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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Sep 01. 2020

 런던 광장 한가운데 등장한 괴이한 조각의 정체.

존재하나 보이지 않던 이들, 아름답지만 아름답다 할 수 없었던 그들.

MARC QUINN, 

<ALISON LAPPER PREGNANT>, 2005.



    여행이 많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 날 유럽여행 비행기에 올라탔던 날들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당시(가 언제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엔 대학생이라면 한번쯤은 유럽여행을 가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었죠.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행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부쩍 지나간 여행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드는 때이긴 합니다. 



    오늘은 런던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히는 트라팔가 광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십여 년 전 트라팔가 광장 네 번째 좌대에 세워져 있던 작품에 대한 이야기죠. 트레팔가 광장은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을 기념하여 만든 곳입니다. 트레 팔 가르 해전은 살 라미르 해전, 칼레 해전,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산도 대첩과 더불어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는 유명한 해전입니다. 현재는 런던을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이 꼭 들려야 할 필수 코스이자, 수많은 런던 시민들의 안식처입니다. 


해질 무렵 트레 팔 가르 광장의 전경.


    '트라팔가 광장' 하면 많은 이들이 넬슨 제독의 기념비를 떠오릅니다. 광장 한가운데 50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넬슨 제독 기념비는 네 마리의 큰 사자에 의하여 호위를 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영국이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겠죠. 넬슨 제독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해군 제독이었습니다. 그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을 구하고 전사하였죠. 현재 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영웅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 장군이나 광개토 대왕 같은 국가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간에 우뚝 솟아 있는 조각이 바로 넬슨 제독의 모습입니다.


    기념비의 아랫부분에는 트라팔가 해전의 주요 장면을 묘사한 청동 부조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는 공간이니, 용맹하게 전쟁에 임했던 병사들의 모습이 빠질 수 없겠죠. 광장의 귀퉁이 곳곳에 역시 당대 전쟁 영웅들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곳을 '대영제국' 정체성으로서의 런던을 만날 수 있는 곳이자, 여전한 제국의 중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2005년 이리도 엄숙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표현하는 트라팔가 광장 한가운데, 한 여성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여성이 아니라, 장애인이자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기이한 여성이 말입니다. 광장의 네 귀퉁이 중 한 귀퉁이에는 현대 미술 작품을 설치하는 넷째 좌대(Fourth Plinth) 프로젝트의 심사 위원회에서 마크 퀸(Marc Quinn)의 <임신한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 Pregnant)>를 설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마크 퀸 Marc Quinn,  <임신한 앨리슨 래퍼 Alison Lapper Pregnant> 트라팔가 광장, 2005-2007.


 

    작품을 조각한 마크 퀸은 자신의 피를 4.5L를 직접 뽑아서 자신의 두상을 형상화 한 작품 <셀프 Self>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그의 작품은 단순한 현대 조각을 넘어, 현대미술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는 영국을 대표하는 젊은 화가들은 yBa(young British artists)의 멤버이기도 합니다. 


Marc Quinn, <Self 1991>, 1991.



    마크 퀸은 당시 무명 화가였던 앨리슨 래퍼에게서 영감을 받아, 그녀의 모습을 조각하기 시작합니다. 흰색 대리석으로 만든 이 작품의 높이는 3 m55㎝, 무게는 13t에 달할 정도로 거대한 작품입니다. 작품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 2년이 넘도록 런던 트래펄가 광장의 넷째 좌대에 전시되었습니다. 작품에 대하여는 많은 의견들이 오고 갔습니다.


    브리티시미술저널의 편집장 리본 사이면은 이 프로젝트가 "영구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행"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하였고, 미술평론가 데이비드 리는 "소름 끼친다"라고 촌평하기도 했습니다. 일각에서는 경악스럽기 그지없다며 감히 대영제국의 위엄을 나타내는 광장에 이따위 작품이 자리 잡은 것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마크 퀸 Marc Quinn,  <임신한 앨리슨 래퍼 Alison Lapper Pregnant> 트라팔가 광장, 2005-2007.


    그러나 당시의 런던 시장 리빙스턴은 이 작품을 무척 좋다 한다며, 이 작품이 "아름다움과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도전하는 대담하고 현대적이며 복잡한 작업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더불어 그는 이 작품이 '기념비적 동상'에 대한 선입견에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공공장소에서 예술의 가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고, 토론을 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특유의 매력을 듬뿍 담아낸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에 대하여는 세 가지 측면에서 함께 이야기해볼 만합니다. 


    첫 번째는 전쟁 영웅들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광장 한 복판에 감히 여성이, 그것도 임신한 (눈요기거리가 될 만큼 글래머러스하지 않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정상적 신체의 범주를 벗어난) 몸으로 떡하니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지금의 영국이 있게 한 공신에는 영국의 전쟁 영웅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의 영국을 살아내는 일반 시민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하여 다시금 기억케 합니다. 더불어 그의 작품은 넬슨 제독과 그의 병사들 이후 이 광장에 어떤 역사를 새길 것인가의 문제를 재고하게 합니다. 지금도 트레팔가 광장에는 영국의 역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이 광장이 '누구를 기리는', '누구를 위한'역사적 장소가 되게 할 것인가를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습니다.



(좌) 2012년 패럴림픽 오프닝에 등장한 <임신한 앨리슨 래퍼>, (우) 그림을 그리는 앨리슨 래퍼의 모습.



    두 번째는 사회에서 비 가시화된 장애인의 모습을 전 세계인들이 모이는 광장의 한가운데 노출했다는 점입니다. 광화문 광장에 있는 이순신이나 세종대왕 동상을 떠올려봅시다. 국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동상들이 모여있는 그 공간에 장애가 있는 신체를 조각한 작품을 병치시킨다고 생각해봅시다. 익숙하게만 다가오는 아이디어는 아닐 것입니다. 


    제가 대한민국에서 자랐기 때문일까요.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사회가 좀처럼 가시화하려 하지 않는 존재를 런던의 '얼굴'이 될 수 있는 관광 명소에 설치 한 런던의 결정 자체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비 가시화하기 급급한 존재를 나타내는 작품을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이는 장소에 설치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재고하게 하는 동시에 비정상의 범주로 분류되는 존재들 대한 새로운 사유를 불러일으킵니다. 



엘리슨 래퍼와 그녀의 아들. 



    마지막으로는 앨리슨 래퍼의 신체는 '기존의 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하얗고 부드럽게 조각이 된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마치 밀로의 비너스나 고대 그리스의 소녀상을 떠오르게 합니다.  매끄럽게 연마된 표면,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곡선과, 고전 조각을 연상시키는 하얀 색감은 서양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적 아름다움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조각된 여성은, 글래러스 하지도, 젊고 건강한 아가씨고 아닌,  임신한 장애 여성입니다. 작품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이질감에 우리의 생각 깊이 자리 잡은 가치체계에는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름 '진보적'이라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생각했던 사람들 마저도 내면 깊은 곳에 사회가 주입한 가치에서 자유롭지 않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게 이 작품의 기능이자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카프카가 말했듯, 기존 가치 체계를 뒤흔들고,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며 우리의 사유의 외연을 확장하도록 돕는 도끼와 같은 역할 말입니다.


 



    앨리슨 리퍼의 동상은 2012년 패럴림픽 오프닝과 2013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세계인들의 미술축제인 베니스 비엔날레에도 등장합니다. 이 정도면 그녀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으려나요.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당시 엘리슨 리퍼


    태어났을 당시 그녀는 의사와 간호사는 물론 어머니에게 까지도 '괴물'이었기 때문에 생후 6주 만에 버림을 받고 장애인 보호시설로 옮겨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밝고 쾌활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어둡고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는 이때에, 앨리슨 리퍼가 우리에게 우리에게 위안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낯설고 새로운 요소들이 일상이 되고 있는 이때, 함께 감사하며 이겨나갈 힘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집콕한 상태로 스크린을 들여다보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우리가 그녀를 보며 요즘 미술의 재미에 푹 빠져보기를 기대해봅니다. 비록 우리는 실내에 머물러야 하지만, 동시대 예술과 함께라면 우리의 사유는 나날이 확장되고 깊어질 테니까요.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도전이었고, 도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그것을 이겨내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장애인이지만 정신마저 불구는 아닙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견디고 웃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그래 왔습니다. 당신의 현실이 힘들다면 나를 보세요. 
- 엘리슨 래퍼




*사진 출처

https://artdaily.com/index.asp

https://www.mirror.co.uk/news/uk-news/alison-lappers-son-put-anorexia-19445217

https://www.willpearson.co.uk/trafalgar-square-pano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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