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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Aug 19. 2024

[장자26] 덕충부(5) 탐진치를 버리는 명상으로

덕충부(5) 하늘이 주는 죽 / 탐진치를 버리는 명상으로


[장자26] 덕충부(5) 하늘이 주는 죽 / 탐진치를 버리는 명상으로



18. 인기지리무신(闉跂支離無服: 절름발이 · 꼽추 · 언청이)이라는 사람이 위(衛)나라 영공(靈公)에게 간언을 했더니, 영공이 그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영공이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목이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습니다.


옹앙대영(甕㼜大癭:큰 혹부리)이라는 사람이 제(齊)나라 환공(桓公)에게 간언을 했더니, 환공이 그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환공이 온전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목이 야위고 가냘프게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뛰어나면 외형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잊어야 할 것은 안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습니다. 이런 것을 ‘정말로 잊어버림(誠忘)’이라 합니다.


19. 그러므로 성인은 자유롭습니다. 성인에게는 앎이 화근으로, 규약도 아교풀로, 얻음도 사람 사귐으로, 솜씨 부림도 장사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성인은 꾀하는 일이 없으니 앎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쪼개지 않으니 아교풀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잃음이 없으니 얻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물건을 돈 될 것으로 보지 않으니 장사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네 가지 함이 없어도 하늘이 죽(粥)을 줍니다. 하늘이 주는 죽이란 하늘의 음식. 하늘에서 음식을 받으니 인위적인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에서 발췌



이 글에서 장자는 꼽추, 혹부리, 절름발이 등 여러 다양한 장애인들을 등장시켰다. 덕이 있다면, 능력이 출중하다면 외모쯤이야 무슨 상관인가! 먼 과거에도 지혜로운 군주들은 실력이 출중하다면 외모나 신체적 장애와는 상관없이 기용했을 것이다. 한 편 생각해보면 오히려 장애인들의 인권을 높여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현대사회의 현실이 오히려 오래전보다 못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장애인들에 대한 장자의 높은 인식이 아닐까 싶다.


외모나 외형은 상관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늘이 주는 죽’ 이다. 결국 장자는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있다. 도(道)와 하나가 되어라! 세상에서 추구하는 지식, 앎, 얻음, 장사 같은 것들보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중요함을 알라!


필자가 스무살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아마 현재까지도) 오쇼 라즈니쉬의 책들이 꽤 유행하고 있었고 학교 도서관에도 그의 책들이 여러권 비치되어 있었다. 라즈니쉬를 비롯해서 여타 영적인 스승들이(주로 인도인들) 하나같이 비슷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 버려라! 버려라! 모두 다 버려라!


나는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기라성같은 분들이 다들 버리라고 강조하는데 스무살 열정으로 가득 찬, 햇병아리 같은 구도자인 내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부정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동시에 나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나는 구도의 열정을 가졌지만 또한 꿈 많고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찬 미래가 열려있는 젊은이였다. 물론 내 뜻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세상은 반짝반짝 빛났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버리라니!


그러던 어느날 라즈니쉬의 또 다른 책에서 나를 안도의 섬으로 데려다 줄 표현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당시의 내가 겪고 있던 혼란을 종식시켜 주었다.


“모든 것을 다 버릴 수 없다면

모든 것을 다 가져라!”


아무것도 버리지 않아도 된다.

모든 것을 다 가지자!

이 얼마나 속 편한 말인가.


그래서 나는 고흐의 삶을 택했다. 그 당시 내가 본 고흐의 삶은 미친듯한 열정이었다. 고흐는 그림에 미쳐서 자신의 귀마저 잘랐다(정신이상이라는 설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랬다). 내가 그처럼 자해를 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할 수 있던 모든 일에 미친듯이 몰두했다. 대학생이라 공부는 기본이라 생각했기에 밥 먹는 시간도 아낀다며 (동시에 밥값도 아끼느라) 매일 아침과 점심 두 끼를 굶어가며 그 시간에도 공부를 했다 - 요즘은 일일일식이 유행이기도 하고 부처님은 매일 일종식이라 하여 아침 한끼만 드셨다고 전해지지만 당시에는 그런 유행도 부처님의 일과도 몰랐다. 수업 외에는 도서관으로 직행해서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매일 밤 10시나 11시가 되면 학교 밖으로 나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새벽 3시까지 놀았다(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부처님 가르침도 따르지 않았기에). 그렇게 매일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놀고... 그야말로 공부할 땐 공부하고 놀 땐 놀자의 모든 것을 다했다. 지금 돌아보면 미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 때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 같다.


모든 것을 다 버리자는 의도가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의도가 자신의 모든 의도가 아니다. 나 자신이라 여기는 의식인 표면의식에 더불어 무의식(없는 무無의 의식이 아니고 자기자신도 잘 모르는 의식이다)도 포함된다. 그리고 전체 의식은 물에 잠긴 빙산에 비유된다. 물에 떠있는 빙산에서 물 밖으로 드러나 있는 부분은 기껏해야 10퍼센트 정도일 뿐이다. 즉 자기가 모르는 자기자신이 90프로는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겠다 라는 의도를 세웠다고 해도 많은 경우에 실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전체 의식 중에서 얼마 되지 않는 표면의식의 의도 정도만 작용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무의식이 정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겨우 표면의식 차원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겠다는 어마어마한 의도를 세워봐야 말짱 헛일이 될 것임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자는 의도를 가지기는 훨씬 쉽다. 무의식은 세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고 세상에는 욕심과 관련된 의도가 아주 풍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 비워야 한다는 전제로 돌아가보자. 과거의 나는 아주 단순하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비워야 한다고 여겼다. 구체적인 앎 이전에 이 두루뭉술한 표현은 더욱 어렵고 크게 느껴졌다. 그러나 버림과 비움의 핵심은 모든 것이 아니라 탐진치의 소멸이다. 부처님이 생존해계실 당시에 지금으로 치면 재벌급인 재가자의 몸으로 아나함의 경지 (해탈자인 아라한의 바로 아래 경지의 성자)에 이른 분도 계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우리같은 재가자들에게 집도 가족도 다 버려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출가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인도와 비교하면 사시사철 계절 변화가 뚜렷한데다 한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50대에 육박하는 한반도의 환경에서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갖추어야 할 물품들이 상당히 많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버려야 하는 핵심 대상이 탐진치임을 꼭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장자가 말하는 이 문단의 마지막 핵심구절을 보자.


성인은 자유롭습니다. 성인에게는 앎이 화근으로, 규약도 아교풀로, 얻음도 사람 사귐으로, 솜씨 부림도 장사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성인은 꾀하는 일이 없으니 앎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쪼개지 않으니 아교풀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잃음이 없으니 얻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물건을 돈 될 것으로 보지 않으니 장사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 네 가지 함이 없어도 하늘이 죽(粥)을 줍니다. 하늘이 주는 죽이란 하늘의 음식. 하늘에서 음식을 받으니 인위적인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성인은 함이 없다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송장처럼 가만히 있는다는 뜻이 아니다. 성인은 개인적으로 얻고자 하는 의도가 없기에 겉보기에는 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움직임의 바탕에는 하늘이 주는 죽이 있다. 기독교 등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는 기도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의도하는 나는 비었고 이미 장례 치른 자기자신(전편에 등장했던 오상아)이다. 하늘이 부는 피리이고 근원이고 도이며 드러나는 덕이다.


물론 이는 우리 모두가 궁극적으로 지향해 나아가야 할 바이지만 현재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필자도 알고 독자 여러분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탐진치가 근원의 빛을 막고 있고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만 두고두고 기억하면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탐진치의 비움,

당장은 다 할 수 없으니

지금 할 수 있는

한 걸음이면 된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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