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직장동료 E가 안티 백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그녀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작은 관찰기를 브런치에 게재했었다. 어디서든 이들을 향한 시선은 껄끄럽기에 비무장지대에 들어온 것처럼 읽어주길 바란다며 글을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한 달 차의 기록과 반년을 채워가는 지금이 다르듯이 사람을 보는 시선 또한 변화하는 법이다. 정정한다. 그녀는 Liberal(진보진영)이 아니라 우파에 가깝고, 그중에서도 음모론을 신봉한다.
사건의 발단
지금이야 매주 토요일마다 의사당 앞에서 벌어지는 안티백신 시위가 일상이지만, 첫 주엔 겁을 먹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시안인 내게 불똥이 튈까 걱정되어서였다. 게다가 바디페인팅을 칠하거나 점프 슈트라든지 치렁치렁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전부 국기와 주 깃발을 몸에 큼지막하게 걸치고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극우주의자들처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의 생일, 팀 홀튼에서 첫 인종차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중국인 Y와 서 있는데 마스크를 쓴 한 아주머니가 손을 저으며 가까이 오지 말라 한 것. 당황하고 화가 난 내가 다음날 동료들에게 말하는데 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인종차별일 수도 있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아 그런 걸 수도 있다고. 찝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내게 E가 그 사람을 욕하면서 국면은 새로운 지점으로 접어들었다.
한국에서 외국 안티 백서를 보는 시선은 극우, 트럼프 지지, 저학력 등과 엮인다. 그러니 내 기준에서 진보적인 E가 안티 백서라는 고백을 하면 깜짝 놀랄 수밖에. 그때의 충격으로 주도면밀히 관찰한 그녀의 입체적인 면모는 다음과 같았다.
안티 백서는 모두 같은 얼굴을 할까
밖에서 우리를 볼 때와 같이, 우리는 외국을 한 집단으로 뭉쳐 판단한다. 내가 여기서 북쪽 아니면 남쪽으로 분류되거나 영화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에 관한 질문을 받는 거처럼 검은 디스플레이 너머 북미 안티 백서를 보는 우리의 시선은 일정한 모습이다 : 트럼프 지지자, 반지성 주의자, 극우주의자, 자유를 신봉하는 Morons(멍청이들), 광신도. 그러나 E를 관찰하면서 느낀다. 이들을 한 범주에 묶을 수 없다는 것을.
당시 나의 눈에 E는 이런 모습이었다. 첫인상은 자유롭고 젊게 사는 사람. 20대 후반-30대 중반의 친구가 많고 술과 마약, 퀴어 등 다양성에 대해 개방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관습을 기피한다. 반면, 굉장히 독실했다. 전혀 독실한 신자처럼 보이지 않는 그녀를 따라 참가한 성서모임은 국내 모임에 버금갈 정도로 진지하고 신실했다. 한편으론 나의 어떤 의견이든 저지한 적이 없었으니 인맥 넓은 그녀가 소개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대체 진짜 E는 누구인지 궁금한 적이 많았다. 얼핏 봐도 예술가적인 기질이 느껴지는 사람과 가벼운 농담으로 가득한 근처의 카페 직원, 누구보다 가정적인 친구와 매주 시위에 참석하며 holy로 시작하는 욕을 싫어하는 사람들 한가운데 자리한 E.
게다가 정통 언론을 미워했다. 당시 반지성주의로 보이진 않았다는 내 의견은 철회하겠다. 이후 들어온 J가 그녀를 음모론자라고 칭할 만큼 기존 언론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E 안에 있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이곳에서 극우 커뮤니티를 즐겨하는 집단의 주장을 종종 인용한다고 해야 할까. 겉으론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지내다 보면 언뜻 보이는 법이다. 분명히 가장 친한 동료인데도 거리감을 느꼈던 것은 그 이유에서였을 거다.
그러나 인간은 함부로 정의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밝힌 데다가, 동유럽 출신인 자신은 전혀 그런 주장이 이상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반지성주의와 빈곤층의 극우화가 실타래처럼 엉켜가는 미국의 단면과는 아예 딴판인 사람'이라고 했던 내 표현은 취소한다. 정치에 대한 불신, WEF(세계 경제 포럼)의 음모와 빌 게이츠에 대한 증오, 가상화폐나 금처럼 '자기만 안다고 믿는 투자정보'에 누구보다 관심을 보이던 그녀였기 때문에.
내가 대신 적은 변명
그때는 내게 누구보다 친절한, 그리고 떠나기 전까지도 친절했던 E를 이해하고 싶어서 그녀의 입장에서 이유를 찾았었다. 실제로도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나라처럼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거시적 차원인 가치관을 이유로 백신에 반대하기도 했고.
민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인 우리와 달리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의 자유를 누리고 사는 이곳에선 마스크와 백신에 대한 반감이 클 수밖에 없다. 당장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를 먼저 발표한 나라들 목록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E는 대유행 기간 내내 마스크 착용 한 번 접종 한 번 없이 오미크론을 걸리고 나아버린 사람이다. 부스터 샷을 맞은 지 한 달 만에 코로나에 걸려 사흘 내내 앓아누웠다는 내 얘기를 듣고 비타민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자랑스러워했던 그녀가 떠오른다.
정치적 측면에선 캐나다인들의 자부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미국에 비해 사람들의 배려가 깊고 복지가 잘 되어 있으며, 다양성이 존중된다고 여기는 이곳 사람들이 미국 건강보험 제도에 얽힌 어른의 사정을 모를 리 없다. 그간 고발된 제약업계의 로비나 코로나 초기 백신회사가 얻었던 면책권은 안티 백서들의 강력한 근거가 될 터. 다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점 하나, 미국 건강보험의 어두운 이면은 근거로 가져다 쓰면서 왜 자국의 제도는 그렇게 증오하는지.
어쨌거나 E를 이해하고자 했던 내 나름의 방식은 가장 진보적일 나이인 대학생 J의 등장으로 흐지부지된다. 나와 같이 있을 때는 온갖 잡다한 지식까지 자랑하던 그녀가 J와 함께일 땐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만 나누던 모습도 의심을 샀고, 어느 날 같이 점심식사를 끝낸 J의 입에서 '음모론자'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기시감의 원인을 해결했다고 해야 하나. 게다가 우리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수준의 PC(정치적 올바름)를 지지하는 J이기에 그만큼 E의 보수적 측면이 부각되었기도 하다.
사실은 가장 하고 싶은 말
여기까지 적어놓고 마무리하기엔 친구를 공격하고 발을 빼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 간략히 덧붙이는 나의 입장. 결국 바이러스가 토착화됨에 따라 지속적인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권고에는 탈력감을 느끼는 소시민이지만 나는 백신의 필요성에 동의한다. 특히 대립이 첨예하던 20-21년에는 선택권이 없었기도 하고. 주류 과학계가 거짓말을 한다는 반지성주의의 입장엔 보다 더 강력하게 반대한다. 내 기억 속 관련 학자들은 항상 코로나에 대비한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통계에 대한 해석이 갈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도 무시하고 그들의 노력을 비난하고 싶지도 않고.
어쨌거나 현 상황에 대한 내 해석은 '죽어도'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자유와 국민에 대한 보호가 중요 원칙인 국가 의무의 충돌이다. 굳이 이 말로 논쟁을 끝맺는 이유는 조금 다른 말을 하고 싶어서.
왜 나는 E의 정치적 입장을 완전히 정반대로 생각했을까. 물론 그녀와 나의 친분 탓에 인종차별주의자로 상정되는 극우가 절대 아닐 거란 착각도 있었겠지만 자유로움, 개방적 성격, 채식주의자, 퀴어 프렌들리, 복지제도 지지 등 한국인으로서 진보진영의 입장이라고 당연시하는 데다가 대놓고 지지하기도 눈치가 보이는 의견에 동의해서일 것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여기서 알게 모르게 질타받는 젊은 보수 음모론자조차 한국에선 진보주의자로 몰린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시위를 봤을 때 양가감정이 들었다. 이게 가장 큰 갈등이라면 차라리 부럽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