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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1. 2022

생일에는 캐서린과 쓰레기를


생일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홀로 해외에서 생일을 맞은 날, 나는 당연히 일하러 갔다. 부담주기 싫은 마음에 처음에는 입도 뻥끗 안 했지만 아침부터 가방과 모자에 가격표를 달고 있자니 급기야 그 말이 나온다.


저 오늘 생일이에요.


"정말? 축하해!"

같이 신상품을 체크하던 사장님은 언제나 그랬듯 사람 좋은 미소로 축하를 건넨다. 그러고 다시 일. 지나치게 싱거운 일상에 차라리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쨌거나 지구상에 내가 생일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명 늘었으니 행운이랄까.


한두 시간 후, 정리가 끝난 신상품들의 진열과 재고를 상의하고 있자니 박스의 잔해로 더러워진 바닥이 눈에 걸린다. 밑을 쓱 보던 사장님이 내게 그랬다. E와 함께 쓰레기 좀 버리러 가라고.


공포의 엘리베이터

도대체가 그놈의 헝가리안 스타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쾌활하고 열정 넘치며, 비꼬는 데 있어서 탁월한 유머감각을 가진 동료 E. 생일이란 소식에 고작 30분밖에 안 되는 휴식시간을 틈타 근처 카페에서 음료와 초코바를 사줬다. 이곳에 온 첫날 인수인계를 해준 선배이자 꿈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와우, 이제 우리 가게엔 두 명의 작가가 있어!" 첫날부터 사장님 덕분에 그녀가 작가라는 걸 알았다.


정확히 일주일 차인 나와 삼주 차인 그녀가 맡게 된 첫 청소 임무. 박스가 많아 오직 종이만 재활용하는 이 가게에서는 무게 때문에 늘 사장님 남편 A가 쓰레기를 담당하곤 하는데, 그의 퇴근 후 물품이 배송되었던 것인지 오늘은 우리 몫이 되었다. 문제는 엄청난 쓰레기의 양. 박스 꾸러미가 세 개에 사무실 쓰레기 하나, 그냥 쓰레기봉투 두 개까지. 끙끙대며 쓰레기 더미를 드는 와중에 E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선다. 


"미안, 나 엘리베이터가 무서워"


사연은 이렇다. 어렸을 적 그녀의 생일, 하필이면 엘리베이터에 갇혔다고. 그러니 자기가 반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너는 이걸 타고 오라는 말이다. 다만 문제가 생겼다. 좋게 말하자면 전통과 유서가 있는, 솔직히 말하자면 낡은 건물인지라 열쇠와 비밀번호가 필요한데, 정작 비밀번호는 기억하고 열쇠를 찾지 못한 것. 알고 보니 처음부터 열쇠 구멍은 장식이었지만 아무래도 다른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 중이었나 본지 내가 있던 1층까지 오지 못한 걸 열쇠가 필요하다고 오해했다.

결국 우린 세 번 정도 봉투를 들고 두 개 층을 올랐다. 


170cm가 넘는 분리수거함


두근두근 쓰레기 대작전

이제 우리를 망연자실한 채로 웃음만 나오게 만든 문제의 사건이 터진다. 사진에서도 보이다시피 분리수거함은 우리의 키를 훌쩍 넘는 높이. A야 농구선수처럼 쓰레기째로 던져버리지만 그건 그에게나 가능하고, 대부분은 박스를 하나하나 해체하고 쓰레기통의 종이뭉치를 집어 저 기다란 구멍으로 쑤셔 넣는다. 우리는 바보같이 박스를 제대로 버리고 나서 쓰레기통을 통째로 뒤집어 버리려고 한 것. 키가 안 닿는 나를 대신해 저 방법을 쓴 E는 소리를 질렀다. 헬프 미.


검은 것은 분리수거함, 파란 것은 우리의 쓰레기통, 노란 것은 박스 꾸러미라고 후대 사람들이 이르더라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왼쪽 장면에서 제대로 웃음이 터진 나는 도와줄 사람을 부르러 갔다. 그러고선 길치답게 엉뚱한 문에 몸통 박치기를 시전해 보다 못한 직원이 유리창 건너편으로 손짓을 하며 문 위치를 알려줄 정도였다. 나를 본 E는 우리 쓰레기통을 분리수거함 가장자리에 걸고 나와 길을 나섰다. 이곳의 친화력 대장 그녀, 남의 식당 주방까지 두드리며 정말로 아무나 찾다가 결국 대장급으로 보이는 안내소 직원을 데려 오는데...


바로 그때, 쓰레기 트럭 너머로 청소부 둘이 나타났다! 이제야 살겠다 싶어 마지막 남은 박스 꾸러미를 가느다란 구멍으로 밀어 넣은 찰나, 생각도 못한 일이 터진다. 오른쪽 그림처럼 내가 넣은 꾸러미가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우리의 작은 쓰레기통을 밀쳐버린 것. 분리수거함 테두리를 만지며 우리 쓰레기통을 찾다가 이상함을 느낀 청소부들이 물었다. "혹시 이 안에 있니?" "응... 그런가 봐."


이제 자기 일도 아니겠다, 두 손 놓고 관망하던 E가 심상치 않은 내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너야? 나야. 죄지은 사람 얼굴로 가만히 서 있는데 순식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분리수거함 속으로 직원들이 들어간 것이다.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주신 게 분명하다. 감격한 우리를 향해 웃으며 나오는 둘에게 온갖 찬사를 날리는데, 트럭 건너에서 누가 소리를 지른다. 헤이, 주차를 여기 하면 어떡해! 하하하. 그렇게 감사인사도 어영부영 듣고 떠난 그분들.



끝까지 방심하지 말지어다

빨리 일을 마치려던 계획이 무참히 실패하자 우리는 후다닥 돌아갔다. 아마 한 시간도 넘게 걸렸을 거다. 걱정인지 의심인지 모른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장님과 선임 G를 보자마자 우리는 앞다퉈 이야기를 드렸다. 소녀 시절 인류를 구할 꿈을 안고 아프리카를 모험하신 사장님이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게 그나마 다행. 하지만 나중에 돌아온 사장님의 한 마디, "있잖아, 애들아. 검은 봉투 째로 버리는 거 아니야. 그거 비싸..." 아하.


맙소사, 나 이걸로 글을 써야겠어!

아무튼, 우리의 모험담이 끝나고 E가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제대로 된 글감이 떠올랐을까. 이미 책을 낸 데다가 잡지 연재 등으로 작가 활동 경력이 긴 그녀에게 비빌 수 없지만 나 역시 쓰레기통이 걸렸을 때부터 비슷한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녀가 정한 제목은 '성 캐서린의 생일 쓰레기 대모험.' 그렇다, 그녀와 나의 세례명은 캐서린 또는 카탈린 또는 카타리나. 우연이 겹친 하루의 또 다른 우연이랄까. 마음이 통하는 즐거운 동료가 있어 하루의 작은 고난도 마냥 재밌는 미션처럼 느껴져서 다행이다. 그러니까 역시나 생일을 기념하러 찾아온 바베이도스 꼬마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바람에 가판대가 무너져도 웃으면서 날아간 엽서를 찾아 뛰어다닐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게 세례명이 캐서린인 둘은 한 캐서린의 생일날, 다른 캐서린이 생일날 엘리베이터에 갇힌 여파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해 개고생을 하여 쓰레기통과 버려서는 안 될 봉투까지 던져버리고 두 명의 청소부와 사장에게 폐를 끼치고선 웃어넘겼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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