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은 새옹지마의 마음으로
[장자21] 인간세(4) 장자의 나무들 이야기 / 명상은 새옹지마의 마음으로
거백옥(遽伯玉)의 충고
23. 안합(顔闔)이 위(衛)나라 영공(靈公)의 태자를 보좌하러 가게 되어, 거백옥(遽伯玉)에게 자문(諮問)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덕이 좀 모자랍니다. 그가 하는 일을 그냥 두면 나라가 위태롭고, 제재를 하면 제 몸이 위태합니다. 그의 지능은 겨우 남의 잘못을 알아볼 정도는 되지만 잘못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습니까?”
24. 거백옥이 대답했습니다. “훌륭한 질문입니다. 조심하고 신중하십시오. 우선 몸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그를 따르고, 속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그를 따르더라도 무조건 빠져들어서는 안 되고, 조화를 이루더라도 겉으로 나타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겉으로 따르다가 무조건 빠져들면 뒤집히고, 파멸하고, 무너지고, 엎어집니다. 조화를 겉으로 나타내면 사람들에게 소리를 듣고, 평판이 나빠지고, 이상스러운 일이나 나쁜 일을 당하게 됩니다.
태자가 어린애가 되거든 당신도 어린애가 되고, 멋대로 행동 하거든 당신도 멋대로 행동하십시오. 엉터리같이 굴거든 당신도 함께 엉터리같이 구십시오. 그 사람을 잘 인도해서 흠 잡을 데 없는 경지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 가지 비유
25. 당신은 사마귀라는 벌레를 아시지요? 화를 내어 팔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수레에 맞섭니다. 제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짓은 제 능력을 과신하는 것입니다. 조심하고 신중하십시오. 스스로의 훌륭함을 자랑하여 거스르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26. 당신은 호랑이 키우는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아시지요? 호랑이에게 먹이를 산 채로 주지 않습니다. 먹이를 죽일 때 생기는 사나운 노기를 염려해서입니다. 또 먹이를 통째로도 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찢을 때 생기는 사나운 노기를 염려해서입니다. 호랑이가 배고플 때와 배부를 때를 잘 알아서 그 사나운 노기를 잘 구슬리는 것입니다. 호랑이가 사람과 다르지만 저를 기르는 사람에게 고분고분한 것은 기르는 사람이 호랑이의 성질을 잘 맞추기 때문입니다. 호랑이가 살기(殺氣)를 드러내는 것은 그 성질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27.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좋은 광주리로 말똥을 받고, 큰 대합 껍질로 말 오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말 등에 모기가 앉는 것을 보고 갑자기 말 등을 때렸습니다. [놀란] 말이 재갈을 벗고 야단하는 바람에 [말 사랑하던 사람의] 머리를 깨고 가슴을 받았습니다. 말을 사랑하는 뜻은 극진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이었습니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이 편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이야기들에서는 장자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읽을 수 있는 듯하다. 군주제를 중심으로 한 신하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잘 못 처신할 경우 목이 날아갈 테니까 말이다. 사마귀가 되어 자신의 능력을 뻐기다가는 수레바퀴에 밟혀 죽을 것이다. 겉보기에만 인간처럼 보일지라도 군주는 사실상 호랑이와 같다. 그 성질을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 또 어떤 군주는 호랑이처럼 포악할 정도는 아닌 온순한 말처럼 보여서 사랑스럽게 대하더라도 그 방법이 잘 못 될 경우 머리를 깰 수 있는 힘 있는 존재다.
장자의 인간세에서의 본론은 다음의 마지막 대목에서 등장하는 듯하다. 여기까지의, 세상에 나가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내용은 결국 별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그러니 바로 다음에 등장하는 나무들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장석(匠石)과 사당(祠堂) 나무
28. 석(石)이라는 목수가 제(齊)나라로 가다가 곡원(曲轅)이라는 곳에 이르러 토지신을 모신 사당의 상수리나무를 보았습니다. 나무의 크기는 소 수천 마리를 가릴 만했고 둥치는 백 아름, 높이는 산을 굽어볼 정도였습니다. 맨 아랫 가지가 바닥에서 열 길쯤 올라가 벋었는데, 거기에는 통 배를 만들 수 있는 가지만 해도 여남은 개가 되었습니다. 구경꾼들이 모여 장터를 이루었는데 목수 석(石)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 버렸습니다.
29. 제자가 한동안 보고 나서 석에게 달려가서 물었습니다. “제가 그 동안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녔지만 재목감으로 이처럼 훌륭한 나무를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눈여겨보시지도 않고 지나치시니 어인 일이십니까?”
“됐네.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을 말게. 쓸모가 없는 나무야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짜면 곧 썩고, 그릇을 만들면 쉬 부서지고, 문을 짜면 수액이 흐르고, 기둥을 만들어 세우면 좀이 슬 것이니, 재목이 못 돼. 아무짝에도 못 써. 그러니까 저렇게 오래 살 수 있었던거야.”
30. 목수 석이 집으로 돌아오자, 사당 상수리나무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나를 무엇에다 비교하려는고. 저 좋다는 나무들에다 비기는가? 아가위나무, 참배나무, 귤나무, 유자나무 따위? 열매가 익으면 뜯기고 욕을 당하지. 큰 가지는 꺽이고, 작은 가지는 찢기고. 그런 나무들은 자기들의 [열매 맺는] 재능 때문에 삶이 비참하지. 하늘이 준 나이를 다 못살고도 중에서 죽는 법이니, 스스로 세상살이에서 희생을 자초한 셈이라. 모든 것이 다 이와 같은 것이지.
31.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쓸모 없기를 바랐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완전히 그리 되었으니, 그것이 나의 큰 쓸모일세. 내가 쓸모가 있었더라면, 이처럼 클 수 있었겠는가? 또, 그대나 나나 한낱 하찮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그대는 상대방만을 하찮다고 한단 말인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가까운 쓸모 없는 인간이 어찌 쓸모 없는 나무 운운한단 말인가?”
32. 석이 깨어나 그 꿈 이야기를 하자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쓸모 없기를 바랐다면, 왜 사당 나무 노릇은 하는 걸까요?”
“쉬! 조용하게. 저 나무는 그냥 [한 가지 방편으로] 사당에 의지할 뿐이야. 사람들은 그 진의도 알지 못하고 욕을 하고 있지. [저렇게 생각이 깊은 나무는] 설령 사당 나무가 되지 않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잘리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저 나무가 자기를 보전하는 방법은 우리 사람들과 다르지. 보통의 판단 기준으로 그것을 떠받든다거나 한다면, 뭔가 빗나간 것 아니겠는가?”
거목(巨木)과 신인(神人)
33. 남백자기(南伯子基)가 상구(商丘)에 놀러 갔다가 엄청나게 큰 나무를 보았는데, 네 마리 말이 끄는 수레 천 대를 매어 두어도 나무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자기가 말했습니다. “이 어찌된 나무인가? 반드시 특별한 재목이겠군.”
그러나 위로 가지를 올려다보니 모두 꾸불꾸불하여 마룻대나 들보감도 아니었고, 아래로 큰 둥치를 보니 속이 뚫리고 갈라져 널감도 아니었습니다. 잎을 핥으면 입이 부르터 상처가 나고, 그 냄새를 맡으면 사흘 동안 취해서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과연 재목이 못 될 나무로구나. 그러니 이렇게 크게 자랐지. 아, 신인(神人)도 이처럼 재목감이 못 되는 것을.”
나무들의 재난과 점박이 소의 행복
34. 송(宋) 나라 형씨(荊氏)라는 곳은 개오동나무, 잣나무, 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이었습니다. 굵기가 한 움큼이 넘는 것은 원숭이 매어 두는 말뚝 만드는 사람들이 베어 가고, 서너 아름 되는 것은 집 짓는 이가 마룻대 감으로 베어 가고, 일여덟 아름 되는 것은 귀족이나 부상들이 널감으로 베어가 주어진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도끼에 찍혀 죽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재목감이 됨으로 당한 재난입니다.
이마에 흰 점이 박힌 소나 코가 젖혀진 돼지, 치질 앓는 사람은 황하 신의 제물로 바칠 수가 없습니다. 무당들은 이것들을 상서(祥瑞)롭지 못한 것으로 여기지만, 신인(神人)들은 오히려 이를 크게 상서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곱추의 특권
35. ‘지리소(支離疏)’라는 곱추는 턱이 배꼽에 묻히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고, 상투가 하늘을 향하고, 내장이 위로 올라갔으며, 두 넓적다리가 옆구리에 닿아 있었습니다. 바느질을 하고 빨래를 하면 혼자 먹을 것은 충분히 벌고, 키질을 해 쌀을 까불면 열 식구 먹을 것은 충분히 벌었습니다. 나라에서 군인을 징집할 때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들 사이를 [당당하게] 다녔고, 나라에 큰 역사가 있어도 성한 몸이 아니라 언제나 면제를 받았습니다. 나라에서 병자들에게 곡식을 배급하면 3종의 곡식과 장작 열 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외모가 온전하지 못한 곱추도 몸을 보존하고 천수를 다하는데, 하물며 그 덕이 곱추인 사람이겠습니까?
미친 사람 접여(接輿)의 노래
36. 공자가 초(楚)나라에 갔을 때, 접여(接輿)라는 미친 사람이 그의 숙소 문 앞을 오가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덕이 어찌 쇠했는고.
오는 세상 기다릴 수 없고,
간 세상 되잡을 수 없지.
세상에 도 있으면
성인 일 이루나,
세상에 도 없으면,
성인 그냥 살아갈 뿐.
지금 같은 이 세상
벌 면하기 힘들구나.
복은 깃털처럼 가벼우나
들 줄을 모르고,
화는 땅처럼 무거우나
피할 줄을 모르네.
그만두오, 그만두오.
덕으로 남 대하는 일.
위태롭다. 위태롭다.
땅에 금을 긋고
그 안에서 종종걸음.
가시나무여, 가시나무여.
내 가는 길 막지 마라.
내 발길 구불구불
내 발을 해치 마라.
산 나무는 스스로를 자르고
등불은 스스로를 태운다.
계수나무는 먹을 수 있어 잘리고,
옻나무는 쓸모 있어 베인다.
사람들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어도
‘쓸모 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르고 있구나.”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본문 내용이 길지만 다시 한 번 역시 ‘친절한 장자씨’ (금자 말고 장자) 임을 떠올리게 된다. 결국 이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장 마지막 두 줄이 될 것이다.
사람들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는 알고 있어도
‘쓸모 없음의 쓸모(無用之用)’는 모르고 있구나.”
무용지물이 아닌 ‘무용지용’, 즉 쓸모 없음의 쓸모를 강조하고 있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볼 때 이 내용은 인간세의 마지막 부분이다. 앞에서 읽어왔다시피 세상에 나가거든(출세), 군주를 보필하려거든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지도 과시하지도 말라는 내용들이었다. 불가피하게(요즘 그런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출세하러 나갔다면 말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내용보다 이 마지막 부분이 핵심이고 무용지용이 최선임을 강조하고 있다. 쓸모없음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쓸모있어 봐야 잘리고 꺾이기 쉽다. 그러니 괜히 욕심 부리지 말고 잠자코 있어라! (장자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전 글에서, 제물론(8)편에서 등장한 여희라는 인물을 기억하는가? (여희의 후회) 여희는 왕비가 되어 집을 떠날 적에 집 떠나는 일이 싫어서 그렇게도 서글피 울었다. 하지만 궁에 들어서는 온갖 호화로운 것들을 접하고는 과거를 후회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일어나는 부정적인 일이 나중에 어찌 좋은 일로 변할지 알 수 없다. 당장의 좋은 일이 나중에 어찌 궂은 일로 변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매사 좋다고 웃을 일도 싫다고 울 일도 없는 것이다. 독자들도 알다시피 이런 일들을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한다. 좋다고 여기는 일이 나중에 궂은 일로 바뀌고, 안좋다고 여기는 일이 좋은 일로 바뀔 수 있다. 당장의 판단분별은 그야말로 어리석고 짧은 소견일 뿐이다.
여기서 장자는 도교사상의 다소 극단적인 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세상에 쓸모 없는 이가 되어 목숨을 (길게) 연장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한다. <곱추의 특권> 이야기에서는 곱추이더라도 몸을 보전하고 천수를 누림이 더 낫다고 강조한다.
‘이마에 흰 점이 박힌 소나 코가 젖혀진 돼지, 치질 앓는 사람은 황하 신의 제물로 바칠 수가 없습니다. 무당들은 이것들을 상서(祥瑞)롭지 못한 것으로 여기지만, 신인(神人)들은 오히려 이를 크게 상서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본인이 치질이라고 너무 괴로워 말자. 그런 사람은 신인들이 상서롭다고 한단다. 허허;;; )
여기서는 신인들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은 특수한 도교적 방편으로 도를 닦아 불멸에 가까운 삶을 누리는 도교의 도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도교에서 최선으로 여기는, 천수를 누리는 길은 도사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특정한 방법의 수련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기운으로 응집된 자신의 복사체(에너지체)를 만들고 그것을 자기자신의 대체물로 삼은 후 몸 밖으로 내보낸다. 이렇게 생성된 존재는 물질적 육체를 갖지 않으므로(기운 혹은 특정한 에너지로 형성된 몸이다) 그 성질상 금세 죽지 않고 (생명이 다하여 부패되어 흩어지지 않고) 반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오랜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콘텐츠들이 이어져 내려와 허연 수염 쓰다듬으며 바둑이나 두면서 천세를 이어가는 도사나 신선에 관한 이야기들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런 전설같은 존재에 관한 이야기는 인도의 요가 전통에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이런 내용은 공상과학도 아니고 무협지도 넘어서는 내용이라 치고 결국 우리들 자신에게 ‘유용성’이 될만한 내용을 찾아야 한다. 장자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적용해서 세상에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그런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은 바로 새옹지마다. 왜냐하면 새옹지마의 마인드가 부족할수록 더더욱 괴로움이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매사 새옹지마를 척척 해낼 수 있다면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다.
세상에 조화롭게 어울리며 쓸모 있으면서도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다면 이런 모습이 우리가 지향해나가야 할 궁극적 이상형이 아닐까?
대중적이라 표현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희노애락 온갖 감정들에 휩쓸려 생각과 마음은 한쪽으로 치우쳐 울고 웃으며 괴로워한다. 마음의 포커스가 세상사 길흉화복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그렇기에 바라는 일에 깊이 집착하다 잘 되면 웃고 안되면 슬퍼하며 괴로워한다. 그런데 잘 되는 일도 기껏해야 한 두 번이지 매사 그렇게만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다. 기쁨과 슬픔은 상대적이다. 상대성의 세계에 강하게 갇히면 갇힐수록 괴로움의 깊이는 커질 수 밖에 없다.
붓다는 이 세상이 고통의 바다라고 설법하셨다. 이 내용을 잘 모르는 이들은 이 한 줄만 보고서 붓다의 가르침이 염세적이라고 비난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세상이 괴로움인 것은 4가지 진리인 사성제 중 한 가지 항목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세 항목에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한 상태,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이 제시되고 있기에 세상이 괴로움인 것은 부분적인 진리일 뿐이다.
그러면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왜 괴로움이냐고 반문한다. 괴로운 일도 있지만 즐거운 순간들도 많지 않느냐고. 이에 대해 간단히 요약해서 설명하자면 집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고, 큰 즐거움을 느낄수록 그에 집착한다. 그래서 그런 즐거움이 사라지면 무덤덤한 보통의 느낌도 상대적으로 괴롭다고 느끼거나 사라진 즐거움에 집착하며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괴로운 일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자체로 괴로움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붓다의 본래 가르침은 대부분 출가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초기경전의 내용을 보면 ‘비구(출가승)들이여’ 라고 하시는 구절들이 아주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초기경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승불교(한국 불교는 중국에서 전승되어 오랜 세월 동안 토착화된 대승불교다)의 경전(주로 반야심경, 금강경 등 대승경전) 내용과는 다소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선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대승불교는 대체로 화두 참선을 중심으로 하다가 단박에 깨닫거나 그 이후에도 수행을 해야 한다거나 (점오돈수, 돈오돈수 등) 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주된 경전 내용도 대체로 단편적으로 느껴지는 편이다. 니까야로 언급되는 초기경전도 깨달음의 길을 향하는 내용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본래 500년 동안 문자가 없는 빨리어로 구전되어 내려오던 내용을 소리나는 대로 음사해서 기록하여 경전으로 남겨졌기 때문이다(그래서 긴 경 모음, 짧은 경 모음 등으로 나눠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의 경전과 비교하면 ‘이것을 깨우치면 단박에 깨달음’ 과는 달리 초기경전의 내용 속에는 붓다의 원음에 가까운 장구한 8만4천 법문의 내용 속에 편재된 체계적인 길이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우리같은 재가자들도 따라갈 수 있지만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할 길임은 분명하다. 태어남과 죽음의 거의 무한한 반복임을 알고 보면서 그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바른 명상 수행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당장은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덜 괴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새옹지마의 마인드를 장착하는 것이다.
새옹지마의 마인드를 장착하면서 마음에 대해 눈여겨 보아야 할 두 단어가 있다.
그 중 첫번째는 길흉화복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길한 일, 복된 일이 될만한 것에 집착한다. 반대로 흉하고 화가 될만한 일을 피하는데 집착한다. 그래서 점을 쳐서 어떻게든 움켜쥐거나(길과 복) 피하려고(흉과 화) 하는데 이런 마음이 스스로를 나약함에 빠져들게 한다. 자기도 모르게 고정된 미래의 일들에 무언가 정해진 길흉화복이 있는 듯이 휩쓸리게 되어 더 큰 괴로움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세상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큰 시스템들이 있다. 이 기운의 시스템에 빠져들고 휩쓸리면 개인의 의식(이 또한 기운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은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현대의학의 시스템도 그렇고 자본주의의 시스템도 그렇다. 더 크게는 태양계의 시스템, 은하계의 시스템, 중력의 시스템 등 자연법칙으로 거스르기 힘든 것들도 있다. 사실상 생각할 수 있고 떠올릴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런 시스템을 구성한다(혹자는 이것을 펜듈럼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결국 사주, 주역, 무속 등 우리 마음을 빼앗아가서 나약하게 만드는 것들 또한 시스템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흉화복에 이끌리고 휩쓸리는 시스템 속에서 울고 웃으며 자기 생명력을 소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더 큰 괴로움으로 빠져드는 일임을 알지도 못한 채.
그 중 두번째 단어는 탐진치이다.
결국 길흉화복에 휩쓸리는 마음의 근본 원인은 붓다가 마음의 ‘세 가지 근본 독성’ 이라 가르친 탐진치 - 탐하는 마음, 화와 분노, 어리석음 - 이다. 탐하는 마음이 있기에 길과 복에 집착한다. 탐심대로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가 일어나고 짜증이 난다. 거대한 시스템에 압도되어 탐심대로의 희망을 잃었을 때 화의 방향이 내부로 향하여 우울을 증폭시킨다. 이 모든 탐과 진의 바탕에 무지와 어리석음이 깔려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이들은 길과 복을 이루려고 명상을 한다. 살인검 활인검이라는 말처럼 어떤 칼은 사람을 죽이고 수술실의 메스는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살리는 펜도, 상처주고 죽이기까지 하는 펜도 있을 수 있으니 나같은 사람이 나서서 명상을 어찌 활용하든 왈가왈부 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래 명상의 목적은 탐진치를 버리고 길흉화복에서 초연해지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서 필자는 ‘그러려니’ 와 ‘적당히’ 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좋은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하고 궂은 일 원치 않는 일이 생겨도 그러려니 하려고 노력한다. 매사 중도를 지켜서 한쪽 극으로 치닫지 않고 적당히 하려고 한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 먹는다고 바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원하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좋아하는 일, 희망하는 일이 꼭 이루어지라고 집착만 하다가 잘 안되었다고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반대로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다고 하늘 높이 붕 떴다가 다른 일에서 추락하는 등의 마음은 더 큰 괴로움으로 이어짐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알고만 있어도 괴로움을 여의고 바르게 처신하는 마음의 힘은 훨씬 나아질 테니까 말이다.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크게 기뻐하지 말자.
조용히 감사하면 될 일이다.
궂은 일이 있어도 너무 슬퍼하지 말자.
솔로몬 왕의 반지에 새겨진 문구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게 될 것이다.
또 모르는 일이다.
새옹지마의 표현처럼 좋다 나쁘다 여기는 일이 어찌 뒤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사람 일이라는데.
그렇게 마음씀이 적은 오늘 최선을 다하는 한 걸음을 옮기면 결과는 순리에 맞게 일어나게 될 것이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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