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가(申徒嘉)와 정자산(鄭子産) / 편견을 버리고 근원과 하나되는 명상
[장자23] 덕충부(2) 신도가(申徒嘉)와 정자산(鄭子産) / 편견을 버리고 근원과 하나되는 명상
6. 신도가(申徒嘉)는 형벌로 발이 하나 잘린 사람입니다. 정(鄭) 나라 재상 자산(子産)과 함께 백혼무인(伯昏無人)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자산이 신도가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가 남아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남아 있기로 하세.”
그 다음날 둘이 또 한 방에 들어가 같은 자리에 앉게 되자, 자산이 신도가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나가면 자네가 남아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남아 있기로 하세. 이제 내가 먼저 나갈 터이니 자네가 남아 주겠는가. 또 자네는 나 같은 재상을 보고도 자리를 비키지 않으니 자네가 재상과 맞먹겠다는 것인가?”
7. 신도가가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의 문하에 정말로 이처럼 재상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자네는 재상이라고 우쭐해서 남을 뒤로 밀어내려 하는군. 듣건대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고, 먼지가 끼면 정말로 맑은 거울이 아니다. 현인과 오래 지내면 잘못이 없어진다’고 하더군. 지금 자네가 우리 선생님을 크게 받들며 살고 있는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니, 그것이야말로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8. 자산이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그 꼴에 요 임금과 훌륭함을 겨누려 하는군. 자네의 덕을 헤아려 보게.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단 말인가?”
신도가가 대답했습니다. “자기 잘못을 변명하면서, 벌 받은 것이 억울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 잘못을 변명하지도 않고, 온전한 몸으로 살아남음을 오히려 황공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드무네.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편안하게 운명(運命)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덕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지.
9. 활 잘 쏘는 예(羿)의 활 사정거리 안에서 놀 때, 그 안은 모두 화살에 맞을 수 있는 땅. 그런데도 맞지 않았다면 그것은 명(命)일 따름이지. 그런데도 자신이 온전하다 하여 내 발 하나 없음을 비웃는 사람이 많았네. 나는 그 때마다 불끈 화를 내다가도, 선생님 계신 곳에 가면 그런 마음을 말끔히 씻고 평소 상태로 되돌아왔네. 선생님께서 훌륭하신 덕으로 나를 씻어 주셨나 보이. 내가 선생님을 19년 동안이나 따르며 배웠지만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내가 ‘외발’임을 아신다고 내비치신 적이 없으시다네. 이제 자네와 나는 몸 안의 세계를 배우는데 자네는 아직 몸 밖의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으니 이것 역시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자산은 부끄러워 풀이 죽은 채, 낯빛을 바꾸고 용모를 고쳐 말했습니다. “이보게, 이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하세.”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요즘에야 그나마도 장애인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지만 2천 년도 더 된 장자의 시대에는 훨씬 열악했을 것이다. 지금도 은연중에는 장애인들 무시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은데 장애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신체적 문제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중요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나타내는 장자야말로 선구적인 정신의 소유자라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겠다.
이 대목에서는 부자인 자산과 외발 장애인인 신도가라는 인물을 극적으로 대비해서 등장시켰다. 이 대화에서 신도가를 무시하던 자산은 다음의 신도가의 말로 넉다운 되고야 만다.
“활 잘 쏘는 예(羿)의 활 사정거리 안에서 놀 때, 그 안은 모두 화살에 맞을 수 있는 땅. 그런데도 맞지 않았다면 그것은 명(命)일 따름이지. 그런데도 자신이 온전하다 하여 내 발 하나 없음을 비웃는 사람이 많았네. 나는 그 때마다 불끈 화를 내다가도, 선생님 계신 곳에 가면 그런 마음을 말끔히 씻고 평소 상태로 되돌아왔네. 선생님께서 훌륭하신 덕으로 나를 씻어 주셨나 보이. 내가 선생님을 19년 동안이나 따르며 배웠지만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내가 ‘외발’임을 아신다고 내비치신 적이 없으시다네. 이제 자네와 나는 몸 안의 세계를 배우는데 자네는 아직 몸 밖의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으니 이것 역시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누구도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후천적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그저 운명과 같은 일일 뿐. 하지만 장애인이 된 신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비웃음을 당했고 그런 일들에 화를 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다음 대목이다.
“선생님 계신 곳에 가면 그런 (화의) 마음을 말끔히 씻고 평소 상태로 되돌아왔네.”
이 대목에서 신도가의 화의 마음이 정화된 데는 두 가지 작용이 있었으리라고 본다.
지금까지 장자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현상의 근원에 있는 도(道)와 그것의 수족과 같이 드러나 작용하는 기(氣)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첫째로 신도가가 그의 선생 곁에서 마음이 맑아진 것은 신도가보다 깊이 닦여진 선생의 마음과 동기화와 감응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로 본문에 드러나 있는 힌트처럼 신도가와 자산은 그 선생인 백혼무인에게서 ‘몸 안의 세계’ 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여기서 몸 안의 세계란 물리적 신체의 해부가 아니다. 이것은 마음을 뜻하는 것이며 이를 배운다는 것은 탐진치에 깃든 혼탁한 마음을 맑게 비우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명상’ 이라고 부르는 방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또 다른 대목을 보자.
(신도가의 말) “자네는 재상이라고 우쭐해서 남을 뒤로 밀어내려 하는군. 듣건대 ‘거울이 맑으면 먼지가 끼지 않고, 먼지가 끼면 정말로 맑은 거울이 아니다. 현인과 오래 지내면 잘못이 없어진다’고 하더군. 지금 자네가 우리 선생님을 크게 받들며 살고 있는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니, 그것이야말로 뭔가 잘못된 것 아닌가?”
자산이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그 꼴에 요 임금과 훌륭함을 겨누려 하는군. 자네의 덕을 헤아려 보게. 그것도 모자라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단 말인가?”
이 글에서 보여지는 자산은 자신이 재상이라는 개인적 아이덴티티의 편견과 장애인은 낮은 존재이며 자신이 더 낫다는 등의 사회적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런 편견들은 명상을 통해 비워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
명상을 통해 꾸준히 마음을 닦아나가다 보면 두 가지 면에서 자신의 마음이 변화될 수 있다. 첫째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의 면모들 - 편견과 부정적인 믿음 등 - 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둘째로는 단단하게 싸고 있던 껍질이 옅어지면서 내면에서 자비심의 빛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인간은 도구를 사용한다지만 동물 중에도 특히 유인원류 중에는 돌멩이 등 기초적인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종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외에도 인간은 언어, 생각, 의식 등이 월등하게 발달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인간에게서 여타 동물보다 더욱 발달된 특성들을 하나로 집약하면 결국 지능이 되지 않을까? 인간은 동물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이렇게 뛰어난 지능조차도 동물과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돌고래는 잉어에 비해 아주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지능에 가까울 순 있지만 지능만으로는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다.
돌고래 중에서도 머리 좋은 개체의 지능은 아이큐로 따지면 90정도로 높다고 한다. 인간에게도 아이큐가 100이면 평균보다 아주 많이 떨어지는 지능은 아닐 터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양이는 어떤가? 고양이의 지능도 인간으로 치면 세 살 아이의 지능 정도가 된다고 한다.
지능의 관점에서는 어떤 동물종이 인간과 유사할지라도 인간에 필적할 수는 없다.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영성일 것이다. 영성이라는 단어에 관한 여러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모든 상대성을 초월하여 도(道)와 하나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야생의 세계에 사는 동물들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법칙 속에 있다. 그러므로 불구가 된 동물은 살아남기 힘들다. 하지만 인간만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이 덕충부라는 장을 통해 장자는 여러 장애인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듯이 장애인이라 해도 신체적 장애와는 상관 없이 도와 하나가 되도록 마음을 닦을 수 있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영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신체적인 문제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 헬렌 켈러
나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완전한 어둠의 세상을 살았던 헬렌 켈러의 삶을 떠올릴 때마다 그것이 나의 일인 것처럼 몸서리가 처질 때가 있다. 그 어둠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가슴이 먹먹할 정도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가능한 방법으로 그녀는 그런 장애를 극복했고 자신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며 위와 같은 명언을 남겨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헬렌 켈러는 분명 도를 닦는다거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스토리를 대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불이 켜지는 것은 깊은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 인 근원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른 그 어떤 동물과도 다른, 도의 근원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인간으로서 말이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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