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無情)과 유정(有情)
20. 성인은 사람의 모양을 지녔지만 사람의 정(情)이 없습니다. 사람의 모양을 지녀서 사람들과 섞여 살지만, 사람의 정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은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섞여, 실로 보잘것 없고 작으나 홀로 하늘과 하나 되었으니 실로 크고 위대합니다.
21. 혜자가 장자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에게 정이 없을 수 있는가?”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러하네.”
혜자가 물었습니다. “정이 없다면 어떻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도(道)가 얼굴 모양을 주고 하늘이 형체를 주었는데, 어찌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22. 혜자가 물었습니다. “사람이라고 하면서 어찌 정이 없을 수 있는가?”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말하는 정이란 그런 것이 아닐세.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 언제나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삶에다 억지로 군더더기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 것을 이름일세.”
23. 혜자가 물었습니다. “덧붙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몸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도(道)가 얼굴 모양을 주고, 하늘이 형체를 주었으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는데 지금 자네는 자네의 신(神)을 겉으로 드러내 놓고 정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네. 하늘이 자네의 형체를 골라 주었는데 자네는 지금 견백론(堅白論) 같은 것으로 떠들고 있네 그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에서 발췌
이 장에서는 장자가 직접 자신의 모습(이름뿐이지만)을 드러냈다. 혜자와의 대화 속에서 성인의 참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이전 장에서 설명한 내용이 중복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정(情)이라는 차원에서 묘사하는 점이 특이하다. 장자는 무정(無情)이라 하여 성인에게는 정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의 이 정(情)이란 것이 초코파이 광고에서 등장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겨움, 그런 것이 아니다. 도교나 동양철학 등에서 존재를 이루는 3가지 차원의 기운을 말하는 정기신(精氣神)이라 할 때의 그 정(精)도 아니다. 여기서의 정(情)의 사전적 의미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정情
1.뜻
2.마음의 작용(作用)
3.사랑
4.인정
......
독자들도 알다시피 사전에서 앞쪽 번호를 차지할수록 그 의미가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정은 사전에서 1에 해당하는 뜻 혹은 의지적 작용에 가깝다. 아래에서 장자 본문의 내용을 뜯어서 살펴보자.
20. 성인은 사람의 모양을 지녔지만 사람의 정(情)이 없습니다. 사람의 모양을 지녀서 사람들과 섞여 살지만, 사람의 정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은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섞여, 실로 보잘것 없고 작으나 홀로 하늘과 하나 되었으니 실로 크고 위대합니다.
성인도 겉보기에는 거의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 모양도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고 사람들 속에 섞여서 산다. 그래서 장자는 ‘보잘것 없고 작다’ 라고까지 표현했다. 하지만 내면에서 하늘과 하나 - 도와 합일 - 되었으니 그 진가가 남다른 것이다. 그런데 정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이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어째서 성인에게는 정이 없으므로 옳고 그름이 해당되지 않을까? 정이라는 것이 뜻, 의지, 혹은 의도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이 장자글의 이전 편에서 필자는 ‘의도 없음이 깨달음으로 향한다’ 고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이것이 곧 정 없음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성인은 자신의 의도 (이 글에서는 정)가 없다. 그럴 때 무엇이 현현하는가? 그것이 바로 도(道)이고 근원이고 하늘이다. 그래서 장자는 하늘과 하나되었으니 실로 크고 위대하다 하였다. 성인을 통해 하늘의 뜻(정情)이 흐른다. 어찌 표현하면 성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의도를 버리고 하늘의 뜻대로 흐르며 행위한다. 이것이 바로 노자 장자가 말하는 무위(無爲)의 참뜻이다. 참도인의 모습이다.
비구들이여, 세가지 자만심이 있다.
무엇이 셋인가?
'내가 더 뛰어나다'는 자만심,
'나와 동등하다'는 자만심,
'내가 더 못하다'는 자만심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자만심이 있다.
- 자만심경(상윳따니까야 S45:162) 중에서
언뜻 보기에 참 이상하게 느껴지는 구절일 것이다.
어째서 내가 더 못하다는 마음조차 자만심일까? 그것은 엄밀히 따지만 참으로 나라고 할만한 존재가 있다는 생각마저도 자만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이 가르침은 여기서 말하는 장자의 말에 참으로 크게 부합한다. 도와 합일한 의식의 성인에게 ‘나’ 라는 생각 혹은 ‘내가 한다’, ‘나를 위해서 한다’ 아니 더 크게 나아가서 ‘세상을 위해서 한다’ 는 등의 생각이 있을까? 빛과 밝음이 있으므로 어둠도 있다. ‘나’ 가 부재한데 나와 분리된 다른 ‘세상’이 있다고 여길까?
이와 반대로 어설픈(사이비) 도인들은 (사실 이런 이들에게 도인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주로 스스로 그렇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남들과 다른 줄 안다. 세상에 잘 섞이지도 못한다. 도인이라는 특별한 아이덴티티에 빠져 자신이 남들보다 잘난 줄 안다. 어리석은 이들을 속이기 위해 머리를 길러서 묶고 한복을 차려입고 그런 척 흉내를 낸다. 이런 쇼맨쉽이 어리석은 대중들을 속여서 유명해지기도 하고 일부 정치인들을 눈 멀게도 만든다. 산에서 수행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잡귀신이 붙어서 괴상한 능력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이들도 흔하다. 심리적인 면을 살펴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하는 생각으로 자존심이 강하지만 그를 잘 아는 주변인들은(특히 가족들) 그런 그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속상해하며 소위 깨달음이라는 상에 집착한다. 자신이 깨달으면 주변에서 자신을 인정해주리라는 가련한 믿음으로 집착하지만 그것은 결국 슈퍼에고로 향하는 길일 뿐이다.
혜자는 사람에게 어찌 정이 없을 수 있냐며 계속 따져묻는데 그런 그에게 장자는 무정(無情)의 또다른 속성을 이야기한다.
“내가 말하는 정이란 그런 것이 아닐세. 내가 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으로 속상하는 일이 없다는 것.”
성인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고 그러므로 그로 인해 속상할 일이 없다. 이전 글에서 필자는 이미 새옹지마의 정신을 강조한 바 있다. 당장 좋은 일이라 판단해서 크게 기뻐하고 싫어할만한 일이라고 판단해서 크게 슬퍼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돌고 도는 인생사에서 길흉화복에 집착하며 판단과 분별을 더해봤자 괴로움만 커질 뿐이다.
성인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좋고 싫고 하는 판단을 하지 않는다. 당장 우리의 상태가 성인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먼저 필요한 일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이상한 길로 빠져버린 사이비 도사에 비하면 이 사실을 기억하는 일반 사람들이 백 배 천 배 나은 길에 있는 것이다.
기억하려 의도하지만 망각하게 될 것이다. 뇌에서 그쪽 방향으로 뉴런들의 연결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길이 없던 숲 속에 사람들이 하나 둘 같은 경로를 지나감에 따라 길은 점점 더 뚜렷해진다. 우리 생활 속에서의 습관도 뇌의 신경세포인 뉴런들도 마찬가지다. 망각하고 기억하고 다시 망각하고 기억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길은 점점 더 뚜렷하게 생겨난다. 이 반복을 중단하면 생기던 길도 다시 풀숲으로 덮힐 것이다. 공부도 운동도 명상도, 그 어떤 습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반복함으로써 단단하게 다져진 길에는 풀이 쉽게 자라지 못한다.
“언제나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삶에다 억지로 군더더기를 덧붙이려 하지 않는 것을 이름일세.”
장자가 말하는 삶의 군더더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장자가 써내려간 혜자의 말에 드러나있다.
“...... 지금 자네는 자네의 신(神)을 겉으로 드러내 놓고 정력을 쓸데없이 소모하면서, 나무에 기대어 신음하고, 책상에 기대어 졸고 있네. 하늘이 자네의 형체를 골라 주었는데 자네는 지금 견백론(堅白論) 같은 것으로 떠들고 있네 그려.”
여기서 신이란 귀신같은 것을 말함이 아니고 정신을 뜻한다. 장자는 여기서 주로 지식의 덧붙임을 비판하고 있다. 아마도 혜자는 학문 연구에 열중하는 학자인 듯하다. 이전 장자 텍스트의 [제물론] 에서 ‘책상에 기대어’ 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했었다. 책상에 기대서 열심히 연구할 수도 하다 보면 졸려서 졸수도 있겠지만 도가에서는 지식의 추구와 집착을 경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서 견백론이란 중국 고대에 발달했던 궤변적 논리학 같은 것을 뚯한다.
지식의 덧붙임에 대한 경계에 더하여 우리는 명상의 관점에서 일상 속에서의 온갖 ‘덧붙임’들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감정에 감정을 더하고 느낌에 느낌을 더하는 덧붙임들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누구도 태어남과 죽음의 시초와 끝을 알 수 없다.
우리 중 누구도 태어나기를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죽기를 원해서 죽는 것이 아니듯이 (그래서 자살의 원죄는 씻기 힘들만큼 엄청나게 크다) 그저 그렇게 왔다가 가는 삶이다. 삶에서 가장 큰 두 사건이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악착같이 아등바등 하며 좋고 싫고를 가리고 정신과 정력을 소모하면서 살아간다. 장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시작과 끝과 마찬가지로 중간인 삶의 과정 그 모든 것이 ‘하늘이 자네의 형체를 골라주었는데’ 엉뚱하게 힘 빼며 살아가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필자는 노자와 장자의 단순한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무위無爲이다.
열심히 살지 마라 게을러도 된다, 하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악착같이 해라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꼭 해내야 한다, 하는 그런 소리도 아니다.
하늘의 뜻대로
중도의 흐름대로
집착 없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가야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삶.
어렵고 불가능하다고 여기면 정말로 더 그러하리라.
그저 방향이 그러함을 알고 오늘의 한 걸음을 옮긴다면, 되었다 안되었다 하는 결과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그렇게 마음 다잡으며
오늘의 한 걸음을 옮긴다.
P.S.1
개인적으로는 즐겁고 신나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쓰면서도 그런 마음의 글들이지만
인기도 별로 없는 이 글을 마음 비우며 써내려가는 지금이
제게는 오늘의 한 걸음입니다. ^^;;;
P.S.2
그래도 장자의 이 긴 본문에 대한 코멘트를 언제 다 쓰나 하는 생각조차 없이 한 꼭지 한 꼭지 써온 글이 어느새 연재를 끝낼 지점을 바라보고 있네요.
계속 읽어주시는 분들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눈팅만 하시는 분들은 간단한 댓글이라도 부탁드립니다. ㅎㅎ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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