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구겐하임 뉴욕에서는. 길리언 웨어링, ⟪Wearing Masks⟫.
NOVEMBER 5, 2021– JUNE 13, 2022
“사람이란 결국 인간적인 마스크를 쓴 존재로서 이를 통해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 보이지만, 내면으로 향하는 주관적인 의식과 모습은 그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 두 가지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불균형, 나는 이것에 관심이 있다." - 질리언 웨어링.
지난 2월 뉴욕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뉴욕인지 베를린이지 파리인지. 혹은 서울인지. 저는 알 수 없지만, 여전히 뉴욕은 뉴욕이더군요. 2월 뉴욕은 많이 춥고 흐렸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동시대 미술들이 활발하게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습니다.
매일 갤러리와 뮤지엄을 다녔습니다. 세계적인 미술관으로 꼽히는 메트로폴리탄에서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은 300만여 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고, 현대미술계의 '권위'로 불리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는 입장을 위하여도, 그리고 작품을 보기 위하여도 긴 줄을 서야만 했습니다. 휘트니 미술관, 뉴 뮤지엄, 첼시 갤러리까지 매일 바삐 돌아도 미국 현대 미술의 중심이 되는 장소들을 다 방문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공간들을 둘러보았지만,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구겐하임을 꼽고 싶습니다. 구겐하임은 건물의 외관부터 압도적이었습니다. 달팽이처럼 나선형으로 내려오는 건물은 뉴욕시가 꼽은 뉴욕의 대표 랜드마크이자, 이름만 들어도 화려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현재 구겐하임에서는 칸딘스키, 질리언 웨어링, 그리고 제니 C. 존스의 작업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현대미술사 교과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칸딘스키와 동시대 미술의 한 획을 그었던 YBA 출신 질리언 웨어링, 그리고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이자 예일대 교수를 역임하고 있는 제니 C. 존스까지, 지금의 구겐하임은 어느 한 시대에 머물러있지 않은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작가들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글에서는 질리언 웨어링의 개인전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현재 구겐하임에서 열리고 있는 질리언 웨어링의 회고전은 꽤 큰 규모이기 때문에, 그녀의 초기작부터 (현대 미술책의 '동시대 편'에서나 볼 수 있었던!) 최근 작업까지 빠짐없이 만나볼 수 있습니다. 나선형 모양의 전시장 곳곳에 숨겨진 그녀의 작업들을 살펴보는 일은 꽤나 재미있었습니다.
전시의 제목은 'Wearing Masks'인데 질리언 웨어링의 ⟪Wearing Masks⟫ 전시라니, 전시의 제목부터 참으로 위트 있습니다. (지난 2여 년간 '마스크'를 강제로 써야 했던 상황을 고려할 때, 웨어링의 'Wearing Masks' 전시는 중의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질리언 웨어링은 이미 유명한 동시대 미술 작가지만 국내에는 주로 그녀의 초기 미디어 작업 위주로 소개가 되어있는 듯하여 이 글에서는 2000년대 사진 작업을 중심으로 이번 전시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웨어링은 설치, 사진, 비디오 등 다채로운 미디어 매체를 통하여 인간의 외면과 내면, 개인과 사회, 사실과 허구라는 대립되는 이슈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습니다. 국내에 주로 소개된 작업은 이 이슈들을 다루고 있는 90년대 웨어링의 영상과 사진 작업물입니다. 1990년대 웨어링은 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직접 작성한 글귀를 들고 있는 사진 기록이라든지,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는 쇼핑몰 한가운데서 춤을 추는 작가의 모습, 혹은 사람들이 가발과 가면으로 변장을 하고 아주 사적이고 불편한 진실을 고백하는 영상을 하나의 작품으로 선보였습니다.
(좌)"SIGNS THAT SAY WHAT YOU WANT THEM TO SAY AND NOT SIGNS THAT SAY WHAT SOMEONE ELSE WANTS YOU TO SAY" (I'M DESPERATE), (1992-1993)
(우)"DANCING IN PECKHAM", (1994). Ⓒ Gillian Wearing
2000년대에 이르자 그녀는 꾸준히 Self-portraits 시리즈를 제작하여 왔습니다. 이번 구겐하임 전시장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작업 역시 Self portraits 시리즈입니다.
사진들은 유명인 혹은 그저 지인들의 모습 같습니다. 어딘가 차갑고 섬뜩한 느낌을 들지만, 언뜻 보면 그저 사람들의 모습을 촬영한 평범한 사진처럼 보이죠. 그러나 사진을 자세히 보면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인물의 눈 부분을 보면, 사진 앞에 있는 피사체가 가면을 쓴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진 속 인물은 다름 아닌 웨어링 자신입니다. 그녀의 사진 작업은 크게 Family Album" 연작(2003-2006)과 "spiritual Family" 연작 (2008-현재)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기 작업인 "Family Album" 시리즈는 그녀가 그녀의 생물학적인 가족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찍은 사진입니다. 그녀는 가족들의 가면을 쓰고 찍은 사진을 self-portrait, 즉 자화상이라 명명합니다. 그리고 그 사진 속에서 현실(그녀 자신)과 비현실(이미지가 의미하는 대상)의 경계는 점차 흐려집니다. 다른 이의 얼굴 가면을 자신의 얼굴 위에 올려둘 때, 그녀는 과연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진 속 인물은 그녀의 가족 구성원일까요? 혹은 웨어링 자신을 의미할까요? 이 문제는 뒤에서 조금 더 다뤄보기로 합시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spiritual Family" 연작 (2008-현재)은 그녀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주었던 미술계 영웅들의 모습을 주로 담아냅니다. 물론 사진의 인물은 실제 '영웅'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진 속 인물은 실리콘 마스크를 쓰고, 인물을 상징하는 특별한 복장을 입은 작가 자신입니다. 사진 속 그녀는 뒤러나 앤디 워홀, 혹은 모나리자나 클로드 커훈의 모습으로 변장합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했던 큐레이터 냇 토르트만(Nat Trotman)은 전시 관련 인터뷰에서 '그녀의 Self-Portrait 시리즈가 ‘언캐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언캐니란 친숙한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어딘가 낯설고 두려운 감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작업이 어딘가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저도 토르트만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그리고 그 섬뜩함은 '타인이 된 웨어링'과 결국에는 '타인이 될 수 없는 웨어링' 사이에서의 긴장과 균열에서 발생하는 듯 보입니다.
가면을 쓴 그녀는 길리언 웨어링 그녀일까요. 아니면 그녀가 변장한 사람들일까요. 혹은 그 누구도 아닐까요. 누군가는 그녀의 2000년대 작업이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치밀하게 말하자면, 그녀의 어떤 작업도 그녀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공공에서 보이는 ‘나’와 아주 사적인 영역에서의 ‘나’ 사이의 긴장입니다. 그리고 사회 속에서의 ‘나’와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나’ 사이의 균열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 대한 사유를 시작하게 합니다.
가면, 즉 일종의 ‘이미지’와 그 내면에 숨겨진 그녀 자신. 이 둘 사이에는 균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균열은 이미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는 범람하는 이미지의 바닷속에서 자아를 규정하고, 또 조작하며 살아갑니다. SNS 피드 위 인피니트 풀이 있는 호텔에서의 하룻밤, 서울의 야경을 만끽할 수 있는 비싼 레스토랑, 감성 넘치는 우드톤의 카페, 그리고 아트가 수 놓인 따뜻한 라떼와 달콤한 디저트 이미지들은 타인에게 보이는 가면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주 기만적으로) ‘나의 삶’,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이미지들은 일종의 '가면' 이미지들이죠. 일종의 환각과도 같은 이런 이미지는 자주 우리 자신이라고 설명됩니다. 그리고 이미지를 통하여 얻는 타인의 인정은 내면을 지탱하는 모래성이 되죠. 소비를 기반으로 한 현란한 행복은 곧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면입니다.
가면을 쓴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가면을 앞세운 자아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가면을 쓴 '나'는 그리 취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사의 불쾌한 언행에도 웃어넘길 수 있고, 때론 가족의 무리한 요구도 거뜬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면 뒤에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가 주는 불안과 소외,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계발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 없다는 슬픔이나 죄책감으로 떨고 있는 취약한 ‘내’가 있습니다. 삶의 하이라이트만 모아 놓은 이미지들은 결코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우리 삶을 대변해 주지 못합니다. 현재의 이미지란 우리 마주하는 매 순간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조작된 가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조작된 가면 너머로 우리는 그녀의 '눈'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속 ‘눈’의 자리는 명쾌하게 뚫려 있습니다. 웨어링의 가면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두 눈은 취약하지만 진실한 그녀 '자신'의 모습입니다.
언뜻 보기에 사진은 완벽한 타인의 형상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눈’만큼은 아주 사적인 그녀 자신의 모습을 담아냅니다. 그리고 이 ‘눈’은 우리가 생산하는 매일의 이미지들 뒤에 숨어 있는 '나'의 메타포가 아닐까 합니다. 신기루 같은 이미지 뒤에서 매일의 현실을 살아내고, 타인에게 발견되기 원하는 ‘나’의 모습 말입니다.
범람하는 가면의 시대에서도 우리는 결국 사적이고 내밀한 ‘나 자신’을 온전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사적인 ‘나’는 미디어의 풍파 속에 점차 협소하고 얇아지지만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떤 가면을 써도 그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웨어링의 ‘눈’처럼 말입니다.
사진 속 '눈'을 바라보다 보면, 조작된 이미지 너머로 완전히 부인할 수 없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아주 사적이고 솔직한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다. 아주 사적인 '자아'는 가면처럼 화려하진 않겠죠. 그렇지만 '사적인 자아'는 그녀의 선명한 눈처럼 취약하지만 아주 단단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그녀는 최근 작업 Lockdown에서 다시금 “전통적”이라고 분류되는 회화 작업으로 회귀합니다. 작가는 20대 초반까지 꾸준히 회화 작업을 이어왔지만, 당시 회화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다 담아낼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미디어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팬데믹 이후 몇 차례의 락다운을 경험하며, 그녀는 다시 붓을 들었습니다. 작가는 이 시기의 회화가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되는 시기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걱정과 두려움, 권태를 지나가 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회화에 몰입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거장’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녀 역시 코로나 시대에 필연적으로 겪는 염려와 두려움, 그리고 권태로움을 피해 가긴 어려웠나 봅니다.
그녀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를 통해 우리가 함께 지나온 ‘비슷한 경험’들이 그녀의 작업과 관람자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바란다는 소망을 표현했습니다. 사진 속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던 가면을 쓴 그녀의 얼굴이, 회화 속에서는 한결 따뜻하고 친숙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웨어링의 이런 바람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