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정 서울 미술관 상반기 전시 ⟪거울 속의 거울⟫에 대한 단상.
봄기운이 완연해지기 시작하던 5월, 석파정 서울미술관 상반기 전시 소식을 듣고,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서울 미술관의 새 전시 제목은 <거울 속의 거울>로, 그 제목부터 참 의미심장한 전시였습니다. <거울 속의 거울>이란 에스토니아 출신의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의 곡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그래비티 Gravity> 트레일러에도 삽입될 정도로 클래식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한 곡입니다. 지금 들어도 여전히 세련되고 미니멀합니다. 흥미롭게도 곡은 무수한 '대칭'의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곡의 제목도, 서로를 무한히 대칭하는 '거울 속의 거울'이었겠죠.
(이 곡이 궁금해하실 수도 있는 분들을 위하여 영상 하나를 첨부합니다! 틀어두고 글을 읽어보시길 추천해요. )
전시장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전시의 제목이 보입니다. 제목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봅니다. 왜 제목이 <거울 속의 거울>일까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거울은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을 만들어냅니다. 그때부터 거울 표면에서는 무한히 복제되는 환영들의 파티가 시작되죠. 거울 속의 거울은 단순히 사물을 그대로 반사하는 거울이 아닌, 무한히 복제되는 대칭의 향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거울 앞에서 거울을 들고, 끝이 없이 복제되는 자아를 보고 있으면, 무엇이 진짜 '나'인지, 그리고 무엇이 환영의 '나'인지 모호해집니다. 진실과 스펙터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저는 진실보다 환영의 이미지가 중요한 이 시대적 분위기에 대하여 사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상의 '나'를 빚어내기에 급급한 분위기 속에서, 진짜 '나'는 누구일까 되묻게 되었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각양각색의 개성을 가진 열아홉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열아홉 작가 모두, 젊고 트렌디한, 동시대를 살아내며 활동을 왕성하게 이어나가고 있는 작가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모든 작업을 다 다룰 순 없으니 오늘 글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사유를 촉발했던, 전시장을 나오고 나서도 머릿속을 맴돌았던 두 작가의 작품들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끔 삶을 살아가다 보면 그저 매일을 평범하게 살아내는 일이 거대한 세상과 싸우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 평범한 삶을 지켜낸다는 건 매일의 고단함을 버텨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이 ‘평범’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매기기보다 “특별한” 삶을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꾸며내라고 채찍질하기 바쁩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개개인은 상처와 수치, 그리고 공허와 슬픔을 뒤로한 채 한껏 과장한 '표면적 자아'로 살아가기 급급하죠.
화려하게 치장한 표면적 자아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틈에, 장수지 작가는 내면의 창고에 켜켜이 묵혀둔 상처와 수치, 그리고 공허와 슬픔을 과감하게 꺼내 보이고자 합니다.
장수지의 초상은 외롭고 불안한 현대인의 내면을 그대로 투영합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밝고 행복하게 꾸며지지 않은 채 현대인 특유의 불안과 공허함을 그대로 드러내죠. 따라서 굳게 다문 입술과 초점 없는 눈동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 같습니다. 작가는 활기롭게 웃고 있는 이들의 표면적 자아 뒤에 있는 떨림과 무기력, 고독으로 점절된 내면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는 듯한 인물들을 통하여 불안하고 고독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살아간다는 건 떨리고 공허한 쓸쓸함을 지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위로를 건네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며 말입니다. 이 어둡고 축축한 자아 역시 우리의 일부입니다. 정신분석학자 융의 표현처럼, 자아의 어두운 그림자를 억압하기보다 그런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며, 이 어두움과의 대화를 용기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더 온전한 자신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전시장을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강은혜 작가의 <자화상> 시리즈를 만날 수 있습니다. 강은혜는 ‘선’이라는 기하학적 개념을 소재로 이미지와 건축적 공간을 연결했던 작업으로 이미 유명한 작가죠. 이번 전시에서는 강은혜 작가는 이 팽팽하고 올곧은 선들로 가득 찬 자화상 <self portrait>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강은혜 작가의 초상은 남다릅니다. 분명 '자화상'임에도, 캔버스 안에는 곧게 뻗은 직선들만 놓여 있습니다.
그림 앞에 서면 선을 하나하나 천천히 그렸을 작가가 떠오릅니다. 작가는 마치 고된 수행을 하듯,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선을 그리기 위하여 집중하고, 또 집중했을 것입니다. 작가는 왜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직선으로 가득 메운 것일까요.
어쩌면 작가는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자신이 된다는 것은 지난하고도 고된 일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함께 한 세월의 짬을 먹죠.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가며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고, 자신 조차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곤 합니다. '나"를 규정해줄 수 있는 새로운 심리테스트들이 업데이트되고, SNS나 단톡 방에는 다채로운 테스트 결과지가 공유되기 바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이 시끄러운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불안하여 한 걸음 내딛지 못하는지, 무엇을 포기하고 사는지, 무엇을 잃어버리고 사는지, 왜 삶은 이렇게 재미가 없고 불만족스러운지, 그 이유 조차 명확하게 알아채기 쉽지 않습니다. 가끔은 자신이 불안해하고 있다거나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살아간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할 때도 있지요.
자신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은 자기 자신대로 살아가기 위한 초석입니다. 이 과정은 외부의 소리를 잠시 꺼두고,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쉽고 간편하지 않을 수 있죠. 강은혜 작가 역시 이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작가는 다른 누가 그려둔 선을 따라가기보다, 자신이 설정하고 그리기 시작한 선을 따라 가만히 따라가는 삶을 연습해보기를 권하는 듯합니다. 마치 그녀의 자화상처럼 말입니다.
전시의 끝무렵에 가면, '스스로에게 진실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예술 작품이다'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삶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한순간을 찍고, 보정하고 그것들을 우리 삶의 예술이라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전시장 속에서 우리는 그저 진실한 나 자신이 하나의 예술이라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 삶의 일부가 된 sns나 브이로그는 우리의 삶을 조작하고, 편집하여,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을 창조하기를 독려합니다. 그것들은 진실한 '너'의 모습대로 살기보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하여 창조된 하나의 온전한 '이미지'로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이 비로소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속삭이죠.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만났을 때에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반짝이는 야경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는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즐기고, 향유하며 나 자신이 되기보다 나를 보여줄 또 하나의 환영을 만들어내기 급급합니다. 그러나 전시장에 들어서면, 우리는 "진짜 너는 누군데", 라는 물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인정을 위하여 겹겹이 꾸며진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나, 있는 그대로의 나는 누구냐고.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기를 원하고 있나요, 혹은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스스로에게 진실되고자 하나요 '나'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나'를 이해하는 일이 두렵고 망설여져, 자꾸만 뒷전으로 두고 있지는 않나요.
일상을 살아가며 '나'를 돌볼 여유 조차 없는 이들이 있다면, 혹은 일에 대한 생각이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마음이 삶을 무리하게 집어삼키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현실은 과감하게 제쳐두고 전시장을 거닐어보기를 권합니다. 어떤 작품도 100점짜리 답이 되어줄 수는 없겠지만, 두려움에 좀처럼 마주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사유를 보다 진정성 있게 도와줄 테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