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사람만이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야흐로 인공 지능이 운전도 하고, 번역도 하고, 기사도 쓰고, 작곡도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기계는 단순히 복잡하고 위험한 일을 대신 수행하는 수준을 넘어서,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여겼던 '예술'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침투하고 있다. 인간만의 능력으로 분류되던 '예술'과 '창의성' 개념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AI 예술가들이 어느 정도 수준의 작품을 선보이길래, 인간 고유의 능력이 의심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된 것일까.
AI회화의 대표적 예시로 구글의 딥 드립(Deep Dream)을 들 수 있다. '딥드림'이라는 이름은 딥드림의 작품이 꿈속에서 본 이미지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딥드림은 2016년 한국의 이세돌 9단을 이긴 '알파고'를 개발하여 세계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적 있는 구글의 작품이다. 딥 드립은 인간의 신경망을 모방한 '인공 신경망'을 통하여 수많은 이미지를 저장하고, 각 이미지의 요소를 잘게 나누어 데이터화한다. 이후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패던과 대조하며 유사 여부를 확인하고, 새롭게 입력된 이미지를 기존 학습 이미지 패턴에 적용하여 작품을 창작한다. 딥드림이 창작한 작품의 결과는 매우 독창적이다. 이는 딥드림이 데이터 학습에 기반하여 기존 작품을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손쉽게 변형하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는 "넥스트 렘브란트(The Next Rembrantdt)나 페이스북의 CAN(Creative Adversarial Networks)도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넥스트 렘브란트(The Next Rembrandt)는 네덜란드 광고 회사가 기획하고, ING와 마이크로소프트사가 공동으로 협업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연구진은 ‘넥스트 렘브란트’에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 346점을 딥러닝 시킨 뒤, 렘브란트 스타일의 주제와 스타일을 모방한 작품을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완성된 백인 남성의 초상을 살펴보면, 흰색 깃이 있는 옷과 검은 모자, 수염, 그리고 얼굴의 오른쪽이 강조된 모습까지 마치 렘브란트가 환생하여 그림을 그린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3D 프린팅 기술이 담당했는데, 이 기술은 렘브란트가 사용했던 그림의 질감과 붓터치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페이스북의 CAN은 기존에 존재하는 그림들과 각 그림의 스타일 분류 정보를 학습 데이터로 사용한다. CAN의 기반이 되는 이 임의의 벡터로부터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데, 이 그림이 기존의 스타일 중 하나로 분류되지 않고, 새로운 그림으로 분류되도록 학습을 한다고 한다. CAN의 특징은 학습을 할 때, 기존에 존재하는 예술작품들과 인공지능이 그린 그림이 비슷한 확률적 분포를 가지게 하여 인공지능 그림이 아주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으나 '예술작품'으로 분류되도록 학습을 시킨다는 점이다. Facebook AI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이 모던아트 그림과 인공지능 만들어낸 그림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미술 작품은 6-7세 아이들 그림과도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다. 현대 예술 사진과 인스타에 돌아다니는 일반 유저들의 사진의 구분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인공지능의 창작물을 현대미술 작품과 구분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히 이해하긴 어렵다. Facebook AI팀은 연구 결과에 신이 난 듯 보이나, 필자의 입장에서는 현대미술의 속성을 고려할 때 이 실험(?) 자체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AI 화가가 그린 작품은 오프라인 경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공지능의 창작물이 적극적으로 오프라인 예술계에 침투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8년 10월 미국 뉴욕 경매에서 AI화가 '오비어스'가 그린 초상화 '에드몽 드 벨라미의 초상(The portrait of Edmond de Belamy)'는 한화 5억 원에 팔렸다. '에드몽 드 벨라미'는 700여 년 간 그려진 서양 초상화 1만 5000여 점을 데이터 베이스로 분석한 이후 이에 기반하여 "창작"된 초상화다. 작품의 낙찰 가격은 애초 예상되던 낙찰가보다 40배가 넘는 가격이라고 하니, AI 예술가를 얕보던 수많은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렇듯 인공지능은 기존 미술품 시장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으며, 지금과 같은 속도로 인공지능 기술이 발달할 경우 인간보다 더욱 뛰어난 창작물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있다.
인공지능의 창작 행위는 현대 예술에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과연 인간의 전유물이었던 예술은 여전히 인간만 가능한 것인가.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꼽히던 창의력은 이제 더 이상 인간 고유의 영역이 아닌 것인가. 만약 AI의 창작을 '예술'로 규정할 수 없다면, 예술이란 과연 무엇이기 때문인가.
많은 이들이 AI의 예술활동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고, 다가오는 시대에 예술가의 쓸모는 축소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미학자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그는 2018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시대 예술과 기술의 미래’ 토론회에서 "미적 가치는 물리적 속성이 아니다"라며 인공지능이 만들어낸 것은 예술이 아니라 이미테이션 게임인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의 핵심은 "창작 주체가 감상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예술이라고 설득시킬 수 있는가"에 있다. 마르셸 뒤샹이 기성품 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해 파란을 일으켰던 사건을 생각해보면, '샘'의 예술적 의미는 변기 자체나 뒤샹이 변기를 생산했느냐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다. '샘'의 예술적 의미는 뒤샹이 의도를 가지고 변기를 선택하여 그것을 '예술'로 규정한 행위에서 파생된다. 즉 예술이란 미적 주체가 새로운 관념을 만들고 그 해석을 관철시키는 활동이며, 이는 감정과 이성을 가진 유기체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이다. 따라서 AI가 온전히 감성과 이성을 가진 존재로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면, 그의 활동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창작'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필자 역시 같은 입장이다. 예술은 의미부여 행위이자 작업하는 과정의 총체다. 단순히 예술적으로 보이는 사물이 예술이 아니라, 작가 개개인이 살아온 삶에서 파생된 문제의식,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유일한 방식으로 시각화하는 과정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이란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작품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마지막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사회와의 상호작용 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인공지능이 창작한 작품들은 낯설고 새로운 물리적 산출물이긴 하지만, "예술"이라는 적극적인 행위가 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까.
물론 인공지능 예술에 대한 필자 개인의 견해는 이미 존재하는 예술' 개념에 근거하고 때문에, 예술의 개념이 끊임없이 변화되는 지금 이 때 시의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사 속 카메라와 회화의 대립에서와 엿볼 수 있듯, 예술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은 기존의 예술 개념을 해체하고, 예술 개념의 외연을 넓히고, 그 깊이를 더하며 예술의 범주를 계속 확장시키지 않을까. 예술에 대한 새로운 합의와 변경이 가능하다면, 과연 10년 뒤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인간은 여전히 소멸하고, 유한하고, 예측 불가능하겠지만, 이 특유의 취약함이 완전하고 무결한 기계를 만나 어떤 대립과 변화를 선보일지 기대가 된다.
* 참고문헌
‘AI의 창작활동’, 예술의 위기인가 지평 확대인가
http://www.hani.co.kr/arti/economy/it/8717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