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서적은 없다 (명상의 본질에 대하여)

#12처 #18계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예전에 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었다.


명상음악은 없다 (1)

https://cafe.naver.com/growingsoul/26076


명상음악은 없다 (2) - 데바 프레말과 오쇼 라즈니쉬에 대하여

https://cafe.naver.com/growingsoul/26133


길지 않은 글이지만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핵심을 요약해보자.

음악은 어째서 명상이 아닌가?

그것은 '감각적' 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어떤 (고요한) 분위기를 낸다고 해도 그것이 '감각적' 이라면 명상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감각적이란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붓다의 가르침에 12처와 18계라는 것이 있다.

우리 존재의 감각기관을 6개로 보아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신체감각(촉각), 의식 - 과 그에 대응하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 형색, 소리, 냄새/향기, 맛, 피부자극, 사건/현상 등 생각의 대상 - 이렇게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12처라고 한다. 하지만 이들 6대 6 각각이 서로 부딪쳐(접촉) 각각의 의식이 발생하는데 이를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 부른다. 이들 6식을 더하면 18계가 되며 이것이 '(전체) 세계'가 된다.



[세존]

걸어서는 결코 세계의 끝에 이르지 못하지만

세계의 소멸에 이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남이 있네.

참으로 세계를 아는 슬기로운 이는 세계의 끝에 이르고

깨끗한 삶을 성취하며 고요함에 이르러 세계의 끝을 알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네.

- 쌍윳따니까야, 이교도의 경 중에서



쉽게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이렇다.

여기 기절해서 의식을 잃은 사람이 쓰러져있다고 치자.

의사가 달려와 그의 눈을 까뒤집어 보면 그의 눈에 뭐가 보이겠는가?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눈이라는 시각적 감각기관이 있고, 그 시각적 대상이 되는 사물이 존재하지만 의식(여기서는 눈의 의식인 안식)이 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때 그에게는 세계가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보통 감각적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감각적 쾌락을 의미한다.

무언가 시각적으로 감각적인 것은 시각적으로 촉발된 쾌락이다.

청각적으로 감각적인 것은 (명상음악은 없다 글의 주제처럼) 청각적으로 촉발된 쾌락이다.

그것이 크든 작든,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쾌락은 쾌락이다.


초기경에 보면 붓다의 말씀 중에 계율에 대한 세세한 설법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중에 음악과 연극 등을 금하는 말씀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불가에서 찬불가를 만들어 부르고 음악회를 하는 등의 행위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들이 될 것이다.


후대에 쓰여진 대승경전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부처님 직접 설법을 담은 초기경인 니까야나 (한역) 아함경의 경우 그 내용은 대부분 직설적이고 단순하며 그러한 내용의 반복이다. 그중에서 12처 18계를 기준으로 한 가르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삼법인>

* 안이비설신의는 무상하다.

- 감각기관이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소멸되므로.

*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 괴로운 경험은 그냥 괴로움이며, 좋았던(쾌락) 것이 사라지면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집착이 생기며 아쉽고 괴롭다.

* 무상하므로 (영구적인) 실체가 없다 (참나가 아니다).


<사성제>

* 무상한 것을 붙들고 집착하고 갈애하면 그것이 계속 형성(行, sankhara)되어 반복되며, 그러므로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 고진제 (괴로움이 있다)

*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 집성제 (무명과 갈애)

* 괴로움을 멸한 상태가 있다.

- 멸성제 (열반과 해탈)

* 괴로움을 멸하는 방법이 있다.

- 도성제 (팔정도)


<계정혜>

* 안이비설신의 감각적 집착과 즐거움을 싫어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라.

* 그러면 마음이 청정해져 삼매가 뜬다.

- 삼매는 닦는 것이기도 하지만 중도(쾌락과 고행의 중간의 기본적인 청정심)를 취할 때 자연스럽게 옵니다.

* 삼매는 반야지혜의 선결조건이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사성제와 계정혜까지 전개되었는데 알고 보면 전혀 복잡하지 않은 내용이지 않은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실천이 어려울 뿐.


글의 본론으로 돌아가서 <책> 이 어째서 명상이 아닌지, 명상서적이라는 개념에 왜 어폐가 존재하는지를 돌아보자.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은 깨달음의 위해요소가 된다.

그런데 이 <안이비설신의> 감각의 대상이 되는 것에 생각을 대상으로 하는 감각인 의근意根이 존재하며 책의 내용은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인간은 지식을 탐구한다. 그리고 그것을 즐긴다. 지식이 늘어나고 쌓아가는 일이 즐겁다. 그렇지 않은가? 반드시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정서적인 면에서도 책을 읽는 행위는 즐거움이다. 소설, 시, 에세이 등 무엇이든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관점도 취할 수 있다. 생의 모든 면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즐거움의 순간들이 있으므로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갈애]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거의 무한히 반복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삶에 저항하고 거부하면서.


노자는 도덕경 63장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설파한 바 있다.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위무위, 사무사, 미무미

무위를 행하고, 일거리를 없애는 것을 일로 삼고, 맛을 없애는 것을 참맛으로 삼는다.



무위란 곧 일거리를 없애는 것이다.

일거리란 무엇인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24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일한다.

의식이 깨어있는 동안 끊임없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생각하는 등 하지 않는가?

잠잘 때조차 꿈을 꾸면서 안구는 부들거리며 진동하고 뇌파가 널뛴다.

사이사이 깊은 잠에 들어서야 잠시 쉴 뿐.


현실이 이러한데 책을 보는 것이 무슨 명상이 될까?

명상서적이라고 해봐야 그와 관련된 지식을 쌓거나 (반대 방향이다) 잠시 잠깐 인스턴트같은 안도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


물론 필자도 오래전 과거에는 다 거쳐온 길이었다.

새로운 (명상이라 여기는) 지식에 때로는 가슴이 뛰었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듯했으며 (이거, 반대의 길이다), 환희로웠다 (감각적인 즐거움이다). 이런 이유로 명상서적이라는 것들을 탐닉했다. 이 책을 읽으면 또 다른 책을 찾아 읽고, 또 다른 책을 찾아서 읽고, 읽고, 읽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소위 말하는 영적이거나 깨달음의 지식이랄까)을 채우기 위해 물(지식)을 찾는데 한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물을 받아 먹듯이. 갈증은 해소되지 않고 반복되었다.


단언하건대 이런 이유는 실수이고 무지 때문이었다.

지금의 나는 전혀 목이 마르지 않다.

깨달음조차도 갈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고 있는데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팔정도를 따르면 깨달음을 서원하든 아니든 깨닫게 될 것이다.

- 붓다


과거의 나처럼 목마름에 빠져있는 이들에게 나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소중한 세월을 낭비하게 하고싶지 않다.

그래서 이 단순한 가르침들을 전한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더 이상 책들(명상서적 따위)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유는 더이상 목이 마르지 않고, 갈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같으면 단박에 읽어내려갔을 법한 책도 읽어지지 않게 된다.

이는 대학생에게 초등학교 교과서를 쥐어주며 읽어보라 하는 것과 같다.

너무 쉽거나 수준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읽지 못하게 된다.


나는 두 종류의 책을 읽는데 하나는 초기경인데 부처님 말씀이 담겨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필요'에 의한 실용서적들이다. 재가자로서 생활을 이어가야 하다보니 아무래도 노후에 대한 대비 또한 손을 놓을 수가 없어서이다.


이 글의 포인트는 책을 읽지말라는 것이 아님을 이해했으면 좋겠다.

다만 명상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했으면 한다.

명상은 탐진치의 <비움>을 통해 청정한 마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한다.

결국 그 끝에는 괴로움의 완전한 종식인 깨달음과 해탈이 있다.

하지만 출가자가 아닌 이상 재가자로서 현실에 대한 책임 또한 존재한다.

이런 생활의 바탕이 되는 것은 또한 <배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움>을 우선으로 하되 <배움>의 묘를 잘 살려서 안팎으로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 明濟 전용석



한흐름 마음비움센터 I 한흐름 기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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