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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 Nov 14. 2023

여전히 신랑을 많이 사랑하나 보다

어쩌면 더...

나만 아는 신랑의 비밀이 있다. 40년을 넘게 살면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걸 나에게만 해준 이야기다. 우리 신랑은 공대 출신의 공무원이다. 안정적이고 일찍 퇴근하는 게 좋아서 대학교 3학년 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남들 취준생일 때 골프를 배우며 프로를 꿈꾸었다. 신랑이 만든 계정의 아이디만 봐도 얼마나 골프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게 신랑의 비밀이냐고? 아니다.


신혼 그 어느 날 신랑이 하고 싶은 게 많다는 이야기를 하며 골프 이야기를 꺼내다 꿈을 이야기한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날 때마다 스토리와 주인공을 생각하고 기록에 남겨두고 있다고 혼자만 꾸던 꿈을 나에게 공유해줬다. 함께 시간을 보낸 근 2년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습을 못 봐서 상상도 못 했다. 공대생 공무원 신랑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석적인 대답을 했던 거 같다. 꿈이 멋지다. 근데 왜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는지, 꾸준히 쓰다 보면 언젠가 작가가 되어 있을 거다. 한번 해보자. 등등... 신랑은 부모님께 말하기는 창피했고, 꾸준히 쓰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글을 쓰는 법도 잘 모른다고 다.


그 후로 가끔씩 생각하는 스토리나 주인공에 대해서 물어보면 활기차게 신나서 대답하는 신랑이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신랑의 삶은 변한 게 없어 보인다. 일하고 야근하고 여유시간에는 나랑 놀고 티브이보고 핸드폰하고 그러면서 책도 보고 싶고 글도 쓰고 싶다고 말한다. 많이 조급하고 아쉬워 보인다. 하고 싶으면 해 버리는 내 성격과 모든 게 신중하고 생각이 많은 신랑의 성격은 많이 달라서 답답함이 앞선다. 그렇게 하고 싶은 거면 핸드폰, 티브이 보지 말고 하라는 말에 머리도 쉬어줘야 한다는 대답은 핑계같이 느껴진다.


임신을 하고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 같아서 듣고 싶은 글쓰기 강좌를 찾아보라고 하고 100만 원 이상을 들여서 등록을 해주었다. 그리고 주말마다 늦잠을 마다하고 수업을 나갔다. 학원을 땡땡이치고 골프 치러 간 적도 있었지만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굳이 태교에 안 좋은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의 글쓰기 과정을 나름 충실하게 듣고 심화 과정을 권유했지만 일단 혼자서 좀 해보겠단다. 하지만 변한 거는 없었다. 글쓰기도 연습을 해야한다고 하면서 쓰는 꼴을 못 봤다. 아이의 출산과 함께 더 바쁜 삶을 살게 되었고 신랑은 더 시간이 없다고 했다.

여전히 매번 자기가 너무 이룬 게 없다는 말을 하며 답답해하고 아쉬워한다. 무엇을 이루고 싶냐는 질문에 골프를 이야기한다. 그때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기면서 치라는 대답 말고는 해 줄 말이 없다. 그렇게 글쓰기에 대한 꿈은 포기한 줄 알았다.


그러던 중 브런치라는 것을 알게 되고 줌 수업을 듣게 되고 브런치 지원을 하면서 글을 쓰게 되었다. 신랑이 아닌 내가. 처음 내 이야기를 듣고 응원하고 지원해 주던 신랑이 있어서 더 즐겁게 시작했다. 그리고 신랑에게 자극제가 된 건지 신랑도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고 컴퓨터를 켜고 뭔가를 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아이 책 읽을 때 같이 좀 읽으라고 해도 안 읽던 책을 읽으니 뭔가 또 뿌듯하다. 그런데 최근 신랑이 이상하다. 아니 다시 돌이켜 보면 신랑은 한 달간 시들어 갔다. 점점 우울하고 날이 선 모습이 보이고 더 피곤해한다.

오늘도 야근하고 온 신랑의 표정은 안 좋다. 결국 왜 그리 표정이 안 좋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바빠서 그렇다. 뭔가 나를 위한 일을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휴직하고 싶다.

"내가 글 쓴다고 한 다음부터 그런 거지?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기도 써봐..."

신랑은 부정도 긍정도 아닌 긍정을 하고 아들 옆에 들어가서 잠이 들었다.


그냥 요 며칠 신랑을 보면서 많이 속상하고 걱정되고 답답하다.

시든 신랑을 보는데 눈물이 난다.

내가 많이 사랑해.



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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