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64장] 기안이지 其安易持

명상으로 풀어 쓴 노자도덕경(23) 안정되면 유지하기 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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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장 기안이지 其安易持 - 안정되면 유지하기 쉽고



(상략)

"작위하는 이는 실패하고 집착하는 이는 잃으니, 이 때문에 성인은 하는 일이 없으므로 실패하지 않고 집착하는 일이 없으므로 잃어버리지 않는다.

(중략)

이 때문에 성인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며,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배우지 않으려는 태도를 배우며, 뭇 사람들이 지나치는 바(허물)를 회복시켜 준다.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도와주지만 함부로 작위하지 않는다."



63장에서 무위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무위의 반댓말은 작위이다. 작위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작위作爲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보이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하는 행위'


노자가 말하는 작위는 일반적인 의미보다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애써 의도하고 의지로써 하려 하고 집착하는 모든 행위가 작위이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작위와 모든 집착이 들어간 노력이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 자신을 비롯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노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이 아니다. 우리는 애써 노력하고 집착하며 행위한다. 현실적으로 그런 모든 행위들이 실패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보아서 알고 있다. 다만 원하는 결과를 얻기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높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무위하는 성인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의 마음에는 욕심과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성인도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 진인사 한다. 하지만 결과로부터 자유롭다. 될 일은 되고 안 될 일이라면 안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 대천명.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실패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대로 일어났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석가모니 붓다께서 처음 승가를 확장하실 때에 있었던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붓다께서 처음 성도하신 후 예전의 스승이었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를 영안으로 찾아보셨으나 그들은 죽고 없었다. 그 다음 전법의 대상이 과거 함께 고행하던 콘단야를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수행자들이 초전법륜지인 사르나트에서 제자가 되었다.


그 다음 제자는 부잣집 아들인 젊은이로 자신이 빠져지내던 쾌락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야사였고,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출가 전의 처는 재가신도가 되었다. 또한 야사의 친구들도 50명 이상이 출가를 하고 아라한이 됨으로써 60여 명으로 이루어진 승가의 시작이 되었다.


정작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붓다는 60여 명의 제자를 이끌고 우루웰라의 세나니 마을로 향한다. 그곳에는 그 지역에서 유명한 종교가였던 불을 섬기는 배화교도인 캇사파 3형제가 있었다. 붓다는 신통력까지 사용해가며 (신통력 사용이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라고 전해진다) 제일 큰 형을 교화함으로써 그의 제자 500명이, 그 다음으로 자연스럽게 둘째와 셋째까지 교화되어 나머지 제자들까지 더하면 총 1,000여 명이 붓다의 승단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이는 초기에 승가를 이루는데 크나큰 역할을 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확실히 깨달은 성인인 붓다께서도 아무 목적과 의도 없이 유행(遊行)하며 떠돌아 다닌 것이 아님을 엿볼 수 있다. 붓다께서 처음 깨달으신 후 범천의 설득에 따라 전법의 뜻을 세우지 않았다면 (63장 참고) 그는 알려지지 않은 벽지불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뜻을 세운 이상은 그 목적에 맞게 확실히 나아간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성인의 진인사盡人事 하는 면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80세로 열반하실 때까지 평생 전법에 최선을 다한 역사상 대성인인 붓다에게도 모든 일이 뜻대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의 동족인 석가족이 당신이 생존해 계실 때 멸족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가슴 아프게 지켜보아야만 했을 것이다. 말년에는 사촌이며 제자였던 데바닷따가 여러번 자신을 죽이고 승가를 차지하려는 음모에 시달리며 마음을 챙겨야 했다. 이 또한 성인의 대천명 하는 한 단면일 것이다.


무위는 분명 깨달은 이의 한 특성을 보여주는 단어다. 노자는 무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작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깨달음 혹은 무위 등의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그것이 '어떤 것' 이라는 관념을 취하고 떠올린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라 그것이 관념임을 이해할 틈도 없다.


예컨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라는 말을 들었다 치자. 우리의 거친 마음은 항상 과거 아니면 미래를 오가고,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 때 과거의 기억이나 습관에 연결된 현상을 빛의 속도로(?)( 일으키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래서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는 말이 나온 것이다.


가끔 다음과 같은 주제로 영화 등의 테마가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시대에 예수나 붓다 같은 성인이 다시 나타난다면, 현대인들은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우리는 성인을 어떻게 '판단' 할 것인가? 판단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할까? 믿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성인은 신통력을 마음껏 펼쳐보이며 자신을 드러낼까? 아니면 철저히 자신의 능력과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슈퍼맨에 가까울까? 신통력이 없지만 조용히 가르침을 펼치고 있을까? 아니면 석가모니 붓다께서 생존했던 시대보다도 훨씬 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감각적이고 복잡하고 문명화된 세상이기에 당신의 뜻을 따르고 이해할 제자 없음을 당연시 여기며 벽지불로 사라질까?


무위나 깨달음에 대해 미리 예단하기 보다는 한 가지 가능성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마음으로, 실존으로)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탐진치를 완전히 비우면 해탈이라는, 팔정도를 걸으면 언젠가는 원하지 않아도 해탈에 이른다는 붓다의 확언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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