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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Sep 08. 2024

[장자30] 대종사(3) 참나가 되는 비움의 명상

진인(眞人)과 성인(聖人) / 참나가 되는 비움의 명상

[장자30] 대종사(3) 진인(眞人)과 성인(聖人) / 참나가 되는 비움의 명상



5. 옛날의 진인(眞人)은 삶을 즐겁다 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다 할 줄도 몰랐습니다. 태어남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거역하지도 않았습니다. 의연히 갔다가 의연히 돌아올 뿐입니다. 그 시원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끝을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삶을 그대로 받아들여 살다가, 잊어버린 채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를 일러 마음으로 도를 해치는 일이 없고, 사람의 일로 하늘이 하는 일에 간섭하려 하지 않음이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인(眞人)입니다.

  6. 이런 사람은 마음이 비고, 모습이 잔잔하고, 이마가 넓었습니다. 그 시원하기가 가을 같고, 훈훈하기가 봄 같았습니다. 기쁨과 노여움이 계절의 흐름같이 자연스럽고, 모든 사물과 어울리므로 그 끝을 알 수 없었습니다.

  7. 그러므로 성인은 군대를 움직여 적국을 망하게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잃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로움과 혜택을 만대에 두루 베풀지만, 사람을 특별히 편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물에 통달하려는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편애하는 사람은 인자(仁者)가 아닙니다. 하늘을 시간으로 구분하는 사람은 현자(賢者)가 아닙니다. 이해(利害)에 걸림이 있는 사람은 군자(君子)가 아닙니다. 이름을 위해 참된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선비(士)가 아닙니다. 참된 자기를 잃고 참됨이 없는 사람은 딴 사람을 부리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치 고불해(狐不偕), 무광(務光), 백이(伯夷), 숙제(叔齊), 기자(箕子), 서여(胥餘), 기타(紀他), 신도적(申徒狄)처럼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을 뿐, 스스로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 중에서 발췌



앞에서도 여러번 등장했던 도(道)와의 합일을 이룬 사람의 좋고 싫고 하는 판단분별을 떠났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장에서는 단지 그렇게 도와 하나된 사람에 대해 진인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되었을 뿐이다. 


여기서는 ‘참된 자기’ 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요즘말로 하면 참나쯤 될 것이다. 많은 구도자, 명상가들이 참나를 찾아서 헤맨다. 이런 목적 하에서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을 부정한다. 그러면서 참나가 되면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 될 거라 여긴다. 그것은 그저 자기자신만의 세계 안에서의 이상향이다. 그렇게 위대한 깨달은 이가 되면 지금 자신을 무시하고 상처주는 주변 사람들이 그제서야 자신을 알아봐주고 인정하게 되리라고 여긴다. 


하지만 꿈 깨라! 그런 깨달음은 없다. 그런 깨달음을 꿈꾼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이 몽상가라는 현실과 자신의 수준을 말해줄 뿐이다. 그런 모든 일들은 현재를,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자기자신부터 사랑하라고. 특정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자신이 현재 어떤 조건에 처해 있든 자기자신부터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모든 깨달음의 시작이다. 그러면 자애로운 마음으로 스스로를 대할 수 있게 되고, 지나온 자신의 길에 대해 눈물을 흘리게 된다. 


그리고 참회하라!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에 대해서 먼저 참회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참회하기보다 스스로에게 참회하기가 훨씬 쉽다. 그러니 그래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의 잘못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먼저 일어났으니까.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항상 문제의 첫단추였다. 자신에게 참회할 수 있을 때 진정 타인에게도 참회할 수 있게 된다. 사실은 나와 남 사이에 명백한 구분은 없다. 그저 ‘나’ 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뿐. 엄밀히 따지자면 나라는 존재는 좀 더 가까이 있는 남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모든 변화는 외부가 아닌 자기 내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를 대하듯이 남을 대하고 남을 대하듯이 나를 대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자신조차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알면 너무나 자연스레 자기자신도 그렇게 대할 수 있게 된다. 우주는 무한에 가깝게 넓을지 모르지만 결국 모든 경험은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붓다의 탄생과 관련된 내용 중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라고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는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첫번째는 생사의 무한한 괴로움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법을 깨달아 세상에 널리 가르친 붓다의 존귀함을 뜻하는 의미다. 다른 하나는 모든 중생들에 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은 그들 각각이 천상과 천하를 통틀어 유일한 경험을 한다. 내가 존재하기에 우주가 존재하며 내가 완전히 소멸된다면 이 우주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경험할 내가 없는데 광대한 우주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붓다는 자비희사(慈悲喜捨) - 자애, 연민, 기쁨, 평안 - 의 마음을 우주에 가득 채우면 그것은 곧 해탈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자신의 마음에 이 네 가지 사무량심으로 가득 채워서 털끝만큼의 다른 생각, 다른 감정, 다른 의도 등 그 무엇도 자리잡을 틈이 없다면 그 마음에는 괴로움도 그늘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것은 곧 모든 생사를 초월한 깨달음의 마음이다. 그러니 이 마음에 우주가 다 담겨 있으며 이 마음 하나 완전히 자비희사로 채워지게 되면 괴로움의 완전한 종식과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어떤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그와는 정반대임을 단 0.1초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근본 이유가 탐진치 때문이다. 탐진치가 극도로 커져있는 상태에서는 자신에 대한 집착이 커져서 자신과 외부가 완전히 분리되어 보일 수 밖에 없다. 자비희사의 마음이 발 붙일 곳이 없다. 이럴 때 남을 나 보듯 하는 양심도 사라진다. 나와 남의 경계의 벽이 너무나 두꺼워져서 자타불이(自他不二)인 진실과는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참된 자기 - 참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조건이나 스펙을 쌓아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명상을 몇 년 이상 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 그렇다고 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도 아님에 주의하자. 이것은 쌓아서 될 일이 아니라 버려야 하는 일이다. 덧붙여서 될 일이 아니라 내려놓아야 하는 일이다. 


이전의 글에서 언젠가 현재 상태를 하늘을 가득 뒤덮은 먹구름에 비유한 적이 있다. 태양은 보이지 않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태양은 항상 거기에 존재해왔다. 어떤 선지자가 저 하늘에는 눈부시게 밝게 빛나는 태양이 있음을 전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못한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구름이 걷힌 하늘과 그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멸시 받는다.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먹구름을 걷어내는 것 뿐이다. 태양을 만들어내겠다고 계속 덧붙이는 어리석은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먹구름이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탐진치다. 

이 먹구름을 걷어내면 - 이것이 참된 명상이다. 비움의 명상이다. 덧붙임의 명상이 아니라 - 태양은 자연스레 그 모습을, 강렬한 빛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이 장자가 말하는 참된 자기 - 참나이다. 

그 참나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그것은 그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도와 하나됨의 길이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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