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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1. 2022

곰팡이와의 사투

내 첫 자취는 한국이 아닌 이곳 빅토리아에서 시작됐지만 실전형 인간인 나는 막상 외국에서도 의외로 건강한 삶을 유지했다. 비싼 가격에다 맛도 없는 외식을 멀리하고 삼시세끼 요리, 게다가 탄단지를 꼬박꼬박 챙겨 먹던 초창기는 지금 봐도 뿌듯할 정도이다. 눈길도 안 주던 노란색 파프리카를 질겅거리며 이제는 어른이 된 건가 마음을 놓은 그때, 자취생의 적 곰팡이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어느 날 식빵에서 곰팡이가 자랐다

점심이나 저녁은 한 번만 겹쳐도 식욕이 사라질 정도로 까탈스러우면서 이상하게 아침은 항상 같은 메뉴를 고집하는 탓에 매일 샌드위치로 하루를 시작했던 나. 어차피 일주일 안에 먹을 거라면 작은 식빵을 사서 실온에 보관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한 과거의 나를 한순간에 얼어붙게 한 첫 주차 곰팡이. 그것도 단 하나 남은 마지막 빵에서 초록빛 얼룩을 발견한 기분이란. 전날 나는 뭘 먹은 걸까. 원효대사의 해골빵?


염습을 하면 닭 썩는 냄새가 난다던데 정말일까요

첫 주 쇼핑에서 나는 닭가슴살을 샀다. 조리된 것이라 냉장 보관하기 쉽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시간이 흘러 흘러 뚜껑을 열었을 때, 몇 주는 안 씻은 사람 몸에서 날 법한 퀴퀴한 냄새가 났다. 끈적끈적이라는 말만이 흐르는 물에 씻어도 살결에 달라붙는 이상한 진액의 촉감을 잘 표현한다고 하겠다. 요리 경험 제로의 가장 큰 문제는 정작 요리할 때가 아니라 상한 음식을 대할 때에 있다. 누가 봐도 음식물쓰레기보다 더한 냄새를 풍기는 고기를 씻고 볶아 토마토 달걀 볶음 닭가슴살 밥을 만들고 나서 혹시 몰라 검색해보니 익은 고기도 냉장보관 시엔 썩는다... 라, 그대로 쓰레기통에 직행했다. 몸에까지 밴 냄새는 한동안 트라우마였다고 한다. 어릴 적 본 일본 영화 <굿바이>에선 염습을 처음 배운 주인공이 아내가 받아온 생닭을 보고 화를 삼키는데, 딱 내 마음이 그랬다.


버섯은 안 썩을 거라고 생각했어?

20분 만에 출근해야 했던 날, 닭고기의 악몽이 다시 찾아왔다. 당장 떠오르는 재료라고는 쯔유와 우동밖에 없는 상황에서 버섯이라도 넣자며 마음을 다잡은 날, 육수를 끓이고 버섯을 씻던 와중 그 미끌미끌한 촉감이 다시 찾아왔다. 하필 냄새가 없어 반신반의하다 결국 그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씻었다는 바보 같은 이야기. 구글이 친절히도 얼룩 반점이 생긴 버섯은 잘못 먹으면 큰일 난다고 해 그대로 작별인사를 고했다. 순간의 재치로 콩나물만 잔뜩 든 우동을 먹은 건 씁쓸한 후일담.


이럴 거면 만들지 말지

어쩔 수 없는 생활이라면 김치를 그리워하지 말자고 다짐한 후, 대용으로 샐러드를 먹어야 했던 나는 오리엔탈 소스를 구할 수 없어 수제 소스를 활용한 샐러드 두 통을 만들었다. 거기다 채소는 냄새나기 전까진 괜찮다던 엄마의 말이 불러온 악몽이 있었으니, 엄마야 쌓인 내공으로 언제 재료를 버리고 살려야 할지 알았지만 요리가 바닥을 기는 수준인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냉장 보관한 샐러드 두 통은 일주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자 먹기 꺼려지고, 이실직고하자면 소스를 만들 때 물엿도 없이 식초를 왕창 뿌려 요상한 냄새가 났던 것도 한몫했던지라 이삼주 째에는 본체만체하고 결국 한 달째에 냉장고를 정리하다 코를 막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아름다운 구름이네요


파스타에서 새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자취생의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파스타. 의외로 쉽다는 말에 홀려 냉큼 면과 소스를 구매했다. 초짜답게 커다란 용량을 구매한 나는 첫 파스타 요리를 망치고 그 맛에 기겁하며 찬장에 소스를 고이 모셔 놓았더랬다. 몰랐지, 병에 든 건 전부 유통기한이 길 줄 알았다. 대청소날 기세 좋게 찬장까지 치우던 나는 병 안에 뭉게뭉게 피어오른 흰 거품 덩어리와 마주친다. 소감은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곰팡이가 이렇게 아름답게 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지나치게 신기하고 지나치게 징그러웠던 이 아이는 나와 서둘러 잘 가요 해버렸다.


지구를 구하자 지갑을 구하자

발랄하게 적었다지만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기후위기라는 말이 심상치 않게 나오는 지금 고민 없이 먹거리를 버려대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에는 돈 아까워 발을 동동 굴렀지만 서너 번 더 반복하니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찾아왔다. 채식이 자신 없다면 지나친 음식물 쓰레기라도 줄이란 충고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공병 반납률이 꽤 높고 휴지조차 아끼는 여기 사람들을 보니 변해야 한다는 다짐도 들었다. 토마토소스 구름의 여파로 그날 모든 제품을 꺼내 보관 방법과 유통기한을 유심히 살펴본 나는 이제 안다. 병조림이라도 뚜껑을 연 후엔 냉장고에 넣어야 하고 고기는 무조건 냉동, 아무리 먹고 싶어도 감당 안 되는 일인가구 이상의 재료는 과감히 내려놓기. 같은 실수를 번복하는 무지몽매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해도 여전히 곰팡이의 습격은 끊임없고 덕분에 재료의 상한 냄새를 묘사할 수 있는 실력도 늘어가지만 그게 바로 워홀이며 자취고, 아주 조금이라도 발전한다는 사실을 아니까 그래도 포기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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