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adSeeker길을 찾는 사람] 2부: 마음의 길을 걷는 연금술사
꽃피는 춘삼월이라지만 아직 개나리가 꽃망울을 터뜨릴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급한 담장의 개나리 가지들이 벌써 노릇노릇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가영에게는 이날이 일요일처럼 느껴졌다. 전날 오후 근무를 마치고, 느지막한 야근을 끝낸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퇴근을 하고, 오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은 대충 우유와 식빵 한 조각으로 때우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역에서 나와 양지바른 길을 걸으며 만나는 개나리의 노란빛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3월 초. 현빈과 헤어진 지도 벌써 석 달, 지나간 한 번의 겨울이 마치 평생의 겨울들을 보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영훈에 비해 현빈은 상대적으로 연락이 드물었다. 가영은 현빈으로부터 전해지는 연락을 참느라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모른다. 수십 번도 더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지만 그를 다시 예전처럼 만나기에는 혼란이 주는 고통이 수백 배 더 크게 느껴졌다. 자주 업데이트 하던 SNS도, 더 이상 아무 의미 없게 느껴져 방치한 지 오래였다.
“왔니?”
다시 돌아온 봄날을 맞아 화단을 정리하던 우향은 작은 발소리만으로도 가영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잘 지내셨어요? 그리 먼 길도 아닌데 자주 못 들러서 죄송해요.”
“아니다. 어서 들어가자.”
가영은 혼자 사는 홀아비의 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깔끔한 실내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여백의 미를 살린 실내는 그의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이는구나.”
가영은 너무 쉽게 들킨 속이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자신을 추스렀다.
“언제나 다 알고 계시는 거예요?”
가영의 말에서 슬그머니 가시가 돋아났다. 하지만 상처 입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 가시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왔다. 우향은 그저 투명했다. 화살을 쏜다 해도 그를 뚫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들이댄 가시 따위에 우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그 존재의 샘이 얼마나 깊은지 그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드넓은 바다에 소금 한줌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다 뒤죽박죽 되어버렸어요. 너무 혼란스러워요...”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마침내 그녀에게서 울음이 터져나왔다. 한동안 마음에 갇혀 답답하게 쌓여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렇게 한참을 쏟아내며 울다 보니 비로소 조금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꿈을 꿨어요. 절 힘들게 하는 꿈이었죠. 나름대로 잘 이해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꿈의 핵심적인 의미는 도저히 풀리지 않아요.”
그녀는 방울의 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향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다시 눈을 뜨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꿈에서 방울은 어떤 아름다운 생각의 체계를 나타내고 있어. 영혼의 짝과 같은 생각들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생각들이긴 하지. 하지만 그건 그저 좋아 보이는 것일 뿐이란다. 그것이 서로의 관계에 양념처럼, 향신료처럼 쓰일 때는 빛을 발하겠지. 하지만 그게 핵심이 되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해.”
“그런 생각들이 그저 허구이고 상상일 뿐이라는 건가요?”
“아니. 소울메이트 관계가 일어나지 않고 의미도 없다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게 관계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미래는 현재로부터 비롯되지만 현재가 미래를 절대적으로 결정하지는 않아. 마찬가지로 과거도 현재를 완전히 지배할 순 없단다.”
가영은 알 수 있게 되었다. 타로 카드가 이별을 예지하는 건 해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꿈에서 본 과거생에 대해 스스로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현빈과의 관계가 악화된 것도 과거의 정보에 너무 큰 가치를 부여했던 거였다. 스스로 생명을 불어넣고서 두려워하며 움츠러든 것이었다. 현빈과 거리를 두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우향은 차분히, 그리고 따뜻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방울은 우리 전통 무속신앙에 따르면 뭔가를 불러오는 데 사용하는 도구란다. 주로 신을 부르지. 요즘 사람들은 뭔가를 끌어오려 애쓰지만 세상의 에너지가 늘 순수하고 밝지만은 않아. 무엇을 끌어들이든 반드시 그에 따르는 대가와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란다.”
가영은 자신이 알 속에 답답하게 갇혀 있다 깨어나는 새끼새처럼 느껴졌다. 우향의 몇 마디 말은 어미새의 부리 같았다. 그녀를 둘러싼 오랜 괴로움의 껍질들이 한꺼번에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비로소 알을 깨고 밝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녀는 어릴 적 읽었던 데미안의 한 구절을 조용히 읊조렸다. 데미안은 아버지가 권해서 읽은 책이기도 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가영은 자신이 깨고 나온 껍질들을, 과거의 세계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믿음들로 가득한, 하지만 미혹함으로 괴로움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버릴 필요는 없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리고 필요에 따라 취하고 또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느꼈다. 아브락사스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녀가 날아가면 되는... 하지만...
가영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에 무겁게 남은 것들을 말끔히 정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가영은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꼭 쥐었다. 아직 풀지 못한 매듭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매듭을 풀지 않고는 완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느꼈다.
"고마워요. 덕분에 많은 것들이 해결됐어요. 하지만..."
가영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아빠......"
그녀의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오랜 세월 묻어두었던 말들 하나하나가, 이슬처럼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 로드시커 2부 : 마음의 길 - 연금술사의 장미
- EP18 : 그녀의 아브락사스
<끝>
EP19 - 2부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만나요.
<작가의 말>
『로드시커』는 욕망, 마음, 영혼—세 가지 길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욕망의 길에서 추락한 주인공은
이제, 마음의 길을 걷고 있지요.
그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까요?
독자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나요?
자신을 돌아보며, 끝까지 함께 걸어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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