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4) 옛날의 진인은... / 도토리와 참나무 이야기
[장자31] 대종사(4) 옛날의 진인은... / 도토리와 참나무 이야기
옛날의 진인은
8. 옛날의 진인(眞人)은
그 모습 우뚝하나 무너지는 일이 없고,
뭔가 모자라는 듯 하나 받는 일이 없고,
한가로이 홀로 서 있으나 고집스럽지 않고,
넓게 비어 있으나 겉치레가 없었습니다.
엷은 웃음 기쁜 듯하고,
하는 것은 부득이한 일뿐,
빛나느니 그 얼굴빛.
한가로이 덕에 머물고,
넓으니 큰 듯하고
초연하였으니 얽매임이 없고,
깊으니 입 다물기 좋아하는 것 같고,
멍하니 할 말을 잊은 듯했습니다.
9. [옛날의 진인은] 형(刑)을 다스림의 몸(體)으로 삼고, 예(禮)를 날개로 삼으며, 지(知)를 때맞춤으로 생각하고, 덕(德)을 순리로 여겼습니다. 형을 다스림의 몸으로 삼았다는 것은 죽이는 일에 여유스러웠다는 것이요, 예를 날개로 삼았다는 것은 예를 세상에 널리 퍼지게 했다는 것이요, 지를 때맞춤으로 여겼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만을 했다는 것이요, 덕을 순리로 여겼다는 것은 발 있는 사람이면 다 오를 수 있는 언덕에 올랐다는 뜻입니다만, 사람들은 진인이 특별히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10.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과도 하나요, 좋아하지 않는 것과도 하나였습니다. 하나인 것과도 하나요, 하나 아닌 것과도 하나였습니다. 하나인 것은 하늘의 무리요, 하나가 아닌 것은 사람의 무리입니다. 하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서로 이기려 하지 않는 경지. 이것이 바로 진인(眞人)의 경지입니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여기서 장자는 옛날에 출현했던 진인에 대해 여러가지로 묘사하고 있지만 구절 하나하나를 분석하듯 쪼개어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어쨌든 진인에 대해 찬탄과 칭송을 거듭하는구나 하고 이해하고 넘어가면 되겠다. 일단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다음의 구절이다.
‘사람들은 진인이 특별히 열심히 노력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인의 마음씀과 몸소 실천함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위적인 노력이 없다. 그는 도와 하나 되어, 있는 그대로 행동하며 심지어는 떠오르는 생각들조차도 인위적이지 않다. 이렇듯 궁극에 가까운 상태이므로 특별히 열심히 노력한 것이 아니라 그저 큰 흐름, 하늘의 뜻과 기운에 감응하여 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함 없는 함, 무위의 위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세상에서 일을 이루어가는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즉 생각과 계획에 따라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에서 위로, 즉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해나가다 보면 퍼즐이 맞춰지듯이 큰 그림이 맞춰지는 방식이 있다.
보통 자기계발을 비롯해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의 방법론에서는 목표와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울 것을 강조한다. 목표와 계획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듯이 이야기한다. 물론 일반적인 관점에서 목표와 계획이 지극히 중요한 영역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 일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어떤 큰 일들은 작은 조각들이 우연처럼 맞춰지면서 일어난다.
1776년 8월 28일, 바람이 반대 방향으로 불었다면 조지 워싱턴의 부대는 포위되어 전투에서 전멸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미국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날의 바람의 방향 때문에 영국 해군이 이스트강 상류로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뉴욕을 출항해 영국 리버풀로 향하던 대형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는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제4호 보일러실의 가동을 중단했다. 이 때문에 선박 속도가 느려져 전체 항해 날짜가 하루 늘어났다. 속도가 느려진 루시타니아호는 독일 잠수함의 경로에 들어가게 됐고 독일 어뢰에 의해 격침되었다. 이로 인해 약 1,200명의 승객이 사망함으로써 미국인의 분노를 자극하게 되고 이로써 미국은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쪽으로 여론이 기울어졌다. 만약 루시타니아호의 제4호 보일러실이 가동됐다면 이 여객선은 독일 잠수함과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어뢰 공격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미국은 과연 세계대전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세계사의 흐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이 명칭 또한 대중적인 오해가 많은 듯한데 천주교(카톨릭)과 개신교를 통칭해서 기독교라고 부른다. 이 두 종교는 비종교인의 시각에서 보면 거의 유사하지만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견해 차이로 서로간에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는 실정이다) 와 이슬람교가 서로 전혀 다른 종교처럼 여긴다. 하지만 이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서로 형제나 마찬가지다. 신에 대한 이름 (여호와 VS 알라) 과 예수에 대한 견해가 다를 뿐. 하지만 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난 듯...
아무튼 무함마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의 손에 키워지다 그마저도 돌아가신 후 큰아버지 손에 키워졌다고 한다. 이후 25세가 되어서 돈 많은 과부에게 일자리를 얻어서 일하던 중 15세 연상의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넉넉해진 탓에 진리를 찾기 위해 명상을 하던 중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는다. 이 계시의 목소리는 그후로도 그가 죽기 전까지 22년 동안 들려왔다고 한다. 이렇게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를 통해 창시한 종교가 이슬람교였다. 이슬람교의 발전 과정이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고 수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결국 세계 4대 종교에 이르렀다. 또한 과거뿐만 아니라 현대의 세계사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엄청나게 불안정한 폭발물질인 나이트로글리세린이 든 플라스크를 우연한 실수로 떨어뜨린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이 작업실 바닥에 깔려 있던 톱밥에 얌전히 스며드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수로 노벨은 나이트로글리세린을 안전하게 길들이는 방법을 발견했고 파산 직전에서 살아나 30년간 350개가 넘는 특허를 획득하고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앞에서 예를 든 이야기들이 너무 스케일에 대한 것들일까? 역사적으로 그리 큰 사건은 아니기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역사적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들이 의외로 많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하는 것은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자전거는 앞으로 달리지 않으면 옆으로 쓰러질 수 밖에 없다. 안경이나 신발을 새로 사려고 관심을 가지면 우리 인식에는 그것들에 대한 정보만이 쏟아져 들어오게 된다. 그것만 보이게 된다. 이것은 목표를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늘 이런 식으로 시야를 좁히고서 눈의 바깥쪽 시야를 가리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우리는 때로는 좁은 시야를 가졌다가도 또한 넓게 보고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도 필요한 법이다. 이것은 자기 의지 혹은 고집을 내려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숲의 나무만을 보아서도 숲의 전체만을 보아서도 안된다. 필요에 따라 시야를 좁히고 넓히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평범한 의식 상태에서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고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상황들을 통제할 수 없다. 뜻대로 하려는 작은 자아를 넘어선 큰 흐름이 있음을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크고 작은 저항들은 길의 중심에서 길 밖으로 비켜날 것이다. 물론 우리는 큰 뜻이 무엇인지 큰 흐름이 무엇인지 자아와 머리, 이성과 논리로는 가늠할 수 없다. 그저 하루하루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순리대로 일어나도록 내맡길 뿐.
‘10. 그러므로 좋아하는 것과도 하나요, 좋아하지 않는 것과도 하나였습니다. 하나인 것과도 하나요, 하나 아닌 것과도 하나였습니다. 하나인 것은 하늘의 무리요, 하나가 아닌 것은 사람의 무리입니다. 하늘의 것과 사람의 것이 서로 이기려 하지 않는 경지. 이것이 바로 진인(眞人)의 경지입니다. ‘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야기지만 ‘하나’ 란 숫자 한 개 두 개 할 때의 수리적인 개념이 아니다. 하나란 우주 전체를 뜻하며 여기서 우주라는 것은 물리적인 우주뿐만 아니라 영적인, 그리고 모든 차원의 온우주를 다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모든 것이 있고 결국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하나인 것, 하나 아닌 것 모두가 ‘하나’ 이다.
그런데 장자가 하나인 것은 하늘의 무리요, 하나가 아닌 것은 사람의 무리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일까? 사람의 무리도 결국 ‘하나’가 아닐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하나’ 에 대해서 종종 ‘하늘’ 이라고 표현한다. 근원, 도, 하느님, 하늘, 절대자, 도...... 각각의 표현마다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 ‘하나’를 뜻하는 것이다. 인식과 관점의 차이에 따라 이 ‘하늘’을 하나의 중심으로 보기도 하고 사람의 무리나 온갖 사물과 존재를 다 포함해서 ‘하나’ 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 라는 말이 선불교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무리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성인과 진인이 될 수 있는 씨앗을 지닌 존재다. 스스로를 아주 작게 가두는 것도 그 무한한 잠재력을 사용한 결과다. 그래서 사람은 유난히 ‘하나’ 이기도 하고 ‘하나가 아닌 것’ 이기도 하다. 스스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거부하고 축소할 힘과 권리를 가지고 있고 이렇게 힘을 부정적으로 사용했을 때 굳이 ‘하나가 아닌 것’, 땅의 존재에 머무르게 된다. 반대로 ‘하나’ 이자 하늘의 존재로 되돌아가는 것도 힘을 사용한 결과다. 같은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고 하듯이.
우리는 도토리와 다르지 않다.
도토리는 그 자체로 이미 완전체이다. 그렇지 않은가?
자연과 생명의, 더 나아가 우주의 신비가 도토리 한 알에 다 담겨있다.
참으로 대단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그런데 이 도토리가 자의식을 가졌다고 가정해보자.
자신의 현재를 이와 같이 (위에서 서술한 대로)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도토리로만 존재하기를 고집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우물안 도토리’ (?) 인 셈이 될 것이다.
도토리는 참나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도토리의 운명이다.
숲 속의 도토리들을 떠올려본다.
어떤 도토리는 썩고 삭아서 다시 대지로, 근원으로 돌아간다.
어떤 도토리는 싹이 되어 자라날 것이고 잘 자라나는 듯하다가 죽을 것이다.
어떤 도토리는 다람쥐의 먹이로 소화되고 배설물로 대지로 돌아갈 것이다.
숲의 생태계는 그렇게 순환을 이루며 돌아간다.
(죽은 도토리는 다시 참나무 열매로 맺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리라...)
어떤 도토리는 끝까지 살아나 거대한 참나무가 되리라.
어떤 도토리가 거대한 참나무로 수백년을 살아가게 될까?
모든 도토리가 그럴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조건과 운이 맞으면 그러할 것이다.
주변을 둘러본다.
나를 포함해 각각의 도토리들이 나름의 꿈과 열정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간다.
......
모든 도토리가 참나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모든 도토리들의 평안을 빌어본다.
P.S.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거나 성취를 이루었다고 여기든, 어떤 사명이 있다고 믿든
그런 것들은 나 라는 실체있음(흔히 에고라 부르는 것)을 바탕으로 의미를 가지는 조건일 뿐이다.
이 몸과 마음이 죽어서 해체되면 그와 같은 것들의 가치는 모두 0으로 수렴하게 된다.
그런데 나 라는 믿음을 내려놓기 힘들기 때문에 들러붙은 다른 것들도 내려놓기가 그렇게도 힘이 든다.
그러니 먼저 자신을 숲속의 도토리 한 알이라고 상상해보라.
큰 도토리, 작은 도토리, 무수히 많은 도토리들이 떨어져있다.
그 중에 자신이 좀 작은 도토리라고 해서, 아니면 큰 도토리라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상대적인 비교는 무의미하다.
도토리는 그저 참나무가 되면 되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 도토리 여러분~ 언제 참나무가 될지는 알 수 없으니 오늘은 그저 오늘의 최선을 다하며 힘내서 살아갑시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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