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를 모르는 구구절절한 이야기
도착한 지 삼일 되는 날, 구직과 방 구하기는 장렬하게 실패로 끝나고 관광할 겸 들른 의사당은 안티백신 시위로 입장조차 못했다. 떨떠름하게 돌아오는 길에 숙소를 떠나기 전 주인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구우시던 풍경이 떠올랐다.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 케이크는 어떠셨나요 물으니 할머니가 그러셨다. 아, 그건 내일 교회로 가져갈 음식이란다.
“그럼 크리스천인가요? 저는 가톨릭인데.”
엄밀히 말하면 난 가라신자다. 꼬꼬마 시절 엄마를 따라, 좀 더 큰 뒤엔 친구들이 다 거기 있으니까 매주 성당에 출석했다. 영성체도 받고 전례부 고참도 하고 레지오도 하고. 중학교 입학 후엔 발길을 끊었다. 특별한 계기? 없다. 오래오래 앉아 아름다운 본당 인테리어와 스테인글라스를 관찰하던 게 내 일과였으니까.
정말 웃긴 점은, 급할 때면 누구보다 열심히 성호를 긋는다는 거다. 기복신앙의 나라 사람답게 걸핏하면 소원을 빌고, 아프면 징징대고 무서우면 신을 찾고. 심지어는 화제가 없거나 성실해 보이고 싶을 때도 울궈먹는다. 대체 왜 그러는진 모르겠는데, 스스로가 불량 신자란 자각은 있다.
“그러니? 나는 Anglican Church(성공회교회)에 다녀. 가톨릭과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단다. 내일 너도 갈래?”
아, 생각해 볼게요.
막상 던지고 나니 황금 같은 일요일을 반납하기 싫어 지하실로 향했다. 게워내는 게 차라리 나을 브리또를 우물거리다 보니까 심경의 변화가 찾아왔다. 적당히 성공회를 검색하고, 엄마에게 그곳에 가면 배반 행위일까 떠보다가-당연히 가라고 하셨다. 단호하기는- 다시 올라갔다. 저도 갈게요.
분명히 말하지만 케이크가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와 배고픔과 배고픔 같은 외로움이 일요일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웠다. 그날 저녁, 드디어 나와 시간선이 같아진 미국 친구는 전화기 너머로 웃음을 터뜨렸다. "웁스, 너 대체 왜 독실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고 있어." "나도 모르겠어. 그냥... 하게 돼."
아마 아직도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 그럴지도 모른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린 나머지 타인과의 인연이 절실하다거나. 하지만 굳이 자책하려 들지도 않는다. 예전이었으면 먼저 말을 걸 용기도 없었거니와 환경의 변화를 기꺼워하지 않았으리란 걸 잘 아니까. 그래서 자괴감은 덜 느껴졌다. 다음 날에 있을 새로운 만남으로 두근거렸다면 두근거렸지.
다음 날 아침, 시차와 긴장감으로 밤을 지새우고 끝내 차에 올랐다.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교회 라이딩까지 받다니. 무려 두 개나 되는 커다란 홀케이크를 아슬아슬 들고 도착한 교회는 어렸을 적 영미 도서에서 보던 모습과 똑 닮았었다.
성공회 교회는
대체로 말하자면 성당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복사가 중반부에야 나와 성체 의식을 도왔다는 점, 성모상이 있어야 할 곳에 코빼기도 안 보였다는 점 정도가 그나마 달랐다 하겠다.
미사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사제가 수다쟁이라 졸아도 된다며 할머니가 호언장담하긴 했지만 밤을 새 버려 초반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이탈리아에 왔나 싶을 만큼 수준급의 실력을 자랑하던 성가대가 아니었다면 졸도해버렸을지도.
그리고 어디나 똑같은 종교집회의 특성. 다과시간이 있다. 케이크에다 샌드위치, 고기전병, 스틱 케이크 등 팬데믹 이후 차려진 첫 만찬에 나는 접시를 야무지게 담아 Wallflower(파티에서 겉도는 사람)처럼 쭈그려 있었다. 외롭고 쓸쓸하고 푸짐한 식사를 시작하려던 찰나, 흥미를 보인 사람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손주며느리도 한국인이에요.
묘하게 가까운 나라, 캐나다
밴쿠버가 부산, 토론토가 서울이라면 빅토리아는 제주도랄까. 높은 백인 비율, 그것도 대부분 은퇴한 백인 노인들이 많은 섬 도시. 당연히 폐쇄적일 거라 생각한 곳에도 한국과의 인연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날 굳이 내게 말을 걸어 준 사람들 중 세 명은 손주가 한국에 원어민 교사를 하러 갔다 한국인 아내를 데려 온 케이스. 결혼식을 이유로 서울이나 부산 구경을 했다는 점까지 똑 닮았다.
전체 크기가 남한보다 큰 빅토리아 섬. 인종차별을 걱정하며 온 나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남녀노소 한국에 대한 저마다의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인구는 적고 땅은 넓은 캐나다와 좁은 땅에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우리나라. 두 나라가 어떻게든 이어져 사람들이 인연을 맺는다는 게 시차로 얼떨떨한 내 눈에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곳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고 이들은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지만 그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아, 참고로 그중 한 분은 며느리의 연락처까지 건네고 가셨다.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라나. 바로 그날 살 곳을, 그다음 날엔 일할 곳을 구한 당시에는 말을 건넬 동기도 여력도 없었지만 이 말은 전하고 싶다. 정말 감사드리고 무사 출산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