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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Apr 16. 2020

삶의 '공백기'라고 느껴질 법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열정만수르'가 되는 방법만이 공백기를 전환점으로 바꾸는 건 아닙니다.

유노윤호, 좋아하세요?

저도 정말 좋아합니다.


    작은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훤칠한 키와 열정 넘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사르르 번져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해로운 해충은 "대충"'이라거나, '어차피 죽어서는 늘 잠을 자니, 매일 잠은 4시간만 잔다'는 식의 기운 넘치는 유노윤호의 멘트를 들으면 “열정만수르”라는 별명은 누가 지었는지, 참 잘 지었다, 생각하게 됩니다.


유노윤호의 열정만수르 짤 중 아마 가장 유명한 짤이 아닐까 합니다.


    월요일만 되면 젊은이들은 "나는 유노윤호다"를 외치며 출근합니다. "나는 유노윤호다"라는 슬로건으로 광고까지 섭렵한 것을 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유노윤호의 열정 컨셉은 꽤 인기가 있는듯 합니다. 그렇다면 유노윤호의 '열정만수르' 컨셉이 인기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 "열정 만수르"는 우리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매 순간을 "열정 만수르"처럼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동경의 마음을 가지고 유노윤호를 바라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좌) 한동안 유행했던 "나는 유노윤호다" 트위터 / 우) '나는 유노윤호다'를 통해 광고까지 섭렵한 유노윤호!


    우리 사회에는 성과를 통하여 그 사람의 전 인생을 평가하는 문화가 만연합니다. 물론 단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많은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주 “성취”나 “업적”을 통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하고,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따라서 매 순간을 알차게, 그리고 열심히 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자기계발서는 “힐링”이나 “위로”가 트렌드인 지금도, 꾸준히 잘 팔려나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힐링 혹은 괜찮아를 외쳐도, 사회는 냉혹하고, 평가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때문에 '유노윤호'처럼, 열정을 다해 자신을 개발하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롤모델이 되고, 개개인의 내면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기준이 됩니다. 자연스럽게 매 순간을 열정을 다해 자신을 계발하며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가지게 되죠.      





    앞선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저 역시 학부에서 대학원으로 쉼없이 달려왔고, 매 학기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바삐 살아왔습니다. 졸업 후 갈 곳 없는 불안한 제가 택했던 1번 선택지는 “열심히 사는 것”이었습니다. 주 3회정도, 1시간-2시간 정도만 수업을 하고 있던 터라, 적은 돈을 벌던 때였으나 버는 돈은 족족 “자기계발”에 투자했습니다. 영어, 피아노, 수영, 요가, 독서, 강연, 그리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온라인 강의까지. 불안할 틈을 느낄 새 없이 삶을 꽉 채워두었고, 사람들도 열심히 만났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사회의 기준에 따라 “성취”로 저 자신을 규정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당장에 저를 규정할 성취가 없어지는 순간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문득 '내가 그렇게 까지 살아야하는지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왜 그렇게 모두가 사는 대로 살아야 하는지"는 말해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무수히 읽던 자기계발서도 더는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자기 계발서는 성취를 이룰 동기를 부여하고, 방법을 안내하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는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요, 왜 그렇게까지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인가요? 왜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데서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걸까요. 왜 우리는 성취감을 낄 때에야 그 얄팍한 안정을 느끼는지, 그런 성취를 하지 못하면 루저가 되는 느낌을 갖는지 좀처럼 알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왜 삶에 공백을 두면 안 되는지. 왜 쉬어가는 건 허락이 되지 않는건지. 말입니다.


    마음이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메일 때, 저는 <나의 서른에게>라는 영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이 영화는 제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을 정확하게 공유하고 있었죠.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는 아주 독립적이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사장님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사원이었고, 오래 사귄 남자친구도 있었기 때문에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죠. 그러나 갑작스럽게 회사를 그만두게 되고,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심지어 살 곳까지 잃게 됩니다. 그녀는 '그제서야' 자기가 누군지에 대하여 사유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과거에 대하여 말합니다. 일을 열심히 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칭찬했고, 그녀 역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았죠. 그러나 삶에 일이 없어지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정리하고 나니, 그제서야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일에 “의존”했고, 남자친구를 “의존”했으며,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는 잠을 “의존”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녀는 모두가 박수치는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단 한번도 독립적이었던 적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에 의지하여, 그 기준에 도달한 자신의 모습 속에서 안정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했던 것이죠.




    

    긴 공백기를 보내며 제가 배운 것도 이것입니다. 잠이 들면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렵고, 눈을 뜨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던 시절. 저는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글은 탁월한 사람이나 쓰는거야”라고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사실 저는 글이 쓰고 싶었습니다. 공백기가 찾아오고, 그제서야 잘 해내지 못할 두려움 때문에 제가 진정 하고싶었던 것을 억눌러 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용기내어 예술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고, 감사하게도 글을 시작한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예술 관련 글을 다루는 다른 사이트에서도 글을 기고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작은 변화이지만, 앞으로 글을 통해 더 다양한 일을 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겠죠.)


스스로를 더 알아갈 때, 우리가 '공백기'라고 느꼈던 시기는 비로소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공백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드는 날들이 계속 되기도 했지만, 이 시기를 지날 때에야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삶의 공백기를 마주할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말 의지할만한 것이었는지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스스로를 더 알아갈 때, 우리가 '공백기'라고 느꼈던 시기는 비로소 하나의 '전환점'이 될 수 있습니다.



    공백기는 너무 열심히 사느라 놓쳤던 풍경을 바라보고, 그 안에 숨겨진 보화들을 마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당신이 ‘비어있는 시기’라고 생각했던 시기는 실은 텅 비어있던 지난 날들을 발견하는 시간이자, 더욱이 찬란한 미래로 자신을 채워주는 때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조바심내지 말고, 미래가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 시기를 의미있게 즐기는 방법들을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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