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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Jul 09. 2020

예술이 가치 절하되는 사회에서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건

각박한 사회를 살아내면서 여전히 예술가로 남고자 한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아티스트로 살아가기 Artist Survival》


세화 미술관, 2020.02.19-2020.07.31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68 흥국생명빌딩 3층 세화미술관 제1, 2 전시실.   

참여 작가: (김)범준, 고사리, 김보현, 김예술, 류성실, 박지혜, 업체eobchae, 유소영, 이의성, 임가영, 최은혜, 홍민키



    유치원에 다닐 땐 장래희망란에 “화가”라고 쓰곤 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저 역시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죠. 그러나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니, 그림은 타고나게 잘 그리는 애들이나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리는 일로부터도 멀어졌죠. 교복을 입고, 진로를 결정할 즈음엔 “화가가 되고 싶다”는 친구들에게 “뭐 먹고살래?”,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니?”라는 질문이 늘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찍이 그리는 일을 포기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했죠.  



    우리 사회에서 작가란 여전히 “밥 벌어먹기도 힘든 직업”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극소수의 스타 예술가들은 천문학적 단위의 돈을 호가하는 작품을 생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작가가 되기란 하늘의 별따기에 가깝죠.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있고, 그들은 ‘밥벌이’도 되지 않는 작업을 하기 위하여 작품 창작과 밥벌이를 병행합니다. 그러나 예술창작이라는 지난한 노동은 우리 사회에서 정규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견디다 못해 중도 포기를 선언하거나, 밥벌이만 남은 삶을 살아가는 작가들도 참 많습니다. 가끔은 생 자체를 포기하기도 하는 아티스트들이 있기도 하고요.




             세화미술관은 반짝이는 재능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 세상을 마음껏 누비지 못한 젊은 작가들을 위한 기회를 마련하고자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아직 대중들에게 익숙지 않은 젊은 작가들의 작업이 세상과 대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물론 이들의 작업이 아직은 충분히 영글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들이 ‘성공한 작가’가 되기까지의 긴 여정에 귀한 한 걸음이 되어줄 것입니다.   


세화미술관, 《아티스트로 살아가기》, 2020.02.19-2020.07.31.


    이 글에서는 필자의 마음을 울린 세 가지 작업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함께 보고 싶은 작업은 이의성 작가의 작업입니다. 이의성 작가는 주로 예술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 이면에 숨은 “노동”을 다루며, 사회의 보편적인 ‘노동’의 범주에 ‘예술 창작’이 포섭되지 못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 염려를 표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업은 <원심분리 포장지>입니다. 작업은 ‘포장지’에 주목합니다. 포장지는 그 자체로 중요하진 않습니다. 포장지가 사물을 감싸고 보호할 때만 그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하는 순간에만 잠시 유용할 뿐입니다. 포장지 그 자체로는 환영받을 만한 사물이 되긴 어렵죠. 따라서 포장지는 잠시 잠깐의 역할을 다한 이후에는 가차 없이 버려지기 마련입니다.


이의성, <원심분리포장지>, 가변크기, 2019.


    작가는 작품이 전시장에 도착하자마자, 작품을 감싸던 포장지가 구겨지고 버려지는 상황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리고 포장지가 곧 예술 노동과 닮아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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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하나의 위대한 작업이 세상과 마주 하기 까지, 작가는 지난한 노동의 시간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람자들은 그저 작품에만 감탄할 뿐입니다. 관객들에게 ‘노동’이란 그저 보이지 않는 존재일 뿐입니다. 작가는 버려진 포장지의 이미지 패턴으로 다시 포장지를 만들어, 기존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포장지를 생산합니다. <원심분리포장지> 앞에 선 관람자들은 곧 제거되고 눈 앞에서 사라질 ‘포장지’ 대신, 가시화되고 그 자체로 주목의 대상이 된 ‘포장지’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하나의 노동으로서 예술 창작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게 되죠.  




       다음으로 소개하고 싶은 작가는 (김)범준 작가입니다. 범준 작가의 작업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와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작가를 개인적으론 알 수 없지만 작가의 숨길 수 없는 재치와 개그 야심은 그의 작업에도 그대로 녹아있는 듯합니다. 지난 2011년 첫 개인전에서는 예술을 하는 작가 자신이 친척들의 기대만큼 장남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이에 대한 부담을 작품으로 해소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예술하기>라는 작가의 작업은 현대미술이 낯선 부모님과 친척들을 부모님 댁 거실로 초대하여 난해한 현대미술 작업을 소개하는 행사를 여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낸 작업입니다. 2017년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거실에 작은 이불 하나를 펼쳐두고 아버지와 씨름을 하거나 아버지 등에 올라다는 등, <아버지와 친해지기>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죠.  


(김)범준,   <아버지와 친해지기 위한 방법 5>, 단채널 비디오,  6분 40초. 2017.


    이번 전시에서는 <완벽한 그림>이라는 영상 작업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의 지난 영상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미술관에 ‘걸맞은’ 점잖은 영상 예술 작업은 아닙니다. <완벽한 그림>을 주말 저녁 치킨을 뜯으며 볼법한 예능 프로그램들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 서 있는 이곳이 우리 집 거실인지, 미술관인지 잠시 혼동이 옵니다. 화려한 자막과 영상 효과 덕분에, 이 작품은 현대 미술 작품이 수반하는 '의미를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나 '난해할 것 같은 경계심' 없이도 즐길 수 있습니다. 문득 상업적이고 키치적인 느낌 가득한 이 영상이 미술관 한복판에서 재생되고 있다는 사실이 괜찮은 건가,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김)범준, <완벽한 그림>, 단채널 비디오, 13분 58초, 2019.


    작가는 “아들이 작가인데 그림 한 점 없다”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에 따라, 어머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어머니의 고향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한 겨울 두꺼운 패딩을 입고 두 손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고향의 풍경을 담아내기 시작하죠. 작가가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동시대 예술 작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어머니 고향에서 산수화 (‘전통’의 대표라 할 수 있죠.)를 그리고 있는 행위는 어딘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김)범준, <완벽한 그림>, 단채널 비디오, 13분 58초, 2019.


    작가는 평범한 가정의 ‘장남’인 동시에 동시대의 미학을 창출하는 ‘현대미술 작가’이기도 합니다. 작가는 전통적 정체성인 한국의 ‘장남’이라는 정체성을 거부하기보다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수행하고, 그 기록을 하나의 동시대 예술 작품으로 생산합니다. 물론 그에게선 사회가 정해둔 모범적 장난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예술을 하기로 선택한 순간 “모범 장남 루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의 세련된 영상 안에는 그를 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존재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가만히 묻어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느낌을 풍기는 작가의 파란만장한 도전을 가능하도록 그를 지탱해 온 힘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고사리 작가<이립의 자세>에 대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고사리 작가의 작품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한눈에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작품은 아니죠. <이립의 자세>는 그저 그 자리에 머물며 조용히 무언가를 발화하는 듯 보입니다. 작품 앞을 쉬이 떠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작품이 덤덤히 전하는 메시지가 저의 마음을 꽉 붙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사리, <버려지는 일기>, 사진/ 가변크기. 2009.


   이전 작업에서 작가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물건들을 수집하고, 그것들을 보여주는 형식의 작업을 했습니다. 작가가 개인의 물건을 작업의 대상으로 수집하기 시작한 이유는 개개인의 물건, 곧 한 젊은이의 일상이 소비한 흔적이 한 세대와 동떨어져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전 작업들을 보고 있으면 작가는 이 젊은 세대를 가만히 어루만지는 힘을 가진 것 같기도 합니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작가가 이 세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이들을 향한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인상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이립의 자세>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에게 따듯한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는 듯합니다.     


    이립이라는 의미는 ‘저 스스로 선다’입니다. 작가는 서른이 되던 해 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서른이 된 작가가 서른에 걸맞은 사회적 요구를 느끼고, “이립의 자세”를 슬슬 취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립의 자세>는 작가가 서른이 되던 2011년부터 2020년까지 1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고사리, <이립의 자세>, 가변크기, 2011-2020.


    작업의 제목은 <이립의 자세>이나 작업이 보여주는 막대들은 결코 “이립”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막대들의 그림자를 보면, 막대들은 바로 서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 막대들은 꺾여 있기도, 굽혀 있기도 합니다.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한 순간마저도 한 없이 휘청이고 구부러진 채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막대기를 통하여 보여줍니다. 젊은이들이란 언제나 이립의 요구를 받고 또 이립 하고자 하는 의지도 갖지만, 여전히 온전히 서지 못하는 철없고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고사리, <이립의 자세>, 2011-2020.



    어린 시절 필자는 서른 살이 되면 독립해서 차도 있고, 집도 있고, 단단한 커리어도 있는 멋진 여성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보니, 매일이 더 불안하고 아득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그리고 그놈의 "스스로 선다"는 게 참 허황된 요구였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립의 자세>는 필자의 마음을 만지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작업은 수도 없이 넘어졌던 지난날들이 역설적으로 "이립"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고, 그 자체로 "이립"이었다고 말해주며 관람자들의 마음에 따뜻한 위로의 숨을 불어넣는 듯합니다.






  전시장에는 세 작가를 포함하여 열두 명의 젊은 작가들이 나름의 관점에서 예술과 노동, 그리고 우리 사회와 젊은 예술가로 사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예술이 가치 절하되는 사회 속에서 앞날이 창창한 이 젊은이들이 굳이 힘겨운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의 고민과 웃음을 담은 이야기 앞을 서성이다 보면 치열하고 합리적인 현대 사회에서 다소 느리고, 유용성으로 좀처럼 환산되지 않는 가치들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무용함을 삶의 주제로 삼아 다른 이들의 삶을 한 뼘 더 확장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이 여전히 우리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전시는 7월 말까지 진행이 됩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 거리를 두고 전시를 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사진 참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41118213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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