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無趾)와 공자와 노자
[장자24] 덕충부(3) 무지(無趾)와 공자와 노자 / 인위의 속박을 벗는 명상
무지(無趾)와 공자와 노자
10. 노나라에 형벌을 받아 발이 하나 잘린 숙산무지(叔山無趾)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발을 절면서 공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공자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일찍이 근신하지 못해서 죄를 짓고 이 꼴이 되었거늘, 지금 이렇게 나를 찾아온들 무슨 수가 있겠는가?”
무지가 말했습니다. “저는 제 할 바를 모르고 제 몸을 함부로 굴리다가 이처럼 발을 잃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것은 발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온전히 지키러 온 것 입니다. 무릇 하늘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땅은 모든 것을 실어 줍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저 하늘이나 땅과 같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어찌 선생님께서 이러실 줄 알았겠습니까?”
공자가 말했습니다. “내가 생각이 좁았네.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는가? 내가 듣고 배운 바를 말해 드리리다.”
그러나 무지는 그냥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힘써 배워라. 무지는 발을 잘리고도 힘써 배워 전에 저지른 잘못을 갚으려 하거늘, 하물며 온전한 덕을 가진 너희들이랴.”
11. 무지가 이 이야기를 노자에게 했습니다. “공구(孔丘)는 지인(至人)의 경지에 이르려면 아직 까마득하더군요. 그런데 그가 어찌하여 자꾸 선생님께 와서 배우려 하는 것입니까? 그는 괴상하고 허황한 이름을 원하고 있지만, 지인은 이런 것들을 질곡(桎梏)으로 여긴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 아닙니까?”
노자가 대답했습니다. “왜 그에게 직접 죽음과 삶도 한가지요, 됨과 안 됨도 한 줄에 꿰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그 질곡에서 풀려나게 하지 못했는가? 그러면 되는 것 아니겠나?”
무지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내리는 벌인데 제가 어찌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이 이야기에서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실력을 내공이라 치고 내공이 높은 순서부터 나열하자면 노자, 무지, 공자의 순서가 될 것이다.
무지에 의하면 공자는 ‘괴상하고 허황한 이름을 원한다’ 고 표현한다. 이 괴상하고 허황한 것이 다름 아닌 ‘인의예지신’ 이다. 인위적으로 내세운 율법 같은 것이다. 노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하고 있다.
“대도(大道)가 폐하면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나서고,
지략과 지모가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합니다.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면 효(孝)니 자(慈)니 하는 것이 나서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생깁니다.”
- 노자 도덕경 18장
참으로 사고의 역발상이고 창의적 사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최선의 진실이기도 하다.
세상에 크나큰 도가 현현하면 인의 같은 것이 나설 이유가 없다. 작게는 가정이 화목하면 자식의 효와 부모의 자애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주변에 공기가 충분하기에 그 소중함을 모르듯이 인의예지신을 강조하는 유교적 사회에 살고 있기에 유교적 편견에 갇혀있음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인의예지신이 나쁘다는 말이 아님을 잘 이해해야 한다. 도의 바른 흐름에 따르면 인의예지신과 같은 인위적 규율이 없어도 사회는 저절로 조화롭게 운영된다. 도가 제대로 흐르지 못하므로 인위적인 인의예지신이라도 필요해지는 것이다.
아무튼 노자의 제자인 무지는 공자를 경멸하듯 대하고 있다. 앞에서 이 글의 전체의 첫머리에서도 노자, 장자, 공자 등 이름 뒷글자에 자(子) 라고 붙이는 것이 ‘선생’ 이라는 호칭임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무지는 공자를 공자라 하여 공선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공구(孔丘) 라 하며 그의 본명을 내던지듯 부른 것이다.
어쩌면 무지도 공부가 덜 됐다고 할만한 것이, 무지가 다리를 절며 공자를 찾아갔더니 그런 신체적 장애에 대해 ‘이 꼴 저 꼴’ 하는 식으로 말하며 대하였으니 기분이 좋지 않음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도 공자의 양면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도 공자는 비장애인인 제자들에 대하여 (신체적 장애인들에 비해) 온전한 덕을 가졌다는 표현을 하고 있으니 이는 공자의 어리석음을 암시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그러나 금세 자신의 부덕함을 알아차리고 고치고자 하니 공자 역시도 상대적으로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마음이 넓은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이런 에피소드들은 물론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장자가 고안한 픽션의 장치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사건의 진실을 넘어서 노자와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인지 공자가 노장자와는 다르게 취하고 있는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장자 VS 공자
누구를 응원할 것인가?
점점 더 분명해지지 않는가?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공자와 장자 각각의 포지션에 대해 비교하자면 공자가 훨씬 더 우위에 있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님 말씀에’ 라는 말은 종종 들어보았으나 ‘장자님 말씀에’ 라든가 ‘노자님 말씀에’ 라는 표현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말이다. 장자와 노자님 말씀은 내 가슴 깊숙히에나 품어두련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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