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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Sep 15. 2020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일 놈'을 양성하는 이유.

다시, 마리나 아브라 모비치를 감상해야 하는 때 #1


    최근 몇 년간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셀럽들과 인플루언서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에 세간이 시끄럽습니다. 언론들은 이때다 싶어 앞다투어 자극적인 보도를 해왔습니다. 우리가 늘 보아왔듯, 꼭 그렇게요. 자극적인 떡밥을 던질수록 사람들을 더욱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높은 클릭 수는 곧 금전적인 이익이 되었죠. 매일 같이 뉴스를 접하는 이 시대에, 자극적이고 혐오적인 시선과 표현들이 스크린에 넘쳐납니다.  그리고 보는 이들은 자연스레 그들의 시선을 습득하게 됩니다. 깊이 있게 생각하며, 사리를 분별하는 일보다 혐오적이고 단편적인 생각에 물드는 일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ben smith 2013. 


  

  며칠 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였던 고인의 생애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전파를 탔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동시 방영된 다큐 속에는 고인과 전 연인 관계였던 인물이 적나라하게 노출이 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친모의 지극히 개인적인 발언까지 서슴없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작 고인은 자신이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말입니다. 고인은 도마 위의 생선으로서 너무 오래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좀 편히 쉬고자 떠났는데, 세상은 떠난 이 조차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예상하셨듯, 방송 이후 전 연인의 SNS는 테러 수준에 가까웠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생전에 지금 고인이 된 이를 욕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또 다른 '죽일 놈' 들을 양산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며칠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가 내내 생각났습니다. 그녀의 메시지가 모두가 지쳐있는 이때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편의 글을 통하여 그녀의 퍼포먼스를 차례로 만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녀의 1974년 미술계에 큰 파격을 일으켰던 <리듬 0 (Rhythm 0)>을 읽어보고자 합니다.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Marina Abramović),  <리듬 0 (Rhythm 0)>, 1974.



    <리듬 0 (Rhythm 0)>(1974)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유명한 퍼포먼스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퍼포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퍼포먼스가 있던 당일, 미술관 안에는 간단한 지시문이 놓여 있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내게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72개의 물건들이 놓여있습니다. 

퍼포먼스.

나 역시 물건/대상입니다. 이 시간에 일어난 모든 일은 전적으로 내가 책임집니다."



    그녀는 퍼포머인 자신을 자유롭게 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장미, 깃털, 꿀, 채찍, 올리브 오일, 가위, 해부용 칼, 총과 총알 등 즐거움을 주거나 고통을 유발하는 다양한 사물들이 놓아두었습니다. 관객들은 이 물건들을 선택하여 여섯 시간 동안 퍼포머의 신체에 일련의 행위를 수행하였죠.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Marina Abramović),  <리듬 0 (Rhythm 0)>, 1974.


    퍼포먼스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장미를 건네거나 깃털을 이용하여 마리나를 간지럽히는 정도의 행동만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점차 거친 행동을 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점차 많은 이들이 마리나를 폭력적으로 대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녀의 옷을 잘라내 거칠게 벗겨내기도 했습니다. 장미의 가시를 몸에 꽂거나, 칼로 피부를 그어 피를 흘리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Marina Abramović),  <리듬 0 (Rhythm 0)>, 1974.


    퍼포먼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성이 짙은 행위들로 점철되었습니다. 심지어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관객이 등장하여 그녀를 보호하려는 관객들과 가학적인 지속하려는 관객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해도 움직이지 않는 마리나의 수동성을 확인한 뒤, 마음껏 가학적인 행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여겨볼만한 점은 바로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6시간이 흘러 퍼포먼스가 종료되자 마리나는 움직이며 관객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가학적인 행위를 하였던 관객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쳐버렸습니다. 칼로 피부를 도려내고, 함부로 옷을 찢던 사람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습니다. 마치 그녀를 로봇이나 인형쯤으로 여기고 함부로 그녀를 난도질을 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녀가 수동적인 타자가 아니라 능동적이며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이었음을 깨닫게 된 순간, 그녀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한 순간적인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녀 역시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는 능동적 존재였음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녀는 결코 수동적인 타자가 아니었으니까요.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Marina Abramović),  <리듬 0 (Rhythm 0)>, 1974.


    우리에게 셀럽들은 하나의 이미지이자 기호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와 같이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꿈을 꾸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간입니다. 때론 슬프고 우울하다가도 삶에 대한 희열과 만족, 즐거움을 느끼는 능동적인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터넷 뉴스와 이미지 속 사람들은 수동적인 객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지, 살아 숨을 쉬는 인격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마치 마리나가 자신에게 가하는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였듯, 이미지 속의 사람들 역시 그래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오입니다. 



    왜냐하면, 마리나도 그리고 우리가 화면을 통해 매일 마주하는 무수한 사람들도 한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동적인 이미지나 기호가 아닙니다. 물어뜯으면 가만히 뜯겨야 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참을 길이 없을 때 편히 난도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마리나의 퍼포먼스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수동적인 객체 앞에서 자신의 폭력성을 함부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들을 함부로 할퀴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폭력을 가하던 대상이 누군가의 행복이자 사랑과 기쁨이 되는 소중한 존재라는 점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 졸렬하게 뒷걸음질 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자주 선택의 기로 앞에 설 것입니다. 이미지로 만나게 되는 이 존재를 그저 하나의 기호에 불과한 이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한 인격으로 마주할 것인가. 마리나를 보호하는 관객이 될 것인가, 아니면 마리나에게 자신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관객이 될 것인가 말입니다. 그리고 쉬운 후자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 힘이 들고 의식적으로 행동해야 하지만 전자의 시선을 택할 것인가를 선택할 것인가. 이 선택의 기로에 여러 번 서겠죠.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개개인의 작은 선택이 오늘도 더 나은, 혹은 더 살얼음판 같은 내일을 만들어간다는 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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