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을 거친 조각은 단순 조형물을 너머 공간 자체를 바꾸기도 하였다.
들어가며,
어린 시절 친구들 집에 놀러가면 우리 집의 가구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의 ‘자개 장농’ 혹은 ‘나무로 만든 상’ 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슷 비슷 하지만 디테일이 달랐던 그 시절 가구들) 지금 보면 ‘레트로’하다고 말할 수 있는 촌스러운 가구들은 젊은 신혼부부셨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님들이 나름 고심 끝에 고른 것들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집이란 세련되고 감각적인 디자인이 깊숙이 침투한 공간으로 변하는 듯하다. 필자는 작년 이사를 하며 ‘오늘의 집’을 몇 개월 간 애용하였는데, 어플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은 ‘오늘의 집’이라는 플랫폼이 20-30대 리빙 트렌드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를 겪으며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집’이라는 공간을 일종의 감각적인 경험의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그 과정을 온라인 플랫폼에 공유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의식주 욕구가 충족이 된 이후 사람들은 단순히 “먹을 것”, “입을 것” 혹은 “살 공간” 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 먼저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부름’에 국한되지 않고 생활방식이나 세계에 대한 나의 철학을 드러내는 고민이 자체가 된다.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넘어서 나의 정체성이자 나를 드러내고 어필하는 가장 주된 요소가 된다,
“산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몸 하나 누일 곳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공간에 대한 걱정이 해결되고 난 뒤에는 자신이 몸을 누일 곳이 “어떤” 경험을 주는 공간인지가 중요한 요인이 된다. (물론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몸을 누일 넉넉한 공간 조차 마련하기 쉽지 않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조차 충족되기 어려운 것이다.) 공간의 경험은 사소한 인테리어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을 70여년 전부터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던 예술가가 있다.
뉴욕이 사랑한 작가, 이사무 노구치
올해 초 잠시 방문했던 뉴욕의 마지막 일정은 노구치 미술관이었다. 친구는 뉴욕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고요한 미술관이라며 여행 전부터 이곳을 강력 추천했다. 노구치 미술관은 1985년 개관하였으며, 약 200여점의 조각과 모형들을 만나볼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다양한 작가들의 현대미술 작업을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 뉴욕에서 단 한 작가의 이름을 내걸고 운영되는 미술관을 만난다는 것은 꽤나 낯설고 어색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이 전 세계 예술가들이 선망하는 도시다 보니, 무수히 많은 작가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작업들을 선보이기 바쁘기 때문이다. 실제 노구치 미술관은 뉴욕 유일의 단 한 작가만을 위한 미술관이라고 한다. 그런 그가 뉴욕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했다.
노구치의 생애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1904년 LA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3년이 지나고 일본으로 돌아온 노구치와 어머니는 이미 여자친구가 있던 남편에게 버림받는다. 학교에서는 혼혈이라는 이유로 왕따나 차별을 당했다. 그가 자라갈 무렵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하여 징병이 될 것을 우려한 노구치의 어머니는 노구치를 미국 기숙 학교로 유학을 보낸다. 13세에 홀로 미국으로 넘어간 노구치는 의대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술학교에서 야간 조각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학교의 교장인 오노리오 루오톨로씨는 노구치의 작품에 큰 매력을 느껴 3개월만에 개인전을 할 수 있도록 지원주었다. 그리고 노구치는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과감하게 대학을 중퇴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무렵에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 출품할 정도로 촉망받는 예술가가 된다.
한 작가만을 위한 미술관
노구치 미술관은 맨해튼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아스토리아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은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어떤 곳들은 황량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페리에서 내려 길을 따라 15분 정도 걸으니 미술관이 보였다. 미술관은 고요했다. 미술관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노구치는 뉴욕의 사랑을 받아온 인물'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많은 스탭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미술관 곳곳을 지키며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으며, 전시장 내부에서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각기 작업을 관조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작업에 대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혹여나 관람객들이 질문을 던질 경우 스탭들은 여유있게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함께 동행했던 친구 말에 의하면 이곳에선 과도한 사진 촬영은 제지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사진 촬영이 이곳 특유의 고요함을 오롯이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글거리는 아이들과 사진찍는 사람들 틈새로 간신히 작업을 감상하던 맨해튼의 미술관에서와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노구치 미술관은 정원과 1, 2층 갤러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한 때 노구치의 작업실이었으나, 1985년 노구치는 생을 마감하기 이전 이곳을 미술관으로 개관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다양한 소장 작품들이 시기에 따라 교대로 전시된다.
결코 규모가 작지 않은 미술관이나, 각각의 작업들은 산발적으로 위치하기보다, 각각의 장소와 철학에 잘 맞도록 배열된 느낌을 주었다. 대부분의 작업들은 대리석, 나무 그리고 흙과 같은 소재의 느낌을 십분 살릴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었다.
장소가 하나의 경험이 되는 곳, 미술관의 정원.
티켓을 구매한 뒤 몇 가지 안내사항을 들으면 미술관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미술관 입구를 들어서면 각기 다른 모양의 기다란 돌들을 만날 수 있다. 각각의 돌들은 어딘가 특이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들은 온전히 조각이 되었다고 말할 수도, 그렇다고 자연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고 하기도 애매할 정도로만 조각이 된 듯 했다.
미술관 초입을 지나면 햇살이 쏟아지는 노구치의 정원을 만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내가 방문했던 평일 점심 시간에도 갤러리의 정원에서 햇살을 즐기고, 정원 특유의 고요함을 누리고 있었다. 정원이 뿜어내는 특유의 분위기는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하늘 높이 솟아있는 맨해튼 고층 빌딩들이 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정원에 들어선 순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곳곳에 놓여 있는 ‘돌’이었다. 정원의 요소는 크게 푸른 자연과 “돌”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돌들은 화려하진 않지만 고요한 관조를 가능하게 하는 작업들이었다. 노구치의 정원에 도착한 이들은 명상을 하고 도를 닦듯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바삐 돌아가는 미술관의 외부와 달리 이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했다.
각각의 돌들은 가만히 흘러가는 시간의 향기를 포착하는 존재였다. 돌들은 단순히 '놓여' 있기보다, ‘생산성’이라는 명목으로 희생되고 있는 시간을 양질의 것으로 탈바꿈 하게 하는 '요술의 돌' 같은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노구치는 가장 자연적인 것으로 ‘바위’를 꼽았고, 이 추상적인 형태의 바위가 일본조각의 심오함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의 '바위'는 좌대 위에 놓여있는 잘 빚어진 조각상이나, 혹은 유리 케이스 안에 보존되어 있는 고대의 유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각각의 돌들은 그 돌을 받치고 있는 돌 기단 위에 조화롭게 놓여있었다. 노구치는 평소에도 “조각을 뭔가 격리된 신성한 범주”로 보기 보다는 공공의 즐거움이라는 목적이 조각 그 자체의 목적에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였다고 한다. 그에게 조각이란 생활 속 미와 유용성을 더하여 주는 존재이자, 생활을 경험하는 공간 자체를 다른 차원으로 바꾸는 요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박물관 1층에 있는 정원과 정원에 놓여 있는 조각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고유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그의 조각을 바라보며, 정원의 일부로 녹아드는듯 보였다. 그렇게 공간에 머무는 관람자들은 작업과, 공간과, 그리고 자연의 요소들과 어우러져 정원에서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노구치에게에게 정원이란 개인의 주거지 일부가 아닌 불특정 다수들이 오고 것고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도 하는데, 실제 뉴욕이라는 다양성의 도시에 설치된 그의 미술관은 익명의 다수들이 각자의 안식을 누리는 공간처럼 보였다.
햇살을 한껏 담아낸 미술관의 내부.
미술관 내부는 아름다웠다. 3월 초 뉴욕은 초봄을 앞둔 쌀쌀한 날씨였으나, 노구치 미술관 안에는 사방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창들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따사로운 햇살은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노구치의 작업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해주었다.
미술관 내부에 있는 작업들은 독특하게도 실제로 앉거나 만질 수 있록 구성된 작업들이 주를 이루었다. (필자가 방문하던 시기가 그런 작업들이 전시되는 시기였을 수도 있다.) 노구치는 오브제를 생활 환경과 결합하고자 한 예술가였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도 의미있는 예술의 형태를 찾고자 했다고 한다.
그의 철학은 실생활에서 꼭 필요한 요소를 하나의 예술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뉴욕 곳곳에서, 그리고 전 세계 수많은 가정집에서 그의 작업을 소장하고 있는 이유일테다. 그의 조각은 박물관이나 미술관과 같이 “예술만을 위한 신성한 공간”을 넘어 공간을 재구성하고 공간에 새로운 의미와 경험을 주고자 한다.
노구치 박물관에 놓여있는 돌, 조명, 커피 테이블이나 소파, 혹은 조각품들을 보며 그가 만든 사물이 공간 전체를 다른 공간과는 차별화된 장소로 만들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노구치는 공간 그 자체가 하나의 조각이 되고, 조각이 하나의 공간을 이루게 하는 예술가였다는데, 미술관을 둘러보니 가히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정원에 놓여있던 돌들 역시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놓여있는 오브제에 국한되지 않는 듯 했다. 오히려 오브제는 공간과의 조화를 이루어 공간의 분위기 자체를 결정하는 독립된 사물처럼 보였고, 그 공간이 주는 경험은 관람객들은 확실히 일상과는 결이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노구치는 평생 “공간의 조각화”를 추구했다고 하는데, 아마 그것은 하나하나의 조각이 예술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각을 포함한 요소들이 하나의 공간으로 어우러져 공간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조각’이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전시장의 내부를 거닐며 조금씩 깨달아갈 수 있었다.
나가며,
전쟁과 변화 속에서 격동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작가, 이사무 노구치. 그는 단지 장식적 역할을 맡았던 조각을 하나의 공간 자체를 예술로 승화하는 마법의 사물로 승화한 작가였다. 미적인 기호를 드러내던 장식용 조각은 그의 손을 거쳐 일상의 공간을 예술로 완성시키는 열쇠가 되었다. 전후 혼란 속에서도 “생활 속의 의미 있는 예술의 형태”를 찾기 위하여 노력해왔던 그의 행보는 결국 우리 일상에 놓여 있는 작은 오브제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예술이 되도록 만들었다.
노구치를 거쳐 우리의 일상은 보다 더 "예술"이 될 수 있었다. 먹고 사는 문제 조차 제대로 해결되기 어려웠던 시절, 생활이 예술이 되기를 바랐던 그의 철학은 2022년 집이라는 공간을 정성스레 디자인하고 있는 우리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 참고자료
어호선, 고웅곤.(2013).이사무 노구치 환경조각의 공간개념에 관한 연구.디지털융복합연구,11(1),447-457.
한민정, 손광호.(2001).이사무 노구치 작품에 나타난 공간디자인 특성연구.한국실내디자인학회 논문집,(27),12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