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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Sep 18. 2024

[장자32]대종사(5) 육도윤회에서의 해탈

대종사(5) 죽고 사는 것 / 육도윤회에서의 해탈


[장자32] 대종사(5) 죽고 사는 것 / 육도윤회에서의 해탈


죽고 사는 것


11.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밤낮이 변함없이 이어지는 것과 같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모든 사물의 참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늘마저 아버지처럼 여기고 몸 바쳐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늘보다 더욱 뛰어난 것을 위해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임금마저 자기들보다 낫다 여겨 목숨을 바치는데, 하물며 임금보다 더욱 참된 것을 위해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죽고 사는 것이 운명임은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인정하는 부분이다. 2천년 이전 장자의 시대나 현대인들에게나 마찬가지로 다가온다. 태어났으니 늙어야 하고 죽음이 닥친다. 변함 없는 운명이다. 장자는 이것이 밤낮이 변함 없이 이어지는 것이라 한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과학적 상식을 바탕에 두고 살아간다. 그렇다는 것은 대체로 유물론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자신이라는 존재의 중심이 육신에 있다고 여긴다. 마음은 이 몸 안에 임시로 거주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그러므로 실체가 없다 - 이 부분은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전개되어야 옳을 것이나, 실상에서는 모두가 죽기는 죽는데 한 번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면 무섭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은연 중에 몸이 사라져도 소멸되지 않는 영혼이라는 것은 있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이런 생각을 단단히 붙들고 살아간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신념이 우리 대중 사회적 문화 속에 은근히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혹은 몸이 죽음을 맞이하고 난 후에도 그것이 그 사람의 실체라고 여긴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죽은 자식이나 가족 등에 대해 강하게 부검을 반대하는 장면 등이 나온다. 죽은 존재의 실체를 몸 그 자체라고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이다. 적어도 매장하거나 화장해야 할 시신을 아예 잃어버리는 것도 아닌데 칼 좀 대는 것이 뭐 그리 결사반대할 일이란 말인가. 마찬가지로 죽은 후 매장된 시신을 향해 차가운 땅 속에 묻혀 얼마나 외로울까 하며 오열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심정이야 십분 이해가 가지만 시신은 이미 그 사람이 아닌데 이런 인식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여길만한 실체는 무엇인가? 몸과는 별개로 뭔가가 존재한다면 육신이 죽은 후 몸에서 이탈한 본연의 존재는 어디로 갔을까?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이런 궁금증을 품고 지냈던 필자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었다.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 등에서는 교회를 믿고 아니고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 영원히 처박힌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에 의하면 인생은 너무나 짧고 사후세계는 너무 길다 (영원하다). 20대 젊은 시절 성경 읽기 모임에 대인배적인(?) 마음으로 참여했다가 (예배에는 이미 학을 뗀? 상태라 절대 참여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참여했었다) 들은 이야기인데 그 사람들은 성경 외에는 모두 쓰레기 라고 했다. 누가 쓰레기인지 모르겠어서 당장 발을 끊었다. 어릴 때부터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은 태어나면서 종교가 정해진 사람들은 아무리 선하더라도 지옥에 간다는 것이 너무나 불합리하다는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인도인들의 대부분은 태어나면서부터 힌두교다. 인도(india)라는 이름 자체가 그 첫글자에 h가 묵음으로 숨겨져 있다고 한다. 즉 (h)ind-ia(인도) 는 h-ind-uism(힌두교)와 같은 어근을 바탕으로 한다. 대충 퉁친 개념이긴 하지만 인도=힌두교 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어쩌나, 인도인들 대부분은 출생 자체가 지옥행이나 마찬가지다. 혹시 이 글을 보는 크리스챤인 분이 그들도 기독교로 개종하면 된다는 말은 제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보통은 카톨릭보다는 개신교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번에는 유물론자들의 죽음 이후의 견해를 보자. 유물론자들은 죽음으로써 존재가 완전히 소멸된다고 한다. 그러니 세상에 태어나서 큰 죄 짓고서 호의호식 하며 살다가 조금 일이 틀어지면 자살로 자신의 입 틀어막고 해결하면 끝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들 나오나보다.


어떤 이들은 윤회를 언급하는데 있어서 인간의 영혼은 오직 인간으로만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주로 최면요법을 통한 사례를 추적 관찰한 이들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불교의 윤회론은 좀 다르다. 불교에서는 육도윤회라 하여 여섯 가지 존재계인 천상계(천국), 인간계, 축생, 아귀, 아수라, 지옥, 이렇게 여섯 세계를 과거에 지은 업보(원인과 결과)에 따라 윤회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모태신앙은 카톨릭이었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특히나 순종적인 성격이었기에 어른들의 뜻에 잘 따르는 착한 아이였다 (이후 사춘기와 함께 가까운 이들의 병고와 죽음이라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반항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 카톨릭으로 영세까지 받고 요한이라는 세례명까지 받았지만 교회의 교리는 도저히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녀님과 신부님에게 틈 나는 대로 인간을 신이 창조했다면 신은 누가 창조했는가 와 같은 질문들을 퍼붓곤 했다. 돌아온 대답은 “그런 질문은 하는 게 아니다” 였고 그 어린 시절에도 나는 “여기는 내가 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필자는 윤회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결정적으로 두 가지 의문을 낳았었다.


첫째로 최면을 바탕으로 한 연구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만 환생한다고 하는데 어째서 불교의 육도윤회(특히 동물로도 다시 태어남) 와는 다른가?

둘째로 육신으로 살던 존재가 죽어서 윤회한다면 제삿날 집으로 (제삿밥 먹으러?) 돌아오는 혼령, 묘터의 기운과 동화되어 자손에게 길흉화복 등의 영향을 주는 기운, 한이 서려서 저승으로 못가고 이승을 떠도는 귀신 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는 먼저 육도윤회에 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죽어서 갈 수 있다고 하는 육도에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천국이나 지옥이 포함된다. 대신 기독교의 주장처럼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고 무한정 그곳에 발이 묶이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 지은 공덕과 죄의 크기에 따라 내생에서 재생한 각각의 장소에서의 삶의 수명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천국에 천신(天神)으로 태어난 존재도 그곳에서의 수명이 다하면 다음 생에 이전 생(윤회는 계속 이어지므로 2,3,4...를 넘어서 수천 수만의 이전생도 있을 수 있다) 에서의 공과에 따라 인간이든 축생이든 다시 윤회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섯 장소를 돌고 도는 삶과 죽음을 거의 무한히 반복한다. 이런 쳇바퀴를 벗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 해커붓다라는 책을 쓴 저자는 이 과정을 무한루프로 비유하고 이런 반복에서 탈출하는 것을 붓다의 가르침을 마스터함으로써 해탈하는 길이라 표현했다.


여기서 약간의 의문이 생겨날 수 있는데 인간과 같은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가 어떻게 다시 축생으로 윤회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나 에고의 무지에 집착한 의문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지능은 해당되는 동물의 두뇌에 종속된 조건일 뿐임을 간과했기 때문에 이어진 결과다. 즉 의식으로서의 존재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면 인간 수준의 지능을, 동물의 몸으로 태어나면 해당 동물 수준의 지능을 받고 그에 상응하게 행동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인간 혹은 어떤 낮은 지능의 동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삶에 주어지는 자유, 잠재력, 선택권, 괴로움과 행복 등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을 것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최면을 통한 윤회에 대한 사례 연구에서 인간이 인간으로만 환생한다는 결과는 전체 윤회의 사례에서 일부 결과만 도출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듯하다.


둘째로 윤회하는 존재와 귀신 등 이승을 떠도는 존재의 차이를 살펴보자.


요가나 오컬트를 비롯해 우리 전통 체계에서는 관점에 따라 존재를 여러 계층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예를 들어 오컬트 체계에서는 에텔체, 아스트럴체, 멘탈체 등으로 나누며 우리 전통에서는 영, 혼, 백, 넋 등으로 나눈다. 이는 물질적 존재(쉽게 말하면 몸) 이외의 존재의 다른 차원들 - 하나로 뭉퉁그려서 기氣 라고 표현하곤 하는 - 이 여러 계층으로 나눠져 있음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는 오컬트 등 체계에서는 이런 비물질적 차원의 아주 세세한 지식들을 공부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알지만 - 필자도 과거에 오컬트에 잠시 심취한 적이 있기에 - 지금은 그런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아무튼 인간의 살아생전의 기억, 습관, 집착 - 부정적인 방향으로 그런 에너지가 응집된 것을 한국어로는 주로 ‘한’ 이라고 표현한다 - 과 같은 것이 모여서 특정 개별적 인간의 에너지체를 남긴다. 이것은 자신이 본체가 아니면서도 그 사람인 것처럼 여기고 행동한다. 어찌 표현하면 그림자 인간인 셈인데 이것을 흔히 귀신이라고 표현하며 인간세상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본체인 의식은 전생과 이생의 업보에 따라 윤회의 길을 떠났을 것이다.


명상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그림자 존재를 남기지 않고 떠나는 일일 것이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집착이나 한이 강할수록 이런 인공지능적인(!?) 쓰레기를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기 때문이다.


최근 크게 유행했던 파묘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장례 풍습은 본래 화장이 아닌 매장이었다. 매장은 고인의 전체 존재 계층 중 물질에 가까운 기운과 묘터의 기운이 어우러져 그 집안의 자손들에게 좋고 나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한반도가 그리 넓은 땅도 아닌 데다가 매장되는 사람들이 늘어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소위 명당터라는 곳들은 대부분 사라졌다. 매장 가능한 임야 등도 소수 사람들의 소유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명당을 찾아서 매장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나마 화장을 하게 되면 자손에 대한 좋거나 나쁜 영향 모두가 존재하지 않게 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장된 유골은 어느 곳에 보관하든지 상관이 없다. 물론 함부로 방치하는 일은 고인이나 조상 등에 대한 예의에 어긋날 일이니 주의할 일이다.


공자는 죽음 이후에 관한 질문에 ‘사는 것도 다 모르는데 죽은 후를 어찌 알겠냐’ 는 대답을 했다고 전해진다. 참 멋지게 잘 피해갔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석가모니 붓다 시절 인도에는 걸출한 명상가들이 많았고 붓다를 포함한 여러 이들은 삼매 명상의 높은 정신력을 통해 지난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결국 이런 정황에 비추어볼 때 공자의 정신력이 어디까지였나 하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그를 시발점으로 이어온 유교는 중국과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는 없고 사회구조의 안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속담에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굳이 이름을 남기려고 노력할 이유가 있을까?

그저 명상 공부 잘 해서 존재적 쓰레기도, 내생의 어떤 존재도 만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붓다의 연기법의 가르침대로 태어남이 없으면 출생에 뒤따르는 괴로움도 없을 테니까.

이런 수석은 아니더라도 차석으로 정거천 (그 다음 생에는 무조건 해탈하여 소멸이 예정된 천상세계 중 하나 )

이라도 갈 수 있으면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텐데 말이다.


P.S.

그런 생각은 나중 일이니 오늘은 그저 오늘의 한 걸음으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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