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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무아미타불 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

불교 명상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시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 습관처럼 하는 말이 있다.


나무아미타불!


말의 의미를 알고도 쓰고 모르고도 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모르고서 습관처럼 쓰는 것보다 더 나은 믿음 체계를 갖게 될 것이고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상식 하나 추가할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


물론 말의 방점은 아미타불에 있을 텐데, 어째서 나무- 라고 하는 것인지부터 알아보자.


아미타불은 쉽게 말하자면 극락세계의 주인이 되는 부처의 이름이다.

나무 라는 접두사는 -이시여~ 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불교학을 다 제쳐두고 최대한 간단하게 의미만 파악해보자면 '아미타 부처님이시여!' 라고 염원하고 부르는 의미이다. 보통 염불이라고 표현한다.


무교인 사람들에게는 맹목적인 신앙이 무슨 도움이 되겠어? 라고 단순하게 치부해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염불이나 기도는 그저 종교적인 예식의 행위를 넘어서 '마음을 하나로' 하는 크나큰 효과가 있다.




주의注義 - 명상, 사띠, 마음챙김...의 바탕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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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붓다의 본래 가르침을 잘 살려내고 있는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초기불교에는 사띠sati 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것은 보통 마음챙김이라 번역된다.


마음챙김은 마음과 챙기다는 동사의 합성어로 본래 존재하는 우리말은 아니다.

사띠 라는 용어를 한글화 하다 보니 마땅한 말이 없어서 새로 지어낸 말이다. 영어로는 보통 마인드풀니스 Mindfullness 라고 옮기는데 이 또한 신조어로 보아야 한다.

사띠를 마음챙김이라고 옮기기 전에는 '알아차림' 이라고 쓰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지만 이 또한 사띠의 모든 것을 뜻하는 용어는 아니라고 본다. 사띠의 여러가지 특성 중 하나가 알아차림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마음은 기본적으로 날뛰는 야생마, 술취한 코끼리, 미친 원숭이와 같은 속성을 지녔다.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시간을 내어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이해하겠지만 그만큼 주의注意는 이리저리 날뛰기 때문이다.


명상의 기본은 이 날뛰는 동물을 말뚝에 줄을 매어놓고 길들이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이 잠잠해지면 생각지도 못했던 특이한 현상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 현실은 우리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편견처럼 그렇게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날뛰는 동물은 우리 마음의 주의注意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것에 휩쓸려서 마음의 에너지를 주는 동안, 그 에너지를 받아 먹고 힘을 내서 여기저기로 더더욱 날뛴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인 존재, 하나인 마음인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 속에서 만큼은 손오공의 분신술처럼 둘이든 셋이든, 아니 그 이상으로도 나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분신의 마음은 다른 분신의 마음에게 에너지를 주고 날뛰게 돕는다.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집중' 이 필요하다.

외부의 어떤 사물이 아니라 자기 내면, 혹은 신체의 어느 하나에 마음을 모으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무지하게 괴롭다.

계속 신경쓰던 현실적인 일들, 자신을 괴롭게 했던 누군가의 말들, 온갖 잡동사니 같은 것들이 솟아올라 자신을 괴롭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어딘가에 - 주로 들숨과 날숨 - 집중하려고 의도했는데 그 단순하고 쉬운 일조차 몇 분 지속하기 어렵다는데 자괴감을 느낄 지경이 된다. 이런 마음이 심해지면 엎친데 덮친다는 표현처럼 더더욱 괴롭게 된다.


그래서 '쉬운 명상' 의 방법에는 그나마 염불이라는 것이 있는데, 너무나 다행하게도 이것은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주셨던 가르침에도 속하는 것이다.


초기경전 곳곳에서 강조하는 가르침 중에 아눗사띠(아누사띠) anussati 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사띠sati와의 합성어로 유익한 다른 대상에 마음을 모으라는 의미다. 여러 대상들이 있겠지만 그중 대표적인 대상이 부처님을 떠올려 마음을 모으라고도 한다. 이것이 즉 염불의 의미가 된다.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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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아눗사띠를 통해 어떤 부처님에게 마음을 모으고 염불을 하기는 하는데 왜 아미타 부처님일까?


우리는 보통 붓다 라고 하면 석가모니 붓다를 떠올린다.

2,600 여년 전 인도에서 실존했던 석가모니,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 왕자로서의 모든 지위도 물질도 다 버리고 출가하여 고행하고, 이후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진 바로 그 싯달타 태자가 맞다.


그럼 아미타 부처님은 누구인가?

이분은 실존인물이 아닌, 그야말로 종교적 대상, 신앙의 대상이다.

수많은 불교의 종교적 갈래의 한 축을 차지하는 정토종 신앙의 주축이 되는 부처다.

석가모니불과 아니타불의 차이라면 실존인물과 가상인물의 차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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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를 더불어 중국, 일본에 뿌리 내린 불교를 대승불교라 하고

주로 동남아를 중심으로 뿌리 내린 불교를 소승불교라 한다.


대승이란 큰 탈 것을 뜻하고 소승이란 작은 탈 것을 뜻하는 말인데 이유는 대승 불교는 주로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자고 하기에 '크다' 고 하고 소승 불교는 자기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하기에 '작다' 고 한다. 그렇기에 전체 불교 역사의 상반기 천 년의 주를 이룬 소승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반발처럼 일어난 것이 대승 불교일 수 있다. 소승이라는 용어 자체가 큰 것에 대비하여 비하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붓다 본래의 가르침과 행적을 담은 경전을 초기 경전이라 통칭하는데 보통 원어로는 -니까야 라고 한다. 이를 한자로 옮긴 경전이 아함경이다 - 사실상 한역 되면서 왜곡된 부분이 있어서 니까야를 읽는 것이 좋은데 일단은 아함경을 수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니까야와 아함경의 내용은 주로 석가모니 붓다의 행적과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 여시아문(如是我聞) 으로 시작되는데 '나는 이렇게 들었다' 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 사후 그 가르침을 왜곡 없이 보존하기 위해서 500명의 깨달은 비구들 - 모두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들이었다. 이들은 일반인의 정신능력이나 기억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상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다 - 이 모여 모든 가르침들을 하나로 모은다. 이를 1차 결집이라 한다.


반면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주로 '붓다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며, 가상의 부처와 제자를 내세운다. 그래서 그 내용 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본래의 가르침과 상당히 상통하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상당히 멀어진 내용도 있다. 대승 불교 경전은 한역 경전이라면 아함경을 제외한 모든 경전 - 금강경을 비롯하여, 미륵경, 법화경, 화엄경, 지장경, 아미타경, 능엄경 등이 포함된다. 어떤 경전 내용의 일부를 예를 들어 보면 '이 경전을 외우거나 지니면 세세생생... (크나큰 복을 받을 것)' 이라고 강조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탈탈 털어봐도 이와 유사한 말씀은 남기신 적이 없다.


석가모니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 없이 보기 위해서는 -니까야 혹은 적어도 아함경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로 믿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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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단락에서 '왜곡' 이라는 표현을 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의 본래의 가르침' 과 다르다.

2,600년이라는 역사를 지나면서 불교는 본래의 가르침을 지나서 비대하고 방대해졌다.

대승 불교는 석가모니 붓다 본래의 가르침에 '가까운' 소승 불교를 비하한다. 선사들의 새로운 가르침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그 모든 경계의 내용들에 대해 붓다의 것이라고 착색하고 있다. 대승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가까운 소승 불교보다 더욱 발전된 불교라고 믿는다.


어떤 종교 종교학자는 '중국 불교는 초기 불교를 아버지로 하고 도교를 어머니로 하는 사생아' 라고 표현했다. 중국 불교는 대승 불교이고 이 불교가 한반도로 전파되어 그 바탕 위에 한국 불교로 자라났다. 결국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은 대승 불교다.


나는 한국 불교, 대승 불교를 믿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교의 영역이다.

누군가가 한국 불교를 믿든, 남묘호렌게쿄(일본 불교의 한 분파)를 믿든, 남방의 불교를 믿든, 개신교든 카톨릭이든(사실 나의 모태신앙이 카톨릭이었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다만 무언가를 믿는다면 그것을 믿는다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믿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어떤 것도 믿지 않고서는 이 삶을 지탱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돈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면 그 또한 믿음이며, 어쩌면 그것은 '돈의 종교' 이거나 '물질 종교' 일지도 모른다. 기존의 종교처럼 체계화된 신앙 체계가 없을 뿐이다.


혹시 이 글을 여기까지 읽고 따라와준 독자님이 있다면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고 스스로를 탐구해보는 여정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로 믿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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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당신에게 아미타불은 어떤 의미일까?

알 수는 없지만 사뭇 궁금해진다.

그것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닐 수도, 깊은 울림을 주는 심연을 꿰뚫는 말일 수도 있다.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부처님은 아미타불 같은 가상의 부처가 아닌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2,600년 전 실존했었고 그 가르침이 나의 명상의 길에 크나큰 울림을 주며 내 삶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전국 방방곡곡의 수많은 사찰들과 인도와 네팔의 4대 성지를 순례했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최대한 가깝게 살아가기로 오래 전 결심했다.


그러나 나는 불교인이 아니다.

종교에 속하기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명상하고 지켜야 할 삶의 지침 - 계율 - 들을 따르며 살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지 않는다.

나무석가모니불을 마음에 새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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