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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Aug 24. 2020

판데믹의 한가운데서 예술의 길을 묻다.

현대미술을 지배해왔던 예술에서의 '개념'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봅니다. 

⟪작업: 판데믹의 한가운데서 예술의 길을 묻다.⟫

 2020.07.07-2020.09.20. 서울대학교 미술관



    코로나 이후 우리 생각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서구 역사 속 오랫동안 아웃 오브 안중이었던 신체에 대하여 재조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과 사의 길목에 놓인 수많은 이들의 소식을 접하며 삶이란 신체의 생명으로 영위되고, 죽음은 이 몸에 생명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삶이란 단지 이성이나 정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체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서울대 미술관은 변화하는 사유 체계 속에서, 예술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가 '이성' 혹은 '정신'을 중요시 여기고, '신체'는 터부시 해왔던 관습이 질문을 던지듯, 이번 전시는 개념과 정신, 태도를 하나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현대 미술의 ‘머릿속 예술’에 대하여 의문을 표합니다. 예술가 신체의 노동이 필연적인 ‘작업’과 '머릿속 예술'의 경계를 묻고, 시간이 흐를수록 경시되기 시작하였던 '작업'적인 노동의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죠.





    많은 분들이 현대미술은 난해하다고 말하곤 합니다. 고전 명화나 중세 종교화까진 어떻게 좀 참아보겠는데, 현대미술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전시장에 의자를 덩그러니 놓아두고, 그럴싸한 설명들을 한 뒤 이를 세상을 뒤바꾼 예술이라고 칭하니,  뭐 그럴 만도 합니다.  


    현대미술에서는 작가가 직접 만들지도 않은 작품이 수억 원 가격에 팔리기도 합니다. 작가의 아이디어가 중요하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이 '아이디어' 즉 '개념' 은 현대미술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여기서 ‘개념’이란 잘 채색된 그림이나, 섬세하게 다듬어진 조각이 아니라 ‘아이디어’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인정하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념미술은 1967년 솔 르윗이 [개념미술에 대한 단평]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쓰게 된 용어이며, 해럴드 제만이 기획한 1969년 기획전 ⟪당신의 머릿속에 거하라: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전시를 기점으로 20세기 후반 미술사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전시 전경.



    ‘아이디어’가 곧 미술이라는 말을 들으니 최근 접한 재미난 일화가 하나 떠오릅니다. 지난해 12월 열린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비싸고 유명한 바나나가 등장했습니다. 유명한 동시대 미술가로 이름이 알려진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이 바나나에 <코미디언 Comedian>이라는 이름을 붙여 출품을 했죠. 바나나 한 송이도 하니고, 그저 바나나 하나였습니다. 포장 테이프로 벽에 붙여진 세 가지 바나나 에디션 중 두 개는 우리 돈 1억 4천만 원에, 다른 하나는 1억 8천만 원에 팔렸습니다. 당시 이 바나나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줄이 설치되었고, 보안 요원이 배치되기도 하였습니다. 집 근처 매장에서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이 바나나를 보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Maurizio Cattelan, <Comedian>, at Art Basel Miami.


    그러던 중 행위예술가인 데이비드 다투나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바나나를 먹어치웠습니다. 1억이 넘는 바나나를 먹어버리다니요. 다투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멱살이 잡혔을까요? 고소를 당했을까요? 



    이 작업을 소유하고 있는 갤러리 페로탕의 디렉터는 오히려 바나나 자체보다는 작품의 ‘개념’이 중요할 뿐이니, 로컬 마켓에서 새 바나나를 구매하여 다시 설치하는 간단한 방식을 취하였습니다. 요즘 작품의 소유권을 갖는다는 것은 더 이상 ‘바나나’라는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작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작가의 아이디어, 즉 발상을 증명하는 문서를 사는 것을 의미할 뿐이죠. 요즘 시대에 미술에서 ‘개념’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히 보여주는 재미난 사건이었습니다.   



<코미디언>을 먹어치우는 데이비드 다투나의 모습.






    서울대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작업⟫ 전시에서는 예술이 ‘개념’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역사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주로 현대 미술의 역사는 예술의 외연을 확장시킨 역사라고 일컬어지나, 전시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이 전시에서는 예술의 역사란 조형은 유희로, 신체적 경험은 머릿속 계산으로, 그리고 형태와 색채는 태도로 쪼그라들고 홀쭉해진 역사라고 규정합니다. 전시는 그 역사에 질문을 던지며 시작합니다.

 

⟪작업 ART WORK⟫의 포스터



     코로나 19 사태를 겪으며 사람들은 삶과 죽음이 결국 ‘신체적인’ 사건임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이 추앙을 받던 서구의 뿌리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19라는 전 세계적 전염병은 삶과 신체에 대한 사유를 증폭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기획자들은 코로나 19로 인하여 삶에 대한 개념에 변화가 찾아왔듯, 예술에서도 가치 절하되어 왔던, 신체의 예술활동, 창작의 노동과정 자체를 재조명합니다.  


    전시는 크게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저항' 파트에서는 기존 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저항'의 작가들을, '역류' 파트에서는 시대와 유행을 거슬러 자신만의 예술적 행보를 묵묵히 걸어왔던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독' 파트에서는 이들이 당대의 흐름에 편입되기 위한 작업을 하기보다는, 스스로의 철학을 가지고 외로이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들을 주목합니다.  




기존 담론에의 저항, 그 치열한 몸짓 - 구본주


    구본주 작가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작업을 했던 작가입니다.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소시민들의 애환을 희화화한 작업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지금 우리 시대의 노동자, 월급쟁이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구본주, <위기의식>, 2000.


    납작해진 남성의 모습은 어딘가 쓸쓸하고 슬퍼 보이는 우리 세대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합니다. 온 힘을 다하여 가정을 먹여 살리고자 하는 아버지를 '영웅적'으로 표현하기보다 매우 남루하게 표현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아마 작가가 이런 표현 방식을 택한 이유는 이 작품을 통하여 힘든 시기를 살아내는 '영웅적 개인'보다, '소시민들을 짓누르고 무력하게 만드는 시대적 분위기'를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작가는 작품을 마주한 관람자들이 소시민들을 납작하게 찍어 누르는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구본주, <별이 되다>, 2003.


   구본주 작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성을 작업의 주된 모티프로 삼곤 했습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자본주의 속에서 점차 쇠약해지고 소외되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주어진 단위 시간 안에 최대한의 노동 생산력을 끌어올려야 하는 압박은 점차 심해지지만, 동시에 노동 조건은 점차 불안해지는 척박한 사회를 비루한 회사원들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구본주, <눈칫밥 삼십 년>, 1999.


     구본주 작가는 1980년대 농민이 주를 이루던 민중의 개념이, 1990년에 이르러 '샐러리맨'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시대의 남성 노동자들에 대한 작품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러나 2020년이 된 지금, 민중이란 단지 '아버지'라는 가장만 의미하진 않을 것입니다. 작가의 작품에 묻어 있는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네요. 요즘의 민중 개념이란 퇴근 없는 육아, 그리고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가사 노동을 감당하는 '가정 주부'와, 직장과 가정에서 모두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워킹맘'들, 혹은 아무리 '꼰대' 상사의 비위를 맞춰가며 밤낮없이 일을 해도 집세 내기도 빠듯한 '젊은 노동자들' 등 다양한 층위의 사람들까지 확장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 앞에만 서면 여전히 보잘것없어 보이는 개개인의 소시민들을 사랑했던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과 손길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합니다.





역류, 신체적 작업이 가치 절하되는 시대를 거스르기 - 이진우


   전시장을 거닐다 보면, 평면 작업인지 입체 작업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추상화 작업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한눈에 '한국의 단색 화구나' 알 수 있는 이진우의 작가의 작업들입니다. 


    '이진우 작가와 관련하여는 한 가지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국의 단색화 거장인 박서보 작가가 파리에 잠시 들렀을 당시, 호텔에서 한국 작가의 그림임을 단숨에 알 수 있는 추상화를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박서보 작가는 이 작품에 크게 감동하고, 수소문 끝에 작품의 작가를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 작가가 바로 이진우 작가였죠.  

이진우, < 19-AC-29>  캔버스에 한지와 혼합재료, 279x420cm, 2019.

  

   이진우 작가의 작품은 일반적인 서양 모노크롬 회화와는 좀 다릅니다. 흔히들 모노크롬 하면 마크 로스코를 떠올리는데, 이진우 작가의 작품은 로스코의 작품에서 느끼기 어려운 역동성과 힘이 있습니다. 이진우 작가는 순수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미술 재료학을 공부하였는데 아마 그의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원인이 이것이 아닐까 합니다. 작가는 회화가 보여주는 표면보다도, 회화를 구성하는 보다 근본적인 재료에 집중하여 그 재료의 입체적인 느낌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살려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그 물성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중노동을 감내하며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거대한 힘의 원천은 아마 작가의 노동에 있을 것입니다.



이진우, < 17C-026> , 캔버스에 한지와 혼합재료,  2017.


      작업 과정은 한결같습니다. 작가는 하나의 작업을 위하여 숯이 놓인 한지를 쇠 솔로 두드립니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숯을 깔고 한지를 붙인 다음 쇠 브러시로 문지르거나 두들기는 과정을 반복하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합니다. 신체를 직접 활용하는 노동 과정 그 자체가 하나의 작업이 됩니다. 작가는 적게는 한지를 10번 정도 덮거나 갈고, 많은 때는 서른 번까지도 이 작업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를 만났던 한 기자는 그의 인상을 ‘막노동꾼’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진우 작가는 고되고 높은 노동강도를 견디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의 작품이 서구세계에서 인정받기 용이하다는 ‘동양적 정신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흔히들 말하는 ‘한국적인 것’ 특성까지 갖추고 있는 단색화라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시각의 영역은 비대화되고 ‘촉각’은 축소되고 있는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그의 땀과 노동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류’이자,  ‘인간’의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나타내는 수단이 된다는 점일 것입니다.




 존엄을 위하여 싸울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고독 - 김승영


    김승영 작가의 <Where are you>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김승영 작가는 조각, 사진, 영상, 설치 등 장르를 아우르는 다양한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입니다. 초창기에는 자연을 소재로 명상이나 관조의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을 주로 하였다면, 요즘은 의사소통의 부재를 문제 삼고 보편적인 소통 가능성을 창조하고자 하는 작업들을 주로 합니다. 김승영 작가의 작업은 어딘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전시 팸플릿을 보면 눈물을 훔치는 것 같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본떠 만든 “슬픔”이 그의 대표작으로 꼽혔습니다만, 저의 시선을 오롯이 붙들었던 작업은 <Where are you>였습니다. 


김승영,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혼합재료, 2016.

  

  작품 한 구석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 네온사인은 “Are you free from yourself” 너 자신에게서 자유로운가 묻습니다. 네온사인은 도시적 삶과 향락, 특유의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기호이나, 아이러니하게 이 네온 글귀는 철창에 갇혀 있습니다.  


김승영,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혼합재료, 2016.

   

      작품 아래에는 제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무수히 많은 나침반들이 있습니다. 한 가지 방향을 가리켜야 하는 나침반이 각기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니요. 작품 아래에 놓인 고장 난 나침반들은 사실상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길이 결코 한 방향으로 수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은유하는 듯합니다. 모두가 추앙하는 한 가지 갈래의 길로 갈 때가 아니라 아무도 걷지 않았던, 그래서 내가 걷는 순간 길이 나기 시작하는 삶을 살 때 되려 우리는 자유로운 삶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코로나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지금 이 시기, 서울대학교 미술관이 준비한 <작업> 전시는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유명한 작가들의 대표작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기회입니다. 더불어 팬더믹 이후 변화한 사유가 예술에 끼치는 영향에 대하여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은 전시죠. 


    그러나 전시를 보는 내내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과연 팬더믹의 한가운데서 찾은 예술의 길은 개념 이전의 시대, 즉 신체와 신체의 노동이 주를 이루는 현대 '이전’의 미술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필자 개인적으로는 ‘뉴 노멀 New Normal’에 걸맞은 ‘새로운 대안 New Answer’, 즉 새로운 해답을 제시할 것을 기대하고 전시장을 향했는데, 저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요. 전시는 '변화된 지금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 혹은 이전의 것이 가지던 가치를 재조명해보자'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전시를 감상하는 내내 좋은 작품에 대한 감탄도 있었으나, 실망스러운 마음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기도 했죠. 


    판데믹의 한가운데서 찾은 예술의 길은 ‘판데믹 이후'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아직, 그 누구도 감히 예측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또다시 문화예술시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만나자는 멘트들이 어딘가 가슴 아프게 들립니다. 서울대학교 미술관도 다시금 휴관에 들어갔습니다. 점심시간 짬을 내 작품들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 가는 오후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명부를 기록하는 것이 새로운 일상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간헐적으로만 문화 예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새 일상이 될까 걱정도 됩니다. 

    

     글에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지하 1층, 그리고 1층 전시장에 위치한 권훈칠 작가의 풍경화는 잠시 세상의 어지러움을 잊을 만큼 평온하고 경이로웠습니다. ⟪작업⟫ 전에도 글에서 미처 다 소개하지 못한 좋은 작업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은데, 편안하게 작품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다시금 일상이 제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밉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지치지 않고 같이 이 시간들을 견뎠으면 좋겠습니다. 더 밝은 날, 얼굴을 마주하고 자유롭게 예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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