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하신 아빠 덕에 예뻐서 예쁜 게 아니라 예쁘다니 예쁜 줄 알던 확신의 유년기를 보냈다. 10살 겨울, 첫 영성체를 하고 친구들과 찍은 문제의 그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예쁜 드레스에 하얀 미사보를 쓴 세명의 아이들 중 나는 아무리 뜯어봐도 예쁘지 않았다. 친구들이 나보다 더 예쁘다는 사실을 의심하기 시작한 첫 순간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언제나 나를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했던 아빠에게 그 사진을 내밀었다.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아빠,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얘가 더 예쁜 거 같아.”
“아니야~ 우리 사리가 제일 예뻐!”
의심과 불안이 사라진 후에 찾아오는 믿음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빛나는 확신이 되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정사리
그렇게 10대, 그 격변의 시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4학년 첫날, 줄 맞춰 이동하던 중 담임 선생님이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고 잘 보이고자 예쁘게 웃어 보였다. “정사리 줄 똑바로 서!” 예쁜 나를 보고 웃어 주시는 게 아니라 혼내시는 선생님은 당황 그 자체였고 불만을 가득 담아 똑바로 섰다고 퉁명스레 대답을 했다. 그 결과로 돌아온 건 반 친구들 앞에서 말대꾸한다는 호된 꾸지람과 밀려오는 창피함이었다. 그 후로 선생님의 지적이 쌓이고, 예쁘다는 인정을 받지 못하자 생긴 학교 가기 싫어 병은 나보다 잘난 거는 키 큰 거밖에 없는 여자아이가 임시반장에 뽑히는 순간 절정에 달했다. 도대체! 왜! 선생님은 내가 아닌 그 아이를 임시반장으로 뽑았는지 오만가지 이유를 따져봤지만 아빠에게 인증받은 세상에서 제일 예쁜 11살의 소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4학년 담임 선생님한테 특별히 예쁨을 받은 기억은 없다. 그리고 내 학창 시절에서 가장 매운맛은 단연코 초등학교 4학년이다. 그렇게 딸바보 아빠에게 11년간 제대로 당한 가스라이팅은 4학년 선생님에 의해서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딸바보, 아들바보 부모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점점 낮아지면서 귀한 자식의 증가와 함께 비례적으로 늘어났다. 어찌 보면 예전부터 존재했지만 일종의 트렌드에 편승하듯 너도 나도 딸바보, 아들바보임을 자랑스레 드러내고, 선행 학습하는 것처럼 경쟁적으로 그 역할에 빠져든 건 아닌가 싶다. 물론 세상 모든 아이는 다 소중하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예쁘지만 요즘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모습은 조금 다른 의미로 각별한 것 같다.
만약 30년 전이 아니라 현재, 2023년 대한민국에서 학기 첫날 담임 선생님한테 저런 지적을 받았다면 그냥 넘어가는 부모도 있겠지만 당신이 뭔데 우리 아이에게 상처를 주냐고 따지는 부모도 존재함은 몇 달 전부터 불거지는 학부모 민원 사례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지금 대한민국에 아이의 저런 행동을 꾸짖을 수 있는 용감한 교사가 얼마나 있을지부터 따져보고 싶다.
학생 인권 조례, 전교조, 체벌, 금쪽이, 교권침해, 학부모 민원 등 대한민국 교육 현실 관련해서 최근 들어 뉴스에 자주 나오는 말들이다. 너도 나도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책임 소재를 밝히기도 하고, 앞 다투어 자극적인 학부모를 고발하듯 뉴스를 하기도 한다. 금쪽이라는 말을 탄생시킨 오은영 박사를 마녀 사냥하기도 하고 이제는 권위를 찾을 때라고 체벌을 다시 하라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온다. 한동안 삼삼오오 모이면 뉴스를 장식하며 문제가 되었던 학교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누구의 책임인지, 인과관계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게 아니다. 나는 우리 아이를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기르는지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부모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내 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소중하면 그만큼 다른 아이 역시 그런 존재임은 당연한 거다. 예쁘고 소중해서가 아니라 당위적인 행동을 해야 존중받음을 알려줘야 한다. 그리고 부모가 가르치지 못했다면 교사의 권한으로 아이를 지도할 수 있게끔 해야 함이 합당하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본 교대 재학생의 자퇴 비율이 높아지고 있고, 교대의 입학 지원 커트라인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성적이 교사의 자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 입장 또한 대변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우리가 자녀를 학교에 보내면서 기대하는 교사를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난 이왕이면 좋은 성적을 받고 높은 경쟁률을 뚫은 교사가 우리 아이의 선생님이 되길 원한다. 학식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교사가 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생각해 봐도 아이가 그들에게 배울 점은 충분히 많다고 생각한다. 과연 지금처럼 무너지는 교권에서 우리의 아이에게 양질의 교육을 기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당신은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이제 우리는 여러모로 무조건적인 아들바보, 딸바보가 과연 내 아이를 제대로 기르는 방법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방적으로 교사의 방침을 전부 따를 수는 없지만 내 아이만 특별히 봐주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부모는 되지 말아야겠다. 그 한 명을 돌봐주기 위해 소외되는 20여 명의 아이들 중에 내 아이가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나 역사 네가 최고라는 불필요한 가스라이팅을 부모의 사랑이라는 핑계로 내 아이에게 저지르고 있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