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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러더스 Oct 01. 2022

대체 뭐하는 캐나다

단풍국이라니

한산한 어느 날, 언제나처럼 야간을 마무리하던 우리는 심심한 나머지 스테레오 타입 말하기 놀이를 했다. 우리라고 해봤자 나, E, J였지만. 물론 늘 그렇듯이 내가 무대를 깔아 버리면 E가 신나서 달려든다. J는 신세대 캐나다인답게 정치적으로 번질 수 있는 이야기에 굳이 참여하지 않으니 깍두기 취급. 어쨌거나 E가 표현한 한국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열심히 일하고 목적적이며 웃어른에 대해 존경심이 강한 사람들, 남자는 모두 똑같은 헤어컷을 하고 여자는 비슷비슷한 검은 핸드백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엔 핵폭탄이 없다...라니. 이 헝가리-캐내디언 친구의 말빨은 참으로 현란하다. 입에 시동이 걸린 그녀가 헝가리의 나태함과 캐나다의 남 눈치 보는 성격을 마구 건드릴 때, 나는 J에게 그랬다. 우리 입장에서 캐나다는 단풍, 흑곰, 그리고 평소엔 평온하다가도 아이스 하키만 지면 분노하는 사람들로 잘 알려져 있지. 그리고 J의 대답, "그건 편견도 아니고 상징을 나열한 수준이잖아!" 어, 그러게. 생각해보면 이 애매한 나라의 정체성은 뭘까.


홀리데이는 어디?

곧 반년을 채워가는 워홀러로서 단도직입적으로 이곳은 '월 200으론 택도 없는 나라'다. 국내 물가와 관련해 심각성을 느끼며 살았고, 이웃나라 일본조차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여기 오자마자 자국의 부정적인 인상이 와장창 깨졌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분명히 최저시급이 15.2달러인 BC주, 뼈빠지게 일해 2주급 135만원을 손에 넣으면 25만원 이상이 세금으로 빠져나간다. CPP(퇴직연금-대체 왜 워홀러에게 걷어갈까 싶지만), EI(실업급여), Tax(소득세)처럼 세분화된 제도가 한국과 매우 닮았다. 그렇다면 210만원 정도를 손에 쥔 후엔 어떻게 되느냐, 80만원은 월세로, 8.5만원은 버스비로, 5만원은 휴대폰 요금으로 나간다. 아무리 허리를 졸라매도 매주 장을 보기 위해 10만원, 아~주 가끔 외식을 나가면 음식값과 세금 및 팁 기본 2만 5천원 이상. 한 달만 살아보면 왜 워홀러들이 전부 호주로 갔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외식물가 비싼 건 똑같아도 집세부터 액수가 다르다. 어쩐지 최근 몇 년 동안 캐나다 워홀을 만류하는 목소리가 왜 커지나 했다. 쨌든 꾸역꾸역 아끼고 아껴서 매달 이삼십만원씩 저축하던 내게 든 근본적인 물음, 다른 워홀러들은 어떻게 여행을 다닌 걸까. 매달마다 있는 법정공휴일 휴가비가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내 홀리데이, 돌려줘요.


열한 계단

6위 캐나다, 17위 한국. 사회 진보 지수(Social Progress Index)의 차이이다. 비정상 회담의 여파 덕분인지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알려지고 있는 캐나다. 내가 E를 리버럴이라 착각했을 만큼 개인 권리와 사회 보장, 소수자에 대한 태도가 한국에서만 나고 자란 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특히 신기했던 건 6월 한달 내내 Pride month라고 하여 성소수자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달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나 여기서 만난 열명 중 세 명이 채식주의자였던 것과 술-담배-대마의 인식이 비슷하다는 점. 심지어는 대마초 가게가 일반 담배가게처럼 있고, 반대로 술 파는 가게가 또 따로 존재해 일반 식료품점에서 절대 술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그간 쌓아온 상식이 무너진 느낌이었다. 게다가 무조건 휠체어, 유모차, 보행기 착용자를 우선시하는 버스 시스템과 어떻게든 여자와 학생에게 기회를 주려는 사장님, 간단한 화제에도 백인들의 이기심을 지적하는 백인 J까지. 이제는 내가 말실수를 내뱉는 입장이 되어 조마조마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고리타분하게 여길 법한 이들의 행동양식에 이렇다 할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현실적으로 내가 수혜자이기도 했고.

참고로 올해 SPI지수는 미국이 24위였다. 이쯤 되면 한국이 생각보다 높다고 느끼는 독자들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의 정보접근 지수가 세계 1위였기 때문. 의료보장, 위생, 기본교육, 개인권, 개인자유는 19위, 26위, 26위, 25위, 30위였다. 편식이란.


가장 좋은 건

그럼에도 막상 미국과 구분되는 캐나다만의 특징을 찾으려 하면 애매할 때가 있다. 사실상 진보적인 분위기는 캘리포니아만 가도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물가야 둘 다 높고, 심지어는 대륙이자 섬인 두 나라답게 각국 동부-서부의 거리감보다 남-북인 타국도시를 더 가깝게 느낀다. 전 세계에 꿋꿋이 반하는 그들만의 단위를 사용하는 문화 또한 같다.

다만 이들만의 자긍심이 있다 하겠다. 우리끼리 가게에서 하는 농담 하나, 미국인과 캐나다인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고객이 카드를 던지는지 혹은 카드를 건네주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자유분방한 미국인보다 자국민이 배려심 깊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말이다. 솔직하게는 실제로도 그랬지만, 하하.

소위 '쫄아서' 도착했던 첫달과 다르게 마음이 점점 편해지는 나날이다. 워홀러로 살기 빡빡하다고 투정도 부렸지만 가끔은 배고픔을 내주고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이제는 신경질적인 사람을 만나면 놀랄 정도인데, 심지어는 정확히 오 분 뒤 다른 사람이 문을 잡아주는 등 사소한 배려를 받는 이곳이다. 이렇게 지내다 멘탈이 약해져서 돌아가면 어떻게 적응하냐는 생각도 든다. 사람으로 상처받을 일보다 사람에게 치유받을 일이 더 많은 곳, 그게 내가 정의한 캐나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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