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로이 살아보니, 나는 성취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단 사실을 알아간다.
며칠 전 알고리즘에 금쪽상담소가 올라왔다. 한동안 금쪽상담소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클릭을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모두가 칭찬하는 이 아이가 '자의식 과잉'이라는 처방을 받았다는 내용을 확인하고는 시청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이 아이가 아버지의 아바타를 대변하기 가장 적절한 상태의 아이처럼 보였다. 흥미롭게도 댓글을 보니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구나 싶더라.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와 깊이 동일시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아이의 아버지를 보니 아무래도 아이가 부모의 인정을 얻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 관련 영상
아마 아이가 자의식 과잉 상태로, 성취만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는 상태로 자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것은 아이가 가진 일종의 생존 전략을 의미한다. 저 아이는 네 명의 형제 자매와 함께 자라왔는데, 네 명의 아이들 속에서 자신이 관심을 받는 일은 자신의 생존과도 직결되었을 것이다. 아마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부모님의 자랑이 되는 전략을 택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부모님의 자랑이 되기 위하여 아이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 보다 부모님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부모님이 자랑할 수 있는 자신의 타이틀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알아서 자신의 원함을 잘 읽어내는 이 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을 수는 있으나, 정작 아이 자신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채로 자랐을 것이다.
나의 십대는 영상 속 아이와 비슷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왜 그렇게까지 성취지향적인 삶을 산 것인지 나 조차도 잘 모르겠을 때가 있다. 어린 시절의, 혹은 이십대의 나는 내가 뭘 좋아하고 내가 어떨 때 행복한가를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할 때면 '이게 쓸모나 있을까'라는 무의식적인 갈등 속에 조금 더 안전한, 성취를 주는 일을 선택하곤 했다. 물론 그렇게 살아왔기에 좋은 대학에서 교육을 받을 기회는 얻을 수 있었지만, 내가 정말 행복했느냐를 물어본다면, 그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내리긴 쉽지 않았다.
서른에 와서야, 그리고 내 의지대로 삶이 굴러가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여유롭고, 또 내가 좋아하는 것은 과감하게 선택하는 지금을 좋아하는 구나' 알아가게 된다. (만약 일을 통하여 내 성취욕을 채워줄 수 있는 상황이 내게 왔다면, 나는 나를 갈아넣으며 "일"로 내 자아를 규정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여유로운 삶을 좋아한다. 그건 내가 모르는 나의 일부였다.
요즘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생각해보면, 늘 숨가쁘게만 달렸던 지난 날들이 무색하게 평온하고, 감사하고, 또 좋다. 평온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모든 것에 고마움을 자주 느낀다. 비록 내가 생각한 서른 같진 않지만. 남들 다 있다는 (가끔은 그 남들의 정의 조차 불분명하지만) 명품 가방을 살 여유는 없지만, 사회가 인정해줄 만한 화려한 이력이나 타이틀은 없지만, 오히려 지금 나는 일상의 순간 순간 속에 감동과 경이를 느낀다.
오전 수영을 다녀오는 길, 함께 수영을 다니는 언니에게 "나 이렇게만 살아도 괜찮은 거냐" 물었더니. "너는 이미 많이 가졌고, 또 너무 잘 살아가고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계속 하냐"며 웃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지금 내 일이 좋고 내 삶이 좋다. 아마 나는 살아가면서 내 삶을 가장 좋아하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듯 하다. 지금껏 살아온 어떤 시기에도 이보다 더 나를 깊이 편안히 여긴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비록 대단한 성취는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또 남들 앞에 내세울 대단한 타이틀도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 삶에 깊은 만족이 있다는 사실이 내가 내세울 수 있는 타이틀이자,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 삶의 타이틀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거면 되지 않겠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