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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미 Apr 16. 2021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파격적인 작품들, ⟪이불-시작⟫

삼십 년 전 이불의 작품 세계를 거닐며 마음을 관통한 몇 가지의 사유들.

⟪이불-시작⟫

2021.03.02-2021.05.16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박사 과정 중에 있는 언니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는 박사논문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했다. 필자는 언니와 비슷한 시기 석사를 시작했다. 그러니 언니가 박사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다는 건 필자가 학교에서 탈출한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언니가 반가웠다. 


    언니를 불러낸 이유는 간단했다. 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불 전시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불의 개인전에 "아무나"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대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현대 미술은 자주 상식을 벗어나는 범위까지도 과감히 포용하고자 하며, 이를 일종의 정체성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가 없는 친구들과 함께 전시장을 향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일이기 때문이다. 



    전시를 둘러본 언니는 작품이 참 ‘솔직하다’는 단순한 한 마디로 전시를 평가했다. 함부로 미적이고자 하지 않고, 고통은 고통으로 과감히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언니의 표현에 따르면 많은 여성 작가들이 여성에게 가해지는 고통을 표현할 때, 그조차도 ‘아름답게’ 표현하고자 하는 점이 거슬릴 때가 많았다고 한다. (물론 이게 잘못된 것은 아니며, 미적인 작업이 낮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불은 참 솔직하게, 그러니까 적나라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작가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전시 평을 읊는 언니를 보며 마음이 놓였다. 




1.

전시장을 향하며


    독자들 중에는 이불이 어떤 작가이기에 필자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졸이며 전시 보러 갈 사람을 구했는지 궁금할 수 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그녀의 작업은 ‘괴물’ 같다. 이불은 몸의 정치학, 젠더 등 다양하고 논쟁적인 이슈를 '괴물, 사이보그, 나체, 그리고 썩은 생선'을 통하여 다뤄왔다. 그러니까 그녀는 미술계에서 마주치기 쉽지 않은 낯설고 비관습적인 방식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이불의 작업은 일상적이지도, 익숙하지도 않다. 보는 이들을 도발한다. 그녀의 기괴한 상상력과 창의성은 보는 관람자들을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때론 불쾌하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시립 미술관이 이불의 개인전을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필자의 첫 반응은  '놀라움'이었다.  시립미술관이란 다수의 시민들이 (미술이란 고전 명화 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들부터 서울 소재 미대 교수까지) 함께 예술을 향유하는 특별한 공간이 아닌가. 특히 초기작은 젊었던 이불의 패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더 과감하고 진보적이라는 인상을 받기 십상인데, 이불의 '초기'작을, 그것도 '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일 결정을 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작가 이불. 리 판 촬영, 이불 스튜디오 제공(Photo by Le Pan, Courtesy of Studio Lee Bul) Ⓒ 코리아나. 2019.





2.  

<히드라>(2021)

관람객들에 의하여 비로소 완성되는 그녀의 메시지.


    전시장 로비에 들어선 순간, 이불이 준비한 관객 참여형 작품 <히드라>를 만날 수 있다. 시립미술관 로비에 설치된 <히드라>는 1966년 처음 소개된 풍선 모뉴먼트를 2021년 버전으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기존의 <히드라>는 동양 여성을 종속적이고, 유약하고, 순종적으로 재현하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비웃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시장 로비에 설치된 이 작품은 관객들이 펌프를 밟아서 공기를 주입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한 발 한 발 펌프를 밟을 때 관객들의 움직임은 공기가 되고, 이 공기는 작품을 세워가는 힘이 된다. 필자가 전시장을 방문했던 3월 말, 작품은 이미 우뚝 서 있었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작품이 온전한 형태를 갖추기 위하여는 적어도 4만 번 이상의 펌프질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과 교감하며 부단히 펌프질을 하고 있을 관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흥미로웠다.



이불, 히드라, 1996/2021, 천 위에 사진 인화, 공기 펌프, 1000cm(높이) x 약700cm(지름)



      누군가는 이불의 작품을 마주한 뒤, 그녀를 혼자만의 세계에 갇힌 미친 여자로 규정할 수도 있다. 그녀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고, 해독 불가능한 기괴한 느낌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실제 서울시립 미술관 전시 평을 찾아보니 다시는 시립미술관에 가고 싶지 않다거나, 이딴 작품을 시립미술관에 설치했다며 관계자들을 비난하는 코멘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불 작업의 중심에는 언제나 관람자와의 소통이 있다. 그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작품의 의미는 작품의 목소리가 관람자들에게 가닿을 때 비로소 더 깊어진다. 작품은 평소 들리지 않던 세계의 목소리들을 포착하여, 더욱 분명하게 발화하고자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이불의 작업을 다시 찾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3.

한 여성 개인의 고통과 경험으로서의

<낙태>(1989)


   전시실 2에 들어가면 이불의 초기 퍼포먼스를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다루는 퍼포먼스는 이불이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선보인 작업들이다. 당시 국내 미술은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계열로 양분화되어 꽤나 경직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불은 어느 노선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며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수행해왔다.  


    이불의 초기 퍼포먼스는 주로 여성 신체를 둘러싼 담론을 비판하는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30년 전 퍼포먼스라기엔 지금 보아도 급진적이고, 폭력적이며 날카롭게 느껴진다.



전시실 2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 <낙태> 1989, Ⓒ광주비엔날레




    특별히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퍼포먼스는 당시 미술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이불의 <낙태>(1989)다. 이불은 서울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퍼포먼스를 시작하며, “죄책감과 고통에 대하여, 그리고 이 이슈 자체에 대하여 한번 더 생각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 그리고는 천장에 설치된 등산용 로프에 자신의 몸을 묶고 매달린다. 거꾸로 매달린 채 최승자의 시를 읊는다. 표면이 거친 등산용 로프는 살을 쓸어내린다. 가학적인 퍼포먼스가 주는 고통은 몸부림과 비명으로 이어지고, 보다 못한 관객이 이불을 끌어내리기 시작하면서 퍼포먼스는 중단된다.  


   퍼포먼스를 선보였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낙태는 윤리적인 의제로서 혹은 한 국가의 출산율이나 경쟁력과 관련된 문제로 논의된다. 강남역 사건 직후부터 '낙태'는 수시로 정치인들이나 이익단체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 낙태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죄로 규정할 것인가, 혹은 사법부가 개입하지 않고 개인의 결정권 영역으로 남겨둘 것인가. 사회가 변화되는 내내 이에 대한 무수히 많은 목소리들이 오고 갔다. 

  

     문제는 이슈를 다루는 과정에서 정작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배제되기 십상이라는 점이다. 낙태란 한 여성 개인의 경험이자, 그녀 인생 전체에서 지워지지 않는 고통을 수반하는 강렬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 낙태란 주로 '관련 없는' 이들이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의제로만 다루어져 왔다. 


     그런 점에서 이불의 퍼포먼스는 특별하다. 이불의 작업은 낙태의 윤리성과 적절성을 따지기 이전에, 그것이 여성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자 일종의 고통스러운 경험임을 상기한다. 이불은 힘과 목소리를 가진 자들의 도덕적 삿대질의 피해, 윤리나 정치라는 도마 위에 올라온 이 이슈를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한다. 그녀는 그저 낙태란 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자, 죄책감을 포함한 극심한 정서적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임을 또렷하게 전달할 뿐이다.  30년 전에 말이다. 낙태가 엄연한 죄와 불법, 금기로 치부되던 30년 전에 말이다.




4. 

<화엄>(1997), 육체적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일의 폭력성과 기괴함.


   전시실 3으로 넘어가면, 이불의 작업을 촬영한 사진과 작업에 사용된 오브제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람자들은 전시실 3에서 이불의 지난 30년 발자취를 다채롭게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화엄>의 사진 기록물 및 <화엄>에서 사용되었던 오브제들을 함께 전시했다. <화엄>은 세계 현대 미술의 중심이 되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강제 철거당한 일화로 유명한 작품이다. 


    98마리의 물고기가 투명 비닐백에 담겨 미술관 전시실 벽에 걸려 있다. 비즈 구슬이 물고기 몸에 촘촘히 박혀 있다. 시간이 지나자 전시된 생선은 썩기 시작하고 전시장 전체에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당황한 미술관은 전시 개막과 동시에 작품을 강제로 철거한다. 관계자들은 세계적인 현대미술관과 걸맞지 않은 이 악취를 감추기 위해 방향제와 탈취제와 향수를 살포한다. 그러나 악취와 방향제 그리고 탈취제 냄새가 질서 없이 뒤섞이기 시작하자, 전시실은 '미술관'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이고 불쾌한 냄새로 가득 차게 된다. 


    아시아 작가, 그리고 여성 작가의 작품이 서양 미술계의 기득권의 상징인 뉴욕 모마에서 철거되었으니, 이슈가 아니 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이불은 계약 위반 고소를 통하여 정정 당당하게 손해 배상을 받아냈다고 한다.) 


<화엄> 1997. 생선, 장식 구슬, 과망가니즈산 칼륨, 마일러 백. 로버트 푸글리시 촬영, 이불 스튜디오 제공.


    <화엄>에서 생선이란 육체의 메타포다. 육체는 지속적으로 늙는다. 늙음이 한계에 다다를 무렵, 부패가 시작된다. 마치 생선과 같이.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육체를 불멸의 존재로 가정하며, 획일적이고 엄격한 미의 기준을 요구한다. 드라마나 영화, 각종 대중교통이나 기사의 광고란 등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면 주름 하나 없이 판판하고 단단한 육체들이 널려있다.


    <화엄> 앞에 서면 비로소 육체의 산화과정을 막는 모든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미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하여 육체를 변형하는 행위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기괴한 일인지 돌아보게 된다. 


    사회는 악취가 나고 썩어질 육체의 부패를 지연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가지고 있는 모든 자본을 총동원하여 부패할 육체의 아름다움을 하루라도 더 유지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러나 싱싱함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억지스럽고 이질적이다. 불필요한 고통을 수반할 뿐이다. 날카로운 바늘을 이용하여 생선에 스팽글을 수놓듯 말이다. 


    여담이지만, <화엄> 앞에 서면 "만약 전시된 동물이 물고기가 아니라 강아지나 오리였다면 관람자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된다. 아마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진 않았을까. 동물 학대 논란이 일지는 않았을까. 예술이라는 이름 하에 이 폭력 사태가 허용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뜨거운 논쟁이 일어났겠지. 동물 보호 단체와 예술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겠지. 그러나 우리는 왜 특정 동물의 죽음에 대하여는 절절한 고통을 느끼고, 또 다른 동물의 죽음에 대하여는 무감한 것인지 궁금하다. 과연 그 고통에 공감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누가 정하는 것인가. 만약 그 기준이 인간에게 있다면, 생명의 가치 역시 인간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일까. 쉬이 대답할 수 없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5. 

전시장을 나오며.


    이불의 작업은 특유의 여성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물론 이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불의 작업 앞에 서면 또렷하게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를 느낄 수 있다. 작품이 말하는 바는 남성 작가들은 쉬이 담아낼 수 없는 여성만의 발화다. 그런 면에서 이불의 작업은 ‘여성적’이다. ‘여성적’이라는 걸 누가 규정할지에 따라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말이다. 


-

    아직 전시를 감상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전시가 불쾌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난해하고, 어지럽고, 어떤 면에서는 역겨울 수도 있다. 감히 시립 미술관이 이따위 작품을 전시하냐며 손가락질하고 싶을 수도 있다. (이미 인터넷을 통하여 몇 번 접했던 반응이다.) 그러니, 전시가 불편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하길 권한다. 때론 작가의 유명세를 의식하여 무조건적으로 작품을 긍정하거나, 작품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는 것보다는 욕지거리를 실컷 내뱉는 감상이 더 자유로운 감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심을 다하여 실컷 비난을 퍼붓고 나면, 작품이 마음 한편에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과정은 흥미롭게도 작가가 그렇게까지 한 의도가 궁금해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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