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태와 공자 / 공자를 가르칠 뻔한 명상 선생
[장자22] 덕충부(1) 왕태와 공자 / 공자를 가르칠 뻔한 명상 선생
왕태(王駘)와 공자
1. 노(魯)나라에 왕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형벌을 받아 발 하나가 잘린 사람이었습니다. 왕태를 따르는 사람의 수가 공자를 따르는 사람의 수와 맞먹을 만했습니다.
공자의 제자 상계(常季)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왕태는 외발인데 따르는 자가 선생님의 제자와 노나라를 반씩 차지하고 있습니다. 서서 가르치는 일이 없고, 앉아서 토론하는 일도 없다는데, 사람들이 텅 빈 채로 찾아가서 가득 얻어 돌아온답니다. 정말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몸이 불구지만 마음은 온전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성인이다. 나도 꾸물거리다가 아직 찾아뵙지 못했지만, 앞으로 스승으로 모시려고 하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어찌 노나라 사람들뿐이겠느냐? 나는 온 세상 사람을 이끌고 그분을 따르려 한다.”
2. 상계가 말했습니다. “외발인 그분이 선생님보다 훌륭하다니, 보통 사람들과는 큰 거리가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씀은 어떤 것인가요?”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큰일이지만, 그런 것으로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꿈쩍하지 않는다. 거짓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 보고, 사물의 변천에 요동하지 않는다. 사물의 변화를 운명(運命)으로 여기고 그 근본을 지킨다.”
3. 상계가 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다름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지만, 같음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귀나 눈이 옳다고 하는 것과 상관하지 않고, 덕에서 나오는 평화의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 사물에서 하나 됨을 보고, 그 잃음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지.”
4. 상계가 말했습니다. “그는 ‘앎’으로 그 마음을 터득하고, 그 마음으로 영원한 마음을 터득하는 등 자기수양에만 전념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듭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춰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땅에서 목숨을 받은 것 중에서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가장 올바르므로 겨울 여름 늘 푸르고, 하늘에서 목숨을 받은 것 중에서는 오직 순 임금이 가장 올바르므로 다행히 먼저 스스로 바르게 살면서 뭇 사람을 바르게 이끌었다.
5. ‘처음’을 지키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용감한 사람은 혼자서도 대군이 지키는 적진에 쳐들어가 싸운다. 이름을 내기 위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하늘과 땅을 다스리고, 만물을 감싸 안고, 육체를 일시적인 처소로 생각하고, 귀나 눈의 작용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아는 바를 하나로 삼고, 그 마음이 죽지 않은 이런 사람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사람은 날을 잡아서 어디 먼 곳에 오르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사람들이 자기를 따르는 것 같은 일에 괘념하겠느냐?”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장자 4편인 인간세가 끝나고 덕충부(德充符)의 시작이다. 덕충부는 ‘덕(德)이 가득해서 저절로 밖으로 드러나는 표시’라는 뜻이다.
오래전 초등학교도 아니고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배웠던 ‘도덕’ 이라는 과목 생각이 난다. 이후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인가부터 도덕이라는 이름이 ‘윤리’ 라는 과목 이름으로 바뀌었다. 도덕이 윤리로 바뀐 것이라기보다는 상급생이 되면서 과목명이 달라진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어릴 때는 하도 도덕 도덕 하여서 이 두 단어가 본래 분리되어 있는 아주 심오한(?) 뜻을 가진 단어인 줄도 모르고 살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도덕을 지키자, 도덕적인 사람이 되자는 등의 표현이 너무나 익숙할 것이다.
문득 궁금한 김에 찾아봤다. 도덕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가 어떤 것임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나 떠올려보면 머릿속에서도 두루뭉술하게 뭉개구름 하나가 떠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럴 때 귀찮더라도 꼭 필요한 것이 사전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의 한가운데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도덕道德, morality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기준
- 철학사전(네이버)
이 외에도 여러 백과사전, 종교사전 등에서 정의하고 있는 내용들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이 내용을 가져와보았다. 이것이 일상적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도덕이라는 단어의 의미라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자 선생의 가르침을 파고 있는 지금 우리들의 입장에서 이 도덕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그저 졸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도덕을 구성하는 첫번째의 도(道)라는 단어는 장자의 맥락에서 몹시 익숙한 단어가 아닌가.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장자 텍스트를 통해서) 도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런데 이제 장자는 공자의 입을 빌려 덕이라는 단어를 말하고 있다. 도, 도, 도... 하더니 이제 덕을 말한다.
도는 세상 모든 만물의 근원이라 하였다.
그리고 장자의 이 장에서 주인공은 덕이다.
도를 말한 다음에 덕을 말하는 순서에 따르듯이 장자를 언급하기 이전에 노자가 장자보다 한끗(?) 위 임을, 한 걸음 앞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노자는 덕이란 도와 하나가 되면 그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모습이라 하였다. 참으로 노자다운 간결한 설명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오컴의 면도날 이론도 떠올리게 한다. 쓸데 없는 군더더기가 없다. 도가 은둔자이지만 만물을 주재하는 왕이라면 덕은 도의 뜻과 하나되어 세상에 나투어 활동하는 수족이다. 어찌 보면 도와 덕은 한 몸의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본문에서 공자의 제자인 상계가 묻는다.
정말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不言之敎)’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이라고 해봐야 동양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에게는 이미 흔한 이야기일 것이다. 염화미소, 이심전심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께서 말을 하지 않고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이자 마하가섭 존자가 말 없이도 이해하고 미소지었다는 이야기다. 모든 이들의 마음이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뿌리의 차원으로 내려가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그리 신기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것이 텔레파시라고 하는 현상의 원리이기도 하다(투시라고 해서 원격 비전의 능력도 언어적 차원이냐 시각적 차원이냐 하는 채널만 다를 뿐 결국 원리는 같다). 다만 일반인들에게 흔히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자기 욕망(탐진치)과 내적 잡음 등에 가로막혀 투명하지 못한 마음 상태이기 때문이다.
공자와 상계의 대화를 이어서 살펴보자.
(상계) “그런 사람의 마음씀은 어떤 것인가요?”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큰일이지만, 그런 것으로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비록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꿈쩍하지 않는다. 거짓이 없는 경지를 꿰뚫어 보고, 사물의 변천에 요동하지 않는다. 사물의 변화를 운명(運命)으로 여기고 그 근본을 지킨다.”
뒷문장을 먼저 보자.
사물의 변화를 운명(運命)으로 여기고 그 근본을 지킨다.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표현을 장자의 방식으로 표현했다. 익숙한 무엇인가? 다름 아닌 무상(無常)이다. 항상 그대로인 것은 없다. 세상 만물은 근원으로부터 나와 생성되고, 변화되고, 소멸된다. 모든 형성된 것들이 그러하므로 제행무상이라 한다 하였다. 이를 완전히 체득하면 죽고, 살고, 세상의 그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근원과 하나일진대 무엇이 두렵겠는가.
공자와 상계의 대화가 이어진다.
상계가 말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다름의 입장에서 보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지만, 같음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이다. 그런 사람은 귀나 눈이 옳다고 하는 것과 상관하지 않고, 덕에서 나오는 평화의 경지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 사물에서 하나 됨을 보고, 그 잃음을 보지 않는다. 그러니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지.”
이전의 어느 편에선가 언급되었던 <하나> 라는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같음의 입장에서 본다는 것은 근원의 입장을 뜻한다. 이는 곧 도(道)의 다른 표현이라고 하였다. 도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덕이라 하므로 결국 도, 덕, 근원, 하나 - 이 모든 것들은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와 합일되면 육신의 발 하나 떨어져 나간 것쯤은 흙덩어리 하나 떨어져 나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이번 연재글의 2편에서 썼던 다음 문단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붓다께서 아직 깨닫기 전인 전생담에 등장하는 일이니 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을만 하다고 생각된다.
붓다의 전생담에서 붓다가 아직 깨달음을 얻기 이전인 보살이었을 때 숲에서 사냥하던 왕을 만난다. 마음이 흉포한 왕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그 보살의 팔을 자르는데 보살은 그에게 저항하지 않고 (신체를 보존하거나 생명을 부지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고) 단지 내생에서 이 어리석은 왕을 다시 만나게 되면 그에게 깨달음을 전수하리라고 서원하는데 내생에서 다시 만난 그 왕이 초전법륜에서 첫번째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꼰단냐 존자라고 전해진다.
- <[장자2] 소요유(2) - 막고야산의 신인 / 의도 없음은 깨달음을 향한다> 중에서
상계가 말했습니다.
“그는 ‘앎’으로 그 마음을 터득하고, 그 마음으로 영원한 마음을 터득하는 등 자기수양에만 전념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듭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흐르는 물에 제 모습을 비춰 볼 수 없고, 고요한 물에서만 비춰 볼 수 있다. 고요함만이 고요함을 찾는 뭇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앎’ 이란 흔한 지식의 앎의 차원이 아니다. 무엇을 안다고 할 때 그 앎에는 천차만별의 깊이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깊은 앎의 마음으로 영원한 마음을 터득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마음이란 곧 도를 의미함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수양에 전념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모여드는지를 상계는 궁금해한다. 자기수양과 인간세 에서의 처세의 연결고리에 대해 묻고 있다. 공자의 대답은 결국 끼리끼리 모인다, 유유상종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업으로 삼는 세계가 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온갖 다양하고도 이상한(?) 사람들도 많이 만났었다는 이야기를 이전 글에서 한 적이 있다. 지나온 40년 가까운 세월을 돌아보면 그야말로 ‘지뢰밭’ 이라는 표현이 떠오르기도 한다. 필자가 아는 어떤 분은 10년 넘게 어떤 이를 스승이라 여기고 배움을 청하며 지내온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 스승이라 자처하던 이는 결국 사이비로 알려져 매스컴은 물론이고 온라인에서도 난리가 났다. 사이비를 사이비인줄 모르고 지내온 이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에 그를 원망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배신의 상처를 안고 지내는 듯했다. 그러나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결국 자신의 내면에 숨은 욕망과 무지, 결국 탐진치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을 텐데. 안타깝지만 지난 세월 모두 잊고 마음을 추스려 다시 바른 길 찾아 정진하기를 바랄 수 밖에(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더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눈여겨 볼 공자의 말이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고, 만물을 감싸 안고, 육체를 일시적인 처소로 생각하고,
귀나 눈의 작용을 허망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가 아는 바를 하나로 삼고,
그 마음이 죽지 않은 이런 사람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육체를 일시적인 처소로 생각한다는 표현이 지금까지 언급된 생사초월이라는 표현의 다른 면으로 보이는 동시에 새로워보인다.
귀나 눈의 작용을 허망한 것으로 여긴다는 표현 또한 필자가 이전 글에서 명상을 통해 이식(耳識)과 안식(眼識)의 셧다운 등으로 표현한 내용을 ‘허망하다’는 표현으로 조금 달리 설명한 것에 해당된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아는 바를 하나로 삼아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함 또한 명상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이쯤에서 처음에 그 정의를 살펴봤던 도덕을 다시 돌아본다.
도덕道德, morality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바람직한 행동기준
- 철학사전(네이버)
어떤가? 도덕에 대한 정의가 참으로 공자스럽고 논어스럽다. 이렇게 지켜야 할 도리, 행동기준 등을 정해놓은 것이 공자의 방식이다. 사실 동양쪽이 좀 더 그렇긴 하지만 서구문명을 포함한 인간 사회 대부분이 공자논어적인 방식으로 규정되어왔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상계가 왕태의 방식에 대해 공자에게 고하며 놀라워하는 대목을 다시 보자.
“서서 가르치는 일이 없고, 앉아서 토론하는 일도 없다는데,
사람들이 텅 빈 채로 찾아가서 가득 얻어 돌아온답니다.“
뒤집어보면 우리 학교나 교육의 모습(지식의 교육)이 그려지지 않는가? 서서 가르치고, 앉아서 토론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방식이다.
어쩌면 왕태는 사람들에게 명상을 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텅 빈 채로 찾아가서 (이미 마음을 많이 비운 이들만이 왕태를 알아보고 찾아 갔으리라)
약간의 비움의 방편만을 배우고 충만한 상태로 돌아왔으리라.
그래서 공자도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는가.
“그는 성인이다. 나도 꾸물거리다가 아직 찾아뵙지 못했지만, 앞으로 스승으로 모시려고 하는데,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어찌 노나라 사람들뿐이겠느냐?
나는 온 세상 사람을 이끌고 그분을 따르려 한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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