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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Aug 30. 2024

[장자28] 대종사(1) 명상은 초능력으로 이어지겠지만


[장자28] 대종사(1) 진정한 앎 / 삼매 명상은 초능력으로 이어지겠지만


진정한 앎


1.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하늘과 함께 살아가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앎이 아는 것’으로 그의 ‘앎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완합니다. 이리하여 하늘이 내린 수명을 다하여 중도에서 죽는 일이 없는 것. 이것이 앎의 완성입니다.


2. 그러나 여기에 어려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앎은 무엇에 근거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앎이 됩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내가 자연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인위적인 것이고, 내가 인위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자연이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 오강남 교수의 장자 텍스트에서 발췌



소요유에서 시작한 장자의 이야기가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를 거쳐 대종사에 이르렀다. 이제 이 연재글의 대상인 [장자 내편] 은 이 대종사 편과 마지막 파트인 응제왕을 끝으로 마무리 짓게 될 예정이다. 대종사는 장자가 생각하는 참된 스승은 누구인가에 대한 서술이다. 이 편에서는 새롭게 참사람, 진인이라는 인물을 표상으로 하여 설명하고 있다.


장자가 말하는 진정한 앎은 지식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명사형인 앎과 동사형인 알다라는 단어가 여러번 반복되고 있지만 그 중 어떤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그 자체를 뜻하며 (고정된 지식) 어떤 것은 그저 내려놓듯이 인지하고 마는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을 뜻한다.


알다 라는 단어는 하나로 쓰지만 지식의 차원과 인지의 차원으로 나눠지는데 딱 잘라 나눌 수는 없지만 앎이라고 했을 때 좀 더 고정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말 ㅁ(미음)에는 움직이는 상태인 동사를 고정되고 굳어진 명사로 만드는 기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체로 앎이라는 명사는 같은 뜻의 동사 (알다) 에 비해 좀 더 고정된 지식의 의미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지식은 인간사에 필수적인 것이긴 하지만 필연적으로 집착이 뒤따름을 알 수 있다.


위의 대목에서 장자는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은 앎, 즉 지식과 관련된 일인데 이를 완성하기란 세상의 일반적인 생각처럼 쉽지 않음을 장자는 역설하고 있다. 세상은 (지금까지 장자가 계속해서 주장했던 대로) 상대적이기에 그 근거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결국 앎과 지식이란 상대적인 세상에 대한 것이기에 완성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이다.


장자는 ‘지극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하늘이 하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 이라고 주장한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하늘, 근원, 도(道), ...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간에 이름에 구속되지 않는다) 와 합일되고 그러한 큰 흐름에 동조되어 일을 하는 사람이다. 이는 ‘아는 사람’ 이라기보다는 ‘하늘의 일을 하는 사람’ 에 가깝다. 반면에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이란 사람이 추구하는 불완전한 상대성의 추구임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맥락에서 장자는 진인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인(眞人)


3. 그러므로 진인(眞人, 참사람)이 있어야만 참된 앎이 있습니다. 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의 진인은 모자란다고 억지 부리지 않고, 이루어도 우쭐거리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수를 해도 후회하지 않고, 일이 잘 되어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앎이 높이 올라 도(道)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텍스트에서 발췌



‘진인은 모자란다고 억지 부리지 않고, 이루어도 우쭐거리지 않고, 무엇을 하려고 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수를 해도 후회하지 않고, 일이 잘 되어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진인은 우주 전체나 다름 없는 도와 합일하여 그와 하나된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일반인들은 자기자신의 욕망과 의도인 작은 관점에서 일을 한다. 그러니 모자란다고 억지 부리고 이루었다고 우쭐거리고, 무엇을 하려고 열심히 꾀하며, 실수하면 후회하고 잘 되면 자만한다. 작은 자아가 파괴될까 두려워 높은 곳에 올라가면 무서워한다.


진인은...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워하지 않고... 까지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진인은 마음의 초월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에는 어긋난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하는 진인이란 그저 과장이고 비유적인 설명에 불과한 것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실제 일어난 일들을 전하는 -니까야 초기경전에는 신통력에 대한 묘사가 전해진다.


신통력은 삼매로부터 나온다고 한다. 붓다의 여러 제자들 중 가장 큰 직계제자 두 명 (이를 상수제자라 한다. 말하자면 붓다의 오른팔과 왼팔인 셈이다) 중 한 명인 목갈라나 존자는 붓다의 제자들 중에서도 신통력이 가장 뛰어나서 그 별명이 신통제일이었다. 뛰어난 신통력으로 승가에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그를 붓다가 제지하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정도 신통력이라면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일반적인 물리법칙에 지배 당하는 우리같은 중생들과는 달리 신통력이 극에 달하면 물리법칙을 완전히 초월할 수 있다. 예수도 적은 양의 빵과 물고기로 많은 중생들을 배불리 먹이고 물 위를 걸었다고 전해지고 있듯이 말이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관점에서는 물리적 세계가 몹시 단단하게만 느껴진다. 뉴튼의 물리적 시각 하에서 각각의 물체에 대한 경계는 너무나 견고해서 부딪치면 깨지고 부서지고 파괴된다. 모든 움직임은 특정 물리법칙의 예측 하에 있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의 양자 법칙에 의해 밝혀진 미시세계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많은 부분들이 의식에 의해 바뀌고 혼돈 그 자체이다. 원자핵과 전자 등으로 구성된 미시 세계는 거의 텅 비어있는 공(空)에 가깝다.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의 관계는 수천 년 전 지어진 반야심경의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심지어 어떤 양자 물리학자에 의하면 달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는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는 말을 남겼다.


겉보기에만 진실인 척하는 물리 세계를 초월할 열쇠는, 불가에서 신통이라 불리고 세간에서 초능력이라 불리는 능력의 열쇠는 초고도의 정신집중을 가능하게 하는 삼매 명상에 달려있다. 하지만 핵심은 능력이 아닌 집중이며 이는 세상에서의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닌 모든 존재의 고향인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티켓이기도 하다.


어째서 명상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해야만 하는가?

그것이 무한히 반복해야 할지도 모를 이 생과 사의 쳇바퀴에서의 괴로움을 완전히 종식시킬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진인의 길이다.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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