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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Aug 14. 2024

[장자25]덕충부(4) 추남 애태타/ 명상의 첫걸음


[장자25] 덕충부(4) 추남 애태타 /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명상의 첫걸음


추남 애태타(哀駘它)


12.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위(衛)나라에 못생긴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은 애태타라 합니다. 그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 남자들은 그 사람 생각에 곁을 떠나지 못하고, 그 사람을 본 여자들은 부모에게, 딴 사람의 아내가 되느니 오히려 그 사람의 첩이 되게 해달라고 조르는데, 그 수가 열 몇 명으로 아직도 계속 늘어간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나서서 주창(主唱) 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사람들에게 동조할 뿐입니다. 임금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 준 일도 없고, 곡식을 쌓아 두고 사람들의 배를 채워 준 일도 없습니다. 거기다가 몹시 추하게 생겨서 세상을 놀라게 할 정도입니다. 동조할 뿐, 주창하는 일도 없고,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주변의 일상사를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남자 여자가 그 앞에 몰려드는 것은 그에게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3. 그래서 저도 그 사람을 불러 살펴보았습니다. 과연 추하기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달이 채 못 되어 그 사람됨에 반했고, 한 돌이 채 못 되어 그 사람을 믿게 되었습니다. 마침 나라에 재상이 없어서 제가 나라 살림을 맡기려 했더니, 모호한 응답을 하는데, 분명하지는 않지만 사양하는 듯 했습니다. 저는 민망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라 살림을 떠맡겼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저를 떠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뭔가 잃어버린 듯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아무와도 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쁨을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14.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제가 초(楚)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마침 새끼 돼지들이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새끼 돼지들은 조금 있다가 순식간에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 어미 돼지에게서 저희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이제 저희와 전혀 다른 종류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어미를 사랑한 것은 그 몸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몸을 움직이는 무엇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장례식에는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장식이 필요 없고, 발이 잘린 사람은 신 같은 것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왕의 후궁들은 손톱을 깎지 않고, 귀에 귀고리 구멍을 내지 않습니다. 새로 장가든 사람은 제 집에 자고, 숙직을 하지 않습니다. 몸을 온전히 하는 일도 이렇게 하는데, 덕을 온전케 하는 일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애태타는 말을 안 하고도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아무런 공적 없이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나라 살림을 맡아 달라고 하면서 맡아 주지 않을까봐 염려마저 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재질을 온전히 하면서도 그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15. 애공이 물었습니다. “‘그의 재질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유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비방과 칭찬,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것이 모두 사물의 변화요 명(命)의 운행으로서, 우리 앞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우리의 앎으로는 그 시원(始原)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마음의 조화를 어지럽히거나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고, 시원히 트여 기쁨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하고, 만물과 더불어 [화기 어린] 봄을 맞습니다. 이것이 사물에 접해서 마음에 봄이 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인간에게 주어진 재질을 온전하게 한다고 합니다.”


16. “그러면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평평한 것은 물이 완전히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은 안에 고요를 간직하고 밖으로는 출렁거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을 이룬 사람은 조화를 이룬 사람으로,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지 못합니다.”


17. 애공이 훗날 민자(閔子)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처음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이 법을 지키게 하고 그들이 죽지 않도록 염려하는 것으로 나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소. 이제 지인(至人)의 말을 들으니 내겐 임금다운 바탕도 없으면서 몸을 가볍게 놀려 나라를 망치는 것이 아닌가 두렵소, 나와 공자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덕으로 맺어진 벗이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이번 이야기에는 현자 공자가 다시 등장했다 - 다시 강조하지만 이 공자는 실제 공자가 아니라, 장자가 내세운 연극 속에서 공자의 속성을 가진 공자의 아바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장자는 아무래도 정치 등과 관련된 세상에서의 거추장스러운 일에 꼭 공자를 등장시키는 것 같다.


아마도 바로 앞의 장면(무지와 공자와 노자 편)에서 장애인 평등사상을 무지에게서 잘 배웠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못생기기가 신체적 장애등급에 가까운 애태타에 대한 편견을 싹 지운 채로 등장한 느낌이다(이 모든 글들이 왜곡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치면 이렇게 글을 써내려간 장자의 행동이 왠지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지?).


아무튼 노나라 애공의 말에 의하면 애태타는 그 외모가 못생긴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적으로는 꽉 찬 사람인 모양이다. 애태타가 어떤 사람이냐는 물음에 공자는 제일 먼저 ‘몸을 움직이는 무엇’ 에 대해 언급한다. 몸을 움직이는 무엇이란 다름 아닌 정신이다. 기본적으로 애태타의 정신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면 어떤 정신을 뜻함인가? 애태타의 정신은 ‘덕을 온전케 하는’ 정신이다. 이전글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덕이란 곧 도가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도와 덕은 동전의 양면이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사이이다. 노자와 장자의 이야기에서 덕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것은 곧 도와 다르지 않음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덕은 좀 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쓰이는 면이 있다.


덕을 온전케 함이란 무엇인가? 도를 세상에 온전히 드러낸다는 뜻이다. 애태타는 도와 합일된 사람으로서 도를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는 사람이다. 그 드러남은 덕으로써 나타난다. 공자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지금 애태타는 말을 안 하고도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아무런 공적 없이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도와 하나로 합일된다고 하여 그런 모든 이가 이렇듯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 그랬다면 기독교의 모태가 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겠는가? 시대를 잘 타고나고 상황이 받쳐주어야 한다. 붓다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고대 인도의 환경에서 태어나 천수를 누렸다. 또한 각자가 진정한 자신의 길을 가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애태타는 모두에게 사랑 받는 사람이란다.


“이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재질을 온전히 하면서도 그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애공은 공자의 이 알쏭달쏭한 말에 대해 조목조목 따져 묻는다. 별 생각 없이 보면 흠, 그렇군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말일 게다. 하지만 은근히 예리한 질문을 날리는 애공도 역시 나름의 내공을 갖춘 인물이 아닐까? 자신의 재질을 온전히 한다는 것에 대한 공자의 대답을 보자.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가난과 부유함, 현명함과 어리석음, 비방과 칭찬, 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더위, 이것이 모두 사물의 변화요 명(命)의 운행으로서, 우리 앞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우리의 앎으로는 그 시원(始原)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마음의 조화를 어지럽히거나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조화롭고 즐겁도록 하고, 시원히 트여 기쁨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하고, 만물과 더불어 [화기 어린] 봄을 맞습니다. 이것이 사물에 접해서 마음에 봄이 오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인간에게 주어진 재질을 온전하게 한다고 합니다.”

죽음과 삶, 생존과 파멸, 성공과 실패...... 공자가 예를 든 이 모든 것들은 상대성을 뜻함을 지금까지 이 연재하는 글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 상대성을 앎(지식)으로 헤아리려 백날, 백방으로 노력해봐야 그 시원(始原)을 알 수 없다. 상대성을 알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집착은 마음의 조화를 어지럽힌다. 머리를 써서 하는 철학과 심리학 - 심지어는 바른 정진과 수행이 빠진 불교학조차도 - 등이 상대성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마음의 조화를 어지럽히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게 할 수 없는 대표적인 일들일 것이다.


자비희사의 마음으로 우주를 가득 채우면 그것은 곧 해탈이다.

- 붓다


자비희사의 마음이란 자애, 연민, 기쁨, 평안을 뜻한다. 이 마음으로 우주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해탈로 이어진다고 붓다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위에서 공자가 말한 마음의 조화란 곧 평안과 평화, 그리고 기쁨을 뜻한다. 직접 자비심이라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밤낮으로 틈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표현도 붓다의 오감(五感)을 수호하라는 마음챙김(사띠) - 팔정도의 일곱번째 항목 - 과도 다르지 않다. 이럴 때 마음에 봄이 온다? 봄이란 생로병사 모든 괴로움을 여읜 해탈의 경지와 다름 없다. 결국 공자가 말한 재질을 온전하게 한다는 설명 또한 명상을 뜻한다.


다음으로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설명을 보자.


“평평한 것은 물이 완전히 고요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은 안에 고요를 간직하고 밖으로는 출렁거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덕을 이룬 사람은 조화를 이룬 사람으로, 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나지 못합니다.”


노자 도덕경의 첫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대목이다.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 - 도를 도라 부르면 이미 도가 아니다.

앞에서 필자는 도와 덕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강조하였다. 반대 특성이라기 보다는 한 몸임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면 덕가덕 비상덕(德可德 非常德) 이라 말을 바꾸면 어찌되겠는가? 덕을 덕이라 부르면 이미 덕이 아니다. 그런데 덕은 도와는 달리 드러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덕을 덕이라 부르면, 혹은 덕이 겉으로 (너무 크게?) 드러나면 그것은 이미 덕이 아닌 셈이 된다. 덕은 도의 드러나는 속성이되 너무 드러나서는 안된다. 덕은 중도를 지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그렇게 은근히 드러나야 한다. 그러자면 덕을 이룬 사람은 내적으로 완전한 고요의 상태를 이루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와 하나로 합일 되고 덕이 조화롭게 은근히 드러나는,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이상향에 가까운 사람이 ‘내가 그런 사람이요!’ 라고 주장하거나 강하게 확신하는 상태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다. 바로 앞에서 공자도 설명했듯이 그런 상대성을 초월한 상태는 앎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그래야만 한다거나 자신은 그렇다거나 하는 생각조차 없다.


현실적인 관점으로 돌아와서 한편 생각해보면 도와 덕과 하나되는 이런 상태는 우리가 추구하기에 너무나 소원해보인다. 저기 멀리 밤하늘에 떠 있는 북극성으로 가야합니다!? 누가 현실적이라 여기겠는가. 아 그럼, 달나라라도 가세요! 달은 북극성보다 훨씬 가깝고 다녀온 사람들도 있다지만 이 역시 너무 비현실적이다.


우리는 매일 하루 두끼 혹은 세끼 밥을 챙겨 먹는다.

그런데 누가 밥 먹기를 신체적으로 슈퍼맨처럼 강철같은 몸으로 단련하려고 먹는가? 아니다. 그저 배고프니까 먹고 습관적으로 먹는 것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 건사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 몸은 언젠가는 죽어서 부패되고 사라질 것이다. 그날까지 날마다 빠뜨리지 않고 먹는다. 먹기로 유지되는 무상한 몸이다.

누군가는 정신적 양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지식의 조각들을 조금씩 더해서 자신의 마음과 정신에 통합시킨다. 그리고 이 지식으로 무장한 정신은 몸이 사라지면 또한 사라지게 된다. 정보로 확장되지만 결국 무상한 정신이다.


그래도 단 하나 죽어서도 가지고 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영혼이라 부르는 것이다(여기서는 편의상 영혼이라 부르겠다). 보통 영혼이 불멸이라 하지만 영혼은 불멸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는 동안 생로병사와 이별 등 존재의 괴로움을 지속하는 원동력이다. 이것은 마음의 독성인 탐진치를 연료로 삼아 거의 무한히 이어진다. 탐진치를 연료로 하므로 바른 명상을 통해 연료를 빼내고 제거하면 할수록 결국은 괴로움을 줄여가는 결과로 이어진다.


장자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지금, 장자의 이야기들을 상대성인 지식(앎)으로 남길 필요가 없다. 도와 합일되는 일, 열반과 해탈의 길이 너무나 먼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더라도 사실은 그럴 필요도 없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의 탐진치를 보면 된다. 이 일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우선은 마음의 흙탕물이 담긴 물통을 더 이상 흔들어대지 말자.

그러면 흙탕물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의 탐진치들을 보자.

무엇보다도 먼저 화와 짜증의 마음을 보라.

이것들은 보이기도 잘 보이고 내려놓기도 그나마 쉽다.

이 일이 명상의 첫걸음이다.

결국에는 도와 하나되는 평화로 이어질 것이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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