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직업 변천사

니는 도대체 하는 일이 뭐고? (경상도 억양 주의)

KakaoTalk_20250513_190009190.jpg





"너는 도대체 직업이 뭐고?" (경상도 말투)


18년쯤 전의 일이던가, 명절 때 만난 작은 어머니가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뭐라고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워 마땅한 대답은 못하고 그저 피식 웃고 넘겼던 기억이 난다.


나는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IT 기업에서 7년 동안 일했다.


대학에서도 대학원에서도 컴퓨터 관련으로 전공을 했고 이쪽 전공을 하자고 결심한 일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그런 내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서 직장인도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발주를 받아 일을 처리하는 프리랜서도 아닌, IT쪽 일도 아닌, 명확하게 정의하기 힘든 기존에 없는, 그야말로 이상한 일을 직업이랍시고 하고 있으니 기성세대인 작은 어머니 - 특히 남편인 작은 아버지는 대학 교수였다 - 의 눈에 비친 나는 신기한 요물?일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요물이라고 표현할 만한 것이 보통 요물이라 하면 요물단지라는 표현이 동반되지 않는가. 이상한 직업도 직업이라고 거기서 돈을 버니 - 돈이 나오니 - 요물단지라고 생각할 법도 하겠다.


당시에는 강남 서초동 쪽에 위치한 공유오피스 - 넓은 공간을 여러 방으로 나누어 사무실로 임대해주고 우편수취 같은 업무를 대행하는 곳 - 를 이용했었다. 처음에 세무서에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땅한 직업 코드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학원업이었나 그런 코드를 선택했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우연히 접하게 된 명상으로 인해 어둠에서 밝음으로 180도 방향을 틀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마음이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일념 하나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20년 전의 일이다.

SNS도 AI도 블로그도 스마트폰도 없던 당시에 새로 생겨나 뜨던 인터넷 커뮤니티는 카페였다. 네이버 카페는 없었고 다음 카페만 존재했다. 당시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만든 다음 카페가 나의 직업적 기반이 되어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 때였다.

당시 사회를 꿰뚫던 키워드는 '웰빙'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사회란 곳은 항상 직업적 물질적으로 큰 문제 없는 사람들과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곳이지만 아무튼 그랬다. 젊은이들은 - 나도 이런 축에 들었던 나이다 - 더 나은 미래를 꿈꿨고 자기계발에 힘을 쏟았다.


당시에 나는 충정로에 오피스텔을 얻어서 자기계발 프로그램 운영에 최선을 다했다. 경제적으로 좋았던 때인가? 그런 것은 잘 모르겠다. 당시에는 그런 데는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마음이 괴롭고 힘든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당시에는 '자기계발' 이라는 시장이 형성되고 활성화되던 시기라 나는 나름 순풍에 돛을 단 듯이 나아갔다. 내가 만든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매달 운영하고, 상담을 하고, 뉴로피드백이라는 뇌파 관련 기기도 다루는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당시에 관련 책도 세 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너는 하는 일이 뭐고?"


뭐, 이것저것 하느라 무엇이 메인이고 무엇이 서브인지 구분도 안되고 기존에 없던 직업이었던 터라 여전히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마음이 가면 앞뒤 재지 않고 다소 즉흥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편이라 - 이런 나를 파워J라 할 수 있을까 - 삶에 몇 가지 큰 변곡점들이 존재한다. 앞의 이야기에서처럼 IT맨으로만 살아오던 삶에서 기계를 놓고 사람의 마음을 대하는 일이 그 중 하나였다.


그렇게 지내던 나는 어느날 시골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 글자로 줄이면 귀촌 이다 - 시골로 거처를 옮기기만 하는 것인데, 옮겨서 농사를 업으로 하면 이것을 귀농이라 한다.


1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대의 발품을 참 많이 팔았다. 거의 매주 거처와 명상센터를 겸할 땅을 찾기 위해 임장을 다녔다.


그러다 찾은 곳이 양평이었고 당시에는 양평 용문산 자락의 한 전원주택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마음의 거리' 가 존재한다는 것을.

무슨 말이냐 하면 지방에서 서울 가기는 가까워도 서울에서 지방 가기는 멀다는 뜻이다. 같은 거리 같은 시간이라도 말이다.


나는 서울 한복판의 사무실에서 하던 자기계발과 명상 교육을 경기도 양평에서 하려고 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서울에 비하면 교통이 안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이동하는 동기의 부여는 그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서울에 있을 때는 한참 잘 나가던 수입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자,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시대가 왔다.

언제부터 언제라고 딱 선을 긋기는 애매한데 이 즈음에 키워드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바로 '헬조선' 이었다.

나는 이후로 양평을 제2의 고향 삼아 지냈기 때문에 집 값이 어쩌고 하는 문제에서는 자유롭게 지낸 편이다. 하지만 대중적인 사람들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은근히 민감한 편이었다. 이 때 이후로 미래의 희망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매달 사람들을 모아 해야하는 교육에서 벗어나 꾸준히 수행해야 하는 명상 교육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었다. 명상센터를 운영한다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한데 당시에는 월 1-2회 직접 사람들을 만나 명상 관련해서 지도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매주, 대전에는 월 2회, 부산을 월 1회, 한동안은 전라도 광주를 월 1회 직접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국 투어를 하다시피 했다.


"너는 하는 일이 뭐고?"


이 당시에만 해도 이런 질문에 답하기가 애매했던 것 같다. 명상원을 하고 있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 어디 장소를 구해서 지속적으로 명상 과정을 하는 것과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후에 코로나 팬데믹이 터졌다.

다행히도 내가 지도하던 명상 과정의 전부를 온라인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일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직업이 뭐냐고 누군가 물으며 한 마디로 답하라고 강요(?)한다면 일반적인 개념에서는 뭐라 말하기 애매할 것 같다. 아, 가끔 금융회사의 투자 관련 내용 확인서 같은 데서 직업이 뭐라고 입력해야 할 때는 난감할 때가 생기긴 했다. 그래도 이젠 써낸 책이 4권이다 보니 적당히 둘러댈 아주 좋은 핑계(?)가 있어서 좋은 것은 사실이다.


이젠 그냥 편하게 말할 수 있다.



"너는 도대체 직업이 뭐고?"
"작가에요."

대기업에 부장으로 일하는 중인 친구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가 제일 부럽다고 한다. (나 혼자 생각이지만) 이 정도면 어디가서 꿀릴 일은 없겠다.


P.S. 대신에 은행 대출 받아야 할 때가 제일 곤혹스럽다.

매거진의 이전글귀촌이 파이어에 도움이 되는 결정적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