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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Jun 29. 2024

[장자15] 양생주(2) 포정의 소 각뜨기(庖丁解牛)

명상이란 생명을 북돋는 과정 (양생養生)


[장자15] 양생주(2) 포정의 소 각뜨기(庖丁解牛) / 명상이란 생명을 북돋는 과정(양생養生)


포정의 소 각뜨기(庖丁解牛)


3. 포정(庖丁)이라는 훌륭한 요리사가 문혜군(文惠君)을 위하여 소를 잡았습니다.


손을 갖다 대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을 디디고, 무릎을 굽히고. 그 소리는 설컹설컹. 칼 쓰는 대로 설뚝설뚝. 완벽한 음률. 무곡(舞曲) 「뽕나무 숲(桑林)」에 맞춰 춤추는 것 같고, 악장(樂章) 「다스리는 우두머리(經首)」에 맞춰 율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4. 문혜군이 말했습니다. “참, 훌륭하도다. 기술(術)이 어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요리사가 칼을 내려놓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신(神)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은 쉬고, 신(神)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아직 인대(靭帶)나 건(腱)을 베어 본 일이 없습니다. 큰 뼈야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습니까?


5. 훌륭한 요리사는 해마다 칼을 바꿉니다.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요리사는 달마다 칼을 바꿉니다.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19년 동안 이 칼로 소를 수천 마리나 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칼날은 이제 막 숫돌에 갈려 나온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칼날이 틈이 있는 뼈마디로 들어가니 텅 빈 것처럼 넓어, 칼이 마음대로 놀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19년이 지났는데도 칼날이 이제 막 숫돌에서 갈려 나온 것 같은 것입니다.


6. 그렇지만 근육과 뼈가 닿은 곳에 이를 때마다 저는 다루기 어려움을 알고 두려워 조심합니다. 시선은 하는 일에만 멈추고, 움직임은 느려집니다. 칼을 극히 미묘하게 놀리면 뼈와 살이 툭하고 갈라지는데 그 소리가 마치 흙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칼을 들고 일어서서 사방을 둘러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흐뭇한 마음으로 칼을 닦아 갈무리를 합니다.”


문혜군이 말했습니다. “훌륭하도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생명을 북돋움(養生)’이 무엇인가 터득했노라.”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에서 발췌




이 글의 주인공인 포정은 ‘훌륭한 요리사’ 라고는 했지만 사실 소를 잡는, 도살하는 백정이다. 백정이 사회적 계급을 말할 때 가장 아래에 위치하고 있음을 굳이 강조하여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장자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 잡는 이와 그의 행위를 등장 시킨 장자의 의도는 명확하다. 사회적으로 폄하되는 그 어떤 계층이나 행위를 떠나서 도는 두루 편재(遍在)해 있다는 이야기다. 이 다음편의 이야기인 ‘외발 우사’ 나 장자 5편의 덕충부 등에서는 여러 장애인들을 주인공으로 출동(?)시키고 있다. 지금이야 장애인에 대한 평등을 위한 사상이야 특별할 일이 없지만서도 그 오래전 과거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소에게 칼을 써서 도(道)와 하나되는 포정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가 귀히 여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삼 년이 지나자 통째인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


포정이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온통 소만이 눈에 보였다고 한다. 이것은 ‘집중’을 뜻한다. 아, 약간 여담이지만 당구를 쳐본 사람은 비슷한 경험들을 한다. 잠을 자려고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이 온통 당구대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당구공이 수학적 각도를 맞춘 쿠션에 따라 튕기며 천장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사실 무엇이든 집중하게 되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포정은 3년을 집중했다고 하니 꽤나 열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포정의 집중은 그냥 집중이 아니라 선정/삼매(집중 명상)의 집중과 닮아있다. 아니, 완전히 그것과 다름 없다. 명상을 하면서 특정 대상에 집중하고 또 집중하기를 거듭하다 보면 그 대상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된다. 만약 눈앞에 불규칙한 풀밭(규칙적인 잔디밭이 아니라)이 펼쳐져있는데 그곳을 대상으로 집중하게 되면 불규칙적인 시야가 규칙적으로 변해서 잔디밭처럼 보이다가 하나의 초록색 스크린처럼 확 퍼져버린다. 그러다 집중력이 깨지면 시야가 흔들리면서 다시 불규칙한 풀들이 제 모습을 찾아 돌아온다.


처음에는 신기한데 나중에는 속상하다. 왜냐면 시야가 흔들려서 스크린이 사라지고 풀밭이 돌아온다는 것은 마음의 집중이 흔들리고 하나되는 마음을 잃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즉 명상의 수행력이 딸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3년 뒤에 소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포정은 소에 얼마나 집중을 했다는 말인가!


“지금은 신(神)으로 대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 기관은 쉬고, 신(神)이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하늘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밀어 넣고, 큰 구멍에 칼을 댑니다.

이렇게 정말 본래의 모습에 따를 뿐......”


포정이 말하는 신은 흔히 말하는 귀신이나 절대적 존재인 신 혹은 유일신 등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신(精神)에 가깝지만 흔한 표현에서의 정신과는 조금 다르다. 굳이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것은 기(氣)이기는 하되 상위 차원의 기(氣)를 뜻한다. 이전 글에서도 여러번 반복 설명한 감이 있지만 만물의 근원을 도(道)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도에서 발현된 기는 여러 차원을 거쳐 우리 눈으로 보고 만져지는 물질의 상태로 물현되는데 그 중에서 초기 단계 정도의 기를 신(神)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포정은 도와 하나되어 소를 대상으로 칼부림을 하기에 하늘(道)이 낸 결을 따라 큰 틈바귀에 칼을 댄다. 말이 큰 틈바귀이지 아주 미세한 틈일 것이지만 도를 바탕으로 하는 신의 기를 따르기에 크게 느껴진다는 표현을 썼다. 사실 비상한 집중이 가능한 사람이면 어느 정도는 이와 유사한 경험이 가능한 것을 알 수 있다. 유능한 타자의 눈에는 일반인의 눈에는 초광속처럼 날아오는 공이 훨씬 더 크게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포정의 표현에 ‘신이 원하는 대로’ 라는 말은 빙의됐다는 뜻이 아니다. 포정은 잡귀신 같은 작은 신적 존재에게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도의 근원적 흐름을 따르는 ‘큰 사람’ 인 것이다.


앞에서 소만 보이다가 소조차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 구절에서는 비슷한 의미로 ‘감각기관은 쉰다’ 라고 표현했다. 앞에서 명상을 하면서 집중이 깊어지다 보면 시야의 사물들이 사라진다고 했는데 그것은 안식(眼識)이 꺼졌기 때문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여섯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여섯 인식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만나서 각각의 의식(인식)이 생겨난다고 한다. 즉 시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감각기관인 눈이 외부의 대상인 형상을 만나 안식(眼識)이 생겨나서 대상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안식이 없으면 눈과 외부 형상이 있어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어 기절한 사람의 눈을 까뒤집어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그런 이유다. 시각과 마찬가지로 청각, 후각, 미각, 신체감각, 의식(정신적 감각인데 일부에서는 알음알이라 표현하기도 한다)의 나머지 모든 감각들이 감각 대상에 대해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일어나고 작용하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특정 대상에 대한 집중이 깊어지면 가장 먼저 안식이 꺼지는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는 모든 감각기관이 꺼지게 되고 더욱 깊은 삼매에 들게 될 것이다. 불경의 내용중에 붓다가 어느 오두막에서 삼매에 들었는데 바로 옆길로 수천대의 마차와 달구지가 지나가는 행렬이 있었다. 그런데 붓다의 삼매가 너무나 깊었던 나머지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하자 놀라운 삼매력이라며 칭찬하는 내용이 나온다. 포정은 그래서 ‘감각 기관은 쉰다’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근원의 도에 따르고 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을 본래의 모습에 따르는 것이라 말한다.


이런 포정의 소 각뜨는 실력의 신기(神技, 神氣)를 보고 그 이치를 들은 문혜군은 감탄하는 것이다.


“훌륭하도다. 나는 오늘 포정의 말을 듣고 ‘생명을 북돋움(養生)’이 무엇인가 터득했노라.”


장자가 말하는 양생(‘생명을 북돋움(養生)’)이란 다음과 같다.

깊은 명상을 통해 도의 흐름과 하나되는 것이다.


또한 장자가 이런 대상으로 백정인 포정을 등장시킨 묵시적 이유는 ‘누구나 될 수 있다’ 는 이유가 아닐까?

그러나 동서고금의 어떤 시대상을 돌아보아도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진 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 반대로 현실적인 세상사의 즐거움과 욕심을 바탕으로 한 일에 대해서만 온통 정신을 쏟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 - 장자가 보기에도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현실이 그러하고 남들이 그러함은 그러려니 할 뿐이고,

이 글을 쓰는 나도,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함께 생명의 양생을 위해 한 걸음 정진해보도록 합시다!

그렇게 오늘도 한 걸음!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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