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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 Dec 07. 2023

네, 똑같은 거 낳았습니다

그렇지만 다르게 기르겠습니다

"쾅!!" "덜컹덜컹"

"쾅!" "덜컹"

졌다.

문을 닫는 속도도, 창문을 흔드는 문 닫힘의 세기도 동생에게 지고 말았다. 모든 싸움이 그랬듯 서로를 상처 주는 개싸움 중에 동생의 가시 돋친 말이 너무 아프다. 내가 준 상처에 돌아온 언니가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에 '말이야 방귀야'하고 넘어갈 수 있는 쿨한 여자 아니다. 결국 눈물이 터진 나를 째려보더니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린다. 나도 질세라 ‘쾅!’ 닫는다.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는데 조용히 방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오셨다.

"엄마 어떻게 저렇게 말할 수 있어? 진짜로 저렇게 생각한데? 너무한 거 아냐? 진짜 나 죽으면 쟨 좋데? 그리고 내가 울고 싶어서 우는 거 아니란 말이야. 그냥 눈물이 난다고!!"

속상함의 토로에 돌아오는 엄마의 토닥이는 손길과 "우리 사리가 착해서 그래. 큰 애가 마음이 넓고 좀 더 참는 거야. 엄마도 그랬어." 엄마도 그랬다니 속상함이 조금 가신다. 오늘도 난 그렇게 위로를 가장한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착한 아이로 사는 건 나름 괜찮았다. 아니 사실 좋았다. 주위 어른들의 착하다는 칭찬은 무형의 트로피가 되었고 착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은 인간관계에서 내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 옛날, 동네에서 뭔가를 한다는 분들이 새마을 운동 완장을 차듯이 착한 아이 훈장을 달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왜 자꾸 불편해지지? 나도 먹고 싶었던 간식을 나눠 주고 난 후 돌아오는 감사와 칭찬과는 별개로 더 먹고 싶고 괜히 나눠 줬다는 생각을 하고는 ‘착한 아이는 이러면 안 되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양보를 한 후 ‘괜찮다.’는 정중한 거절은 민망함과 동시에 억울함을 가져왔다. 어떨 때는 거절한 상대에 대한 거부감까지 생긴다. 내가 노력한 착한 행동들이 ‘착한 척하고 있네~’로 치부됐을 때 드는 억울함을 따라오는 부끄러움은 무언가를 들켰을 때 느끼는 그것이었다.

‘나는 정말 착한 아이일까? 내가 착한 척을 하는 걸까? 너네가 나쁜 거야!’

뭔가 불편함과 억울함이 쌓여가면서 착한 아이 가면이 깨지고 나면 본래의 내 모습이 나온다.

‘욱하는 아이‘


그렇다. 나는 어릴 때부터 뭔가 마음에 안 들면 선빵 날리듯이 선'욱!'을 하는 아이였다. 아빠의 그것과 닮아서 일 수도 있고, 내 성질을 못 이겨서 일수도 있고, 그래야 주위에서 달려와 도움을 줘서 일 수도 있다. 뭐가 됐든지 간에 난 주위를 불편하게 하는 욱하는 아이였다. 내 욱에 동생들이 많이 기죽어 지냈음은 자명한 일이다. 어쩌면 이만큼이라도 인간이 된 거는 나와 내 동생들을 잘 길러보고자 욱하는 딸에게 건 엄마의 착한 큰 애 주문 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주문을 뚫고 나오는 저주가 있었으니,

너랑 똑같은 거 낳아봐라

이 말이 언제, 어떤 상황에 들은 말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엄마와 동생들과 이야기하며 깔깔 웃었던 기억은 있다. 그러나 저주는 저주인지 정말 나랑 똑같은 욱하는 놈이 나와버렸다. 나를 닮게 태어난 건지, 내 모습을 닮아가는 건지, 아니 둘 다겠지. 어찌 되었든 나도 욱하는 아이의 엄마가 되어 버렸다.

요리 봐도 조리 봐도 나랑 똑같은 걸 낳아버렸다. 근데 시댁에서는 자꾸 신랑 똑같데...

고등학교 시절,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해 친구들과 활발한 토론을 했던 기억이 있다. 분명 아래의 내용들을 포함한 좀 더 깊이 있는 수업을 들은 후 의견을 나누었겠지만 맹자와 순자의 사상이 나온 시대적, 사회적인 배경이나 그것들이 담고 있는 본질적인 의미, 추구하는 이념 등 두 어르신의 깊은 뜻과는 상관없이 선과 악에 치우쳐서 주장을 펼쳤다.


성선설 [性善說]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맹자(孟子)가 주장한 중국철학의 전통적 주제인 성론(性論).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는 학설이다. 성론을 인간의 본질로서의 인성(人性)에 대하여 사회적·도덕적인 품성이나 의학적·성리학적인 성향을 선악(善惡)·지우(知愚)라는 추상적인 기준에 따라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현실의 사람을 언제나 이념적인 모습으로 파악하게 된다.


성악설 [性惡說]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순자는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고 나섰으나 그 목적은 맹자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수양을 권하여 도덕적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순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에 바탕을 두었다. 성악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감성적(感性的)인 욕망에 주목하고, 그것을 방임해 두면 사회적인 혼란이 일어나기 때문에 악이라는 것이며, 따라서 수양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것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가르침이나 예의에 의하여 후천적으로 쌓아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사람이 악하게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 정도인 거 보면 사람은 착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내 주위 모든 사람들 중에 착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물론 흉악범도 있고 전쟁이나 내전이 있는 나라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에 힘써야 한다'라는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했다. 내가 착하다며 아묻따 성선설을 주장한 거 보면 이것 또한 착한 아이 가스라이팅이 싹 틔운 작은 곁가지는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쓰며 만약 이 토의를 그 혈기 왕성한 고등학생이 아닌, K육아를 하고 있는 육아 동지들과 했다면 과연 나는 성선설을 추앙하며 맹모삼천지교를 통해 맹자에게 가장 영향을 주었던 맹모를 제일 존경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란 생각도 해본다. 이 또한 수박 겉핥기식의 아주 지극히 즉흥적인 생각이고, 학문에 대한 깊이는 모래사장에 발가락 들어갈 정도임을 알아주시길 바란다.


오늘도 하루가 멀다 하고 욱하는 엄마와 욱하는 아이의 대전은 활발하게 진행되지만 다행히 아이에겐 쌈박질할 동생도 없을뿐더러 착한 아이 소리에 질린 까닭에 의식적으로 아이에게 '우리 착한 대순이'라는 소리는 안 하고 있다. 물론 내 아이는 착하다. 하지만 굳이 착한 아이 부채를 심어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착하다는 건 너무 주관적인지라 엄마가 나에게 10을 말했지만 내가 100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내 아이에게 온전하게 10을 전달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아이의 본성을 단정 짓기보다는 그놈의 본성을 잘 다스리는 법을 나부터 실천하며 아이와 헤쳐나가는 중이다. 화와는 다른 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며 같이 넘어지고, 같이 일어나면서 덜 욱하며 살아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우리가 착한 사람인지, 착하지 않은 사람인지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성선설, 성악설 뭐가 중한데.

우리 욱을 다스리기로 해요.


그러니 아들, 엄마 닮아서 소리 지른다는 말 이제 그만할래? 요즘 엄마 소리 안 지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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