  1.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습니다.
  아는 것에는 끝이 없습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알려고만 한다면
  더더욱 위험할 뿐입니다.
  
  2. 착하다는 일 하더라도
  이름이 날 정도로는 하지 말고,
  나쁘다는 일 하더라도
  벌 받을 정도로는 하지 마십시오.
  오직 중도를 따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고,
  어버이를 공양할 수 있고,
  주어진 나이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이제 장자 2편인 제물론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3편인 양생주(養生主)를 주제로 한 내용이 시작되었다.

양생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생명을 북돋는 일’을 뜻한다. 중국의 도교를 살펴보면 양생을 빼고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도교에서 양생을 뺀다면 그야말로 단팥 빠진 단팥빵이나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양생의 핵심개념은 앞에서 글자 그대로 풀이한 뜻으로 볼 수 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다양하게 쓰인다. 한편으로는 큰 흐름과 근원, 순리 등 (도道) 에 따르는 것을 양생이라 한다. 호흡을 어떤 방식으로 해서 기운을 모아서 돌리는 것을 양생이라 한다. 방중술 등을 바탕으로 하는 성행위의 어떤 측면을 양생이라 하기도 한다. 여기서 장자는 앞에서 예로 든 첫번째 요소인 큰 흐름과 근원, 순리에 따름으로써 양생할 수 있다 - 삶을 기르고 보존한다 - 고 한다. 이 장의 제목인 양생주란 양생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일들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을 뜻한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양생주 1편의 내용을 살펴보자.


삶은 유한하다. 언젠가는 죽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큰 모래시계를 하나 상상해보자. 윗쪽의 공간에서 좁은 틈을 지나 아래로 모래가 떨어지고 있다. 쉬지 않고 멈출 틈 없이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각 개체의 삶의 시간이 한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삶을 상징하는 모래시계는 일반적인 모래시계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윗쪽 공간의 모래의 남은 양이 얼마인지 알 수 없게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슥슥 하고 모래가 떨어지면 시간이 흘러가고 우리 인생의 시간도 그렇게 흘러간다. 누군가의 모래시계의 양이 얼마나 남았을까? 자신의 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아직 많은 모래가 남았을 거라 가정한다. 자신의 것이든 가족의 것이든. 슥슥... 모래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모래는 한편으로는 시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생명력’ 이다. 유한하고 한정된 모래가 소진되면 결국 죽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명력을 소진하고 있다. 늦잠도 자고 멍하게 뒹굴거리기도 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의미있는 일을 하든 아니든 생명력이 소모되고 있고 촛불은 꺼져가고 있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참으로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죽음은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당장은 이런 생명력의 소모를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심각함과 태연함 사이에서 대체 어떤 것이 적절한 태도일까?


이렇게 소중한 시간, 생명력을 우리는 대체로 어떻게 보내고 있나? 장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끝이 없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식은 끝이 없다. 그러므로 중요하지 않다. 삶에는 끝이 있으므로 그야말로 중요하지 않은가? 삶을 중요하게 여겨라. 삶을 중요하게 여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착한 일은 좋지만 적당히 해라. 어쩔 수 없이 나쁜 일 하더라도 참고 자제해라. 일의 극단을 피해라. 중도를 지켜라. 


장자는 매사 ‘적당히’ 해서 몸을 보전하고 삶을 온전히 하고 주어진 나이를 다 채우도록 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반대로 말한다. ‘열심히’ 하라!  뭐든 열심히 하라! 일도 열심히 하고 놀기도 열심히 해라. 완전히 불태워라. 그렇게 열정을 다해서 자신을 다 태워버려라. 이것은 장자와도 양생과도 반대되는 길이다. 그래서일까? 장자를 좋아하는 필자는 적당주의를 좋아한다. 뭐든 적당히 하자. 돈도 너무 많이 벌면 피곤해진다. 공부도 너무 많이 하면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 그래서 어느 사주쟁이는 학문이 감옥이라고 표현했던데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학문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답답함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경향이 있는 것을 자주보게 된다. 


명상도 마찬가지다. 흔히 일을 하다가 막히는 부분에서 ‘기를 쓰고 용을 쓴다’ 는 표현을 하는데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첫째로 그런 식으로 억지를 쓰다가는 그 마음의 틈으로 잡기운이 들어오기 쉽다 - 그런데 이것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릇이 큰 사람은 마음을 좀 모아 써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릇이 작은 사람이 억지를 쓰다 보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로 잘 안되는데도 수행하면서 뭣 좀 되보겠다고 산에 가서 억지 쓰지 말라. 산귀신에 들린다. 신기한 능력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것이 자기 능력인 줄 알고 뭐라도 되는 양 행세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것은 자신의 수행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는 행위일 뿐이다. 잡기운이 들어오면 마음이 오염되고 수행을 망치게 된다. 여담이지만 산에는 텃세를 부리는 산주인(귀신)이 있다. 산에 절을 짓는데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그들을 달래주어야 한다. 절에 산신각을 두는 이유다. 절에 있는 법당에는 계급이 있다. 그래서 부처 등을 모신 법당을 -전 이라 하고 그보다 저급한 신을 모신 법당을 -각 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기 쓰고 용 쓰지 말아야 할 두번째 이유는 나아가야 할 때와 일시적으로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억지를 쓰면 마음이 경직되고 이런 상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에 적절한 상태가 아니다. 때로는 잠시라도 그저 내려놓는 지혜가 필요하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중도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도록 하자. 원래 중도는 불법에서 유일하게 성(聖)스럽다고 표현하는, 사성제(四聖諦, 그래서 사제四諦- 네 가지 진리 - 라고도 한다) 이전에 설법하신 가르침이다. 붓다께서 부다가야에서 대각을 이루신 후 이것을 누구에게 전해야 할까를 생각하셨다.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먼저 자신의 스승이었던 두 사람, 알라라 깔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를 천안(天眼)으로 살피신다. 그런데 그들은 나이가 많아서 죽은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행할 때 함께했던 동료들인 다섯 출가자들을 찾아 머나먼 사르나트 - 초전법륜지 - 를 향해 가신 것이다 - 부다가야에서 사르나트는 거리상으로 300km 정도 된다. 


사르나트에서 다섯 동료들을 만났을 때 어째서 붓다는 사성제 이전에 중도를 설했을까? 그들은 붓다를 고행을 포기한 배신자라 여겼고 그런 이유로 처음에는 붓다의 말을 듣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고행하던 그들의 귀를 열기 위해 붓다는 그들에게 고행이 답이 아님을 먼저 설법하셨을 것이다. 중도란 두 극단의 중간이 되는 도를 뜻한다. 여기서 두 극단이란 고행도 아니고 깨달음에 뜻을 두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 지향하는 세속적인 즐거움도 아닌 그 사이의 중도이다. 그리고 중도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여덟가지 방법인 팔정도를 설법하셨다. 여기서는 간단히 요약하고 넘어가자면 팔정도는 사성제와 다르지 않으며 서로 순환하는 구조를 가진다. 팔정도의 첫째 요소인 바른 견해가 사성제이고 사성제의 넷째 요소인 도성제가 팔정도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완전한 괴로움의 소멸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에 반해 명상이나 깨달음에 뜻을 가졌다는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왜곡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명상을 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건강하려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정도는 그나마 긍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세상에서 정신적으로 인정 받고 자만의 방편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열등감 - 스스로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 을 해소하려고 한다. 


다시 본론인 장자의 중도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결국 장자는 세상살이에서의 중도를 강조하며 매사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기력하여 게으름을 피우고 방일하라는 것도 아니다. 장자만의 중도에 대한 표현이 너무 두루뭉술하다면 앞에서 언급한 팔정도 중 생활에 관한 부분을 지침으로 하여 지내보면 어떨까? 그것은 바로 팔정도 중 3,4,5번째 항목인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에 대한 내용이다. 


바른 말이란 거짓말, 거친 말, 말전주(이간질 등) 등을 뜻한다. 바른 행위란 불살행, 주지 않은 물품 사취하지 않기, 부적절한 대상과의 성행위를 금하는 것을 뜻한다. 바른 생계란 무기 거래, 생명체 거래, 도살업, 독약/술/마약 거래 등을 뜻한다. 그나마 장자의 조언을 함께 한다면 이런 일도 적당히, 벌 받을 정도가 아니게 하라니까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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