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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Spir e Dition X Feb 27. 2024

케빈에 대하여® 아이는 누구나 손길이 필요하다.

■ 당신이 나를 괴물로 낳았던가? 굶겨진 사랑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나?


https// : "Story" 우리는 케빈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com


충격적이다. 디스토피아 색감 속에 날카로운 장미에 찔려 새어 나오는 피는 짙게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는 얼룩 같다. 이야기보다 감정을 먼저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 한 번도 진지하지 못했던 무지에 대한 충격이 가시지 않기 때문. 준비되지 못한 계획의 전말은 되게 뒤틀린 결말로 찾아온다.


에바는 길을 가다 강력한 주먹질 사례를 받는다. 그것은 아들이 저지른 죗값의 응답이었지만 책임의 대가에서 엄마는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에바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일을 자신의 몫이라 여기며 고통을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에바는 모험가였다. 세계를 여행하며 위험조차 스릴이라 느낄 수 있는 열정이 가득한 여성이었으며 삶의 주체자였다. 빨강은 열정이라 표현되지만 무엇보다 열정 뒤에 붙은 단어는 사랑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났다. 열정적 사랑에는 시시 때를 가지리 않는다. 두 사람에게 사랑은 준비되었지만 콘돔이 빠져 있었다. 에바는 열정적이다. 위험의 순간마저 즐기던 그녀는 운에 맡기기로 한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경이로운 이끌림에 모든 걸 맡긴 채 그렇게 하나씩 벗어 버리고 부드러운 살결의 속삭임 조금은 부끄러운 듯하지만 이미 서로에게 취한 듯. 달콤한 둘만의 비밀. 벌려진 입술 사이로 흐르는 아름다운 노래.  -NELL, A.S-


그날 밤. 12:00 에서 12:01 숫자가 바뀌듯이 에바에게는 예전과 같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에바가 엄마로서 시작되는 날이었다. 원치 않는 임심의 대가는 처참했다. 하루 종일 멈추지 않는 아이의 울음소리로 채워진 하루를 고단하기만 하다. 남편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만 못난 짓만 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결국,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날이었을까? 아들의 눈빛이 바뀌기 시작한 순간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느새 엄마로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때쯤 딸이 태어났다. 근데 도통 아들과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는다.


에바는 아들의 생일날 아들과의 관계를 좁혀보려 하지만 세상에 맘대로 되는 게 하나 없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는 날이었다. 에바의 일생에 가장 큰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에바의 이야기도 하지만 언제가 모두에게도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지금이 케빈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다. 



https// : 에바, 아이가 1 살이 되면 그제야 엄마도 1 살이 된다. com


에바를 비추는 세상은 빨간색으로 그녀의 열정. 꿈이 투영되어 있고 그녀의 성향과 정체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에바의 정체성은 엄마가 아닌 여성이 아닌 여행 가라는 주체적인 삶의 주인이었다. 그런 삶을 살던 그녀에게 가정이라는 안정감과 따스함의 상황은 지구 반대편에서 존재하는 밀림의 이야기였을지 모른다. 빨간색을 대표하는 것은 사랑. 사랑은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도 우연히 시작되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 아파가 나를 너무나 사랑해서 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아기는 우연한 사고로 생긴다. 남자와 여자가 섹스를 한다. 그리고 아기가 생긴다. 여러분은 모두가 완벽한 가정을 위해 계획된 것이라고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술에 취한 밤에 피임 실패에서 비롯된다. 아기들은 돌발 사고 같은 것이다. 아기를 갖기 힘든 사람들만이 실제로 계획을 세워 아기를 갖는다. - My Sister's Keeper (마이 시스터즈 키퍼, 2009) - 


에바는 엄마라는 이름을 원치 않았다. 아이는 사랑스러운 존재였지만 육아는 마치 교도소라는 억압의 대상처럼 느껴졌을 것인지 모른다. 가정이 아닌 커리어를 추구하는 독립적인 여성들에게 아이는 사랑이지만 육아는 경력 단절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녀에게 케빈은 태어날 태부터 사랑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자유를 뺏어간 대상이 돼버린 건지도 모른다. 


영화 속 단편적으로 비치는 그녀의 행동으로 보자면 공사장 사건부터, 언어폭력, 깁스 사건까지 모성애가 결핍된 여자로 비치는데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기 시작하고 모든 것들을 희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엄마를 겪는 그녀에게 엄마의 이름은 버거운 일이었다. 그녀에게 엄마는 처음이었다.  세상에는 섬세한 남성이 있고 여성 강인한 여자가 있다. 


https// : 모성애는 태어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com 


어릴 적 아토피가 너무 심했다. 특히 여름에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힘들어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엄마가 “아프게 낳아서 미안해 “ "건강하게 못 낳아줘서 미안해."라고 한참을 울으셨다. 

- 조세호와 어머니의 애달픈 에피소드 - 


모든 엄마는 자식의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안다. 엄마의 모성애는 이리도 한눈을 팔지 않는다. 청춘을 희생으로 그을린 삶을 이해한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게 모성애는 태어나는 것이라고 몰아세우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볼 수 있다. 


https// : 세상을 꿈꾸며 살았는데 어찌 한순간에 집을 동경할 수 있겠는가? com 


시 수업이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깜짝 놀랄 말한 시를 봤어. 그 시를 보자마자 우리 반 아이들은 이 시를 읽는다면 나랑 같은 생각을 할까? 과연 너희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그 시를 소개하려 해.  < 예능,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스며드는 것. 안도현 > 


교실에는 여학생들이 가득했지만 시의 주제 : "모성애"를 느낀 사람은 배우 홍은희 씨와 선생님 단 두 사람뿐이었다. 엄마들에게는 감정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여학생들에게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렇다. 세상을 꿈꾸며 살았는데 어찌 한순간에 집을 동경할 수 있겠는가? 

남자를 사랑하는 법은 알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그녀였기에...


그렇다. 아이가 1살이 되면  그제서야 엄마도 1살이 된다.  



https// : 두 아이는 같은 이름을 사용한다. com


첫 번째 아이. 엄마랑 있을 때는 하루 종일 운다. 아빠가 안아줄 때는 울음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군다. 엄마라고 불러보겠니?  싫어. 그녀가 원하는 단 한마디를 해주지 않는다. 어느 날이었다. 정성스럽게 꾸민 엄마의  방을 엉망진창으로 망가트렸다. 엄마는 폭발한다. "미안. 특별한 방으로 만들어 주고 싶었어." 라는 아이의 소리는 엄마에게 똥을 싸지르는 일에 다르지 않았다.   


두 번째 아이. 엄마가 자신의 팔을 다치게 했다. 그 일을 아빠에게 말하기를,  자신의  실수라며 엄마를 감싼다.  아이가 몸이 아픈 날 방에 토를 한다. 아이는 자신의 토사물을 치우는 엄마를 보며  "미안해, 엄마." 자신이 어쩔 수 없던 일에도 기꺼이 사과를 한다. 우리 아기 아픈 건 좀 어때? 나아졌어?라는 아빠의  걱정이 담긴 물음에 "나가줘. 엄마가 책 읽어주고 있단 말이야. "엄마에 대한 애정을 그리도 표현할 줄 안다." 


첫 번째, 두 번째 아이는 같은 이름을 사용한다. 그 이름은  바로,  "케빈."  


https// :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저 본능적으로 느낀다. com


어릴 적 남자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의 고무줄을 자르는 일. 그것은 반동형성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감정과 상반되는 행동을 하는 것. 머리로는 예쁘다고 생각을 괴롭히는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근데 어떻게 아이가 어른스러운 행동을 하겠는가? 아이들의 수준은 미성숙한 단계이다. 그것은 모자라다가 아니라 아직 배우지 못했다는 것. 아이는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여쁘지만 때때로 내비치는 생떼라는 못난 감정 표출 방식은 어른으로서 감당하기 어렵다. 어른들은 미운 4살이라고 하지만 아이에게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미운 어른 살에 불과하다. 어느 날에는 부모는 참지 못하고 성난 감정을 아이에게 고스란히 내비친다.  아이에게 그 감정은 공포가 아니다. 아이의 전지적 시점으로 본다면 그것은 관심이고 그것이 자신이 간절한 소망. 엄마의 사랑에 대한 목표를 가학적 쾌감으로 이룬 순간이다.


케빈에게 있어 동생이라는 존재는 경쟁자였다. 첫째는 둘째가 태어나서 부모의 관심에서 외면당할 때 왕관을 뺏긴 왕위의 고통이라고 했다. 엄마란 이름은 아흔여섯의 할머니도 애타게 찾는 영원한 그리움이듯이 < 어머니 홍영녀 딸 화 안 나, 엄마 나 또 올게 > 케빈에게도 엄마의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공간이었고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공기였을 것이다. 케빈의 세상은 그렇게나 좁았다.  그래서  가득 찬 공간의 외로움을 먹어 치우며 살아낸 건 아니었을까?


케빈의 미운 짓은 분리불안 장애로 일어난 후유증일까? 케빈에게 그녀의 사랑은, 배우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갈라져버렸던 원초적 갈구를 느끼는 거였을 테니, 그것은 잃어버렸던 존재를 다시 찾으려는 사랑의 갈구였을지 모른다.  원자를 둘로 쪼갠 후 몇 백 킬로미터를 떨어뜨려 놓아도 애초에 한 몸이었던 둘은 한 <같은> 자극에 똑같이 반응한다 양자물리학은 이것을 “거리 초월 현상”이라 한다. 


엄만 나한테 참 너그러워. 살인을 해도 봐주겠어. 더 엄하게 해 엄마.

엄마는 ”안돼“ 라고 할 만큼 강하지 못했죠.  - Film. 에이미 -


"사랑을 발굴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요? " 전혀 어렵지 않아요. 그냥 알아보면 되니까." 

아이는 배우지 않아도 그게 옳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 있다. 


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는다. 그저 본능적으로 느낀다.



https// : 당신이 나를 괴물로 낳았던가? 굶겨진 사랑이 나를 괴물로 만들었나? com


케빈은 사이코 패스로 태어났을까? 에바의 영향으로 만들어졌을까? 

아내를 이해 못 하고 치부를 덧씌우려는 남편의 잘못일까? 


알쓸인잡, "사이코패스, 뇌과학자 편"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유영철을 계기로 쓰이기 시작한 단어. "사이코 패스" 그래서 요즘에는 흉악한 범죄자 = 사이코 패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문가들은 그들을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한 종류로 본다. 사이코 패스의 특징은 낮은 도덕성과 공감 능력의 결여가 있는 사람. 범죄자를 대상으로 하는 성격장애 심리 도구인  "PCL-R"  있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진단법은 아니다. 사이코패스는 성향일 뿐 사이코패스라고 다 범죄자로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뇌신경 과학자 제임스 팰런. 그는 자신이 사이코패스라고 했다. 그렇다면 본인이 사이코 패스라는 걸 어떻게 알게 됐는가? 그는 알츠하이머병을 연구를 하는 도중에 사이코패스의 뇌 스캔을 통해 공통 패턴을 연구해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는 의뢰를 승낙하게 되면서 사이코패스 연구를 하는 동시에 교차적으로 치매연구를 하는데 뇌를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블라인드로 실험해야 했다. 그래서  내 사진에는 번호로만 분류해 두었는데  어느 날 치매  연구증 샘플 중에서 아주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뇌를 발견한다. 그는 단순히 사이코 패스 뇌 사진이 섞여 들어온 거라 생각해서 연구원에게 이 샘플이 누구 것이냐 물었는데,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교수님 뇌 사진입니다." 


뇌는 유전적 성향에서 드러나는 게 일반적이기에 계보학 <혈통을 추적하는 가계도>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한다.  자신의 몇몇 조상이 살인자였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가족력으로도 유전적 성향이 확인이 된 것이다.


그는 명백하게 공감 능력이 낮은 뇌와 공격적인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근데 왜 그는 사이코 패스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까? 사이코 패스 범죄자들 가정환경을 조사한 결과. 70% 이상이 아동학대 피해자였다. 결국 가장 큰 차이는 가정환경.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사이코 패스가 될 위험성이 높은 조건의 세 다리 이론을 발표한다.  그 조건은 1. 뇌 기능 2. 유전 3. 성장환경_ 하지만, 이것은 이론 <패턴> 일뿐 세 조건을 갖췄다고 다 사이코패스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환경을 통해 현재를 이해한다. 어릴 적 어머니는 바느질, 요리 새로운 것을 다정히 가르쳐 주셨고 아버지는 낚시, 경마장  등 다양한  공동체 경험을 시켜주셨다. 학교 선생님은 연극. 음악. 스포츠 등 사회 활동에 참여시켰다. 무엇보다 삼촌을 통해 양로원, 장애인 수용시설 등 봉사활동을 자주 다녔는데 그 이후 커서도 장애인들을 보면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결국, 어릴 적 좋은 어른들 <좋은 환경>이 이끌어준 경험 덕분에 조건반사적인 공감 능력을 기른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친사회적 사이코 패스, 운 좋은 사이코패스다. 


https// :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X) 책임(O)이 있다. com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픽션에 나오는 캐릭터. 에바의 모성애 결핍을 치부하거나, 케빈의 사이코 패스적 행동을 통해 결과적 사건으로 괴물로 규정하거나, 이해와 공감이 결여된 남편상을 아울러  단지 소수를 "비정상"이라  비난하기 위한 필요로서 소비하는 것이 지배적인 상황과 하나의 사건은 결과론으로 결부시키는 건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남녀가 나누는 경이로운 몸짓에는 사랑보다 무거운 책임이 공존한다는 걸 너무 모르고 사는 건 아닐까? 부모가 된다는 건, 통증으로 낳아 사랑으로 키우기보다 눈물마저 그을리는 희생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 그건 어쩌면 이방인으로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이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 일이라서 그런 건 아닌지? 아이를 키운다는 건, 사랑을 듬뿍 주기를 생각하기보다 사랑보다 버거운 희생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은 아닌지?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보이는 시야의 객관적 상황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적 감정을 어떻게 어루만지며 살아가야 하는지?


한시라도 부모의 사랑을 들이마시지 못하면 죽음을 느낄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이 아이라는 것을 어떻게 잊지 않을 수 있는지? 아이의 이해할 수 없는 일차원적 행동을 부모 시점이 아닌 아이의 전지적 시점으로 그 아이의 마음을 바라보기 위해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내 아이가 사이코 패스의 성향을 가졌든지 아니든지 아이들의 어릴 적 환경이 아이에게 어떤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어떻게 자각하고 살아야 하는지? 내가 선택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최악의 상황까지 내 책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함께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항상 선택의 최악을 먼저 체감하기 위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결국, 인간은 흘러  "관계"  다다른다. 세상에 혼자는 없다. 모든 사람은 어떠한 형태로든 이어져 있다.  

결국. 혼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 (X) 책임 (O)이 있다. 


피식 대학의 서준 엄마. 가상의 아들을 보여줄 수 없으니 서준이 시점으로 자식에게 대하는 일상의 모습이 어떻게 비치는지 담긴 영상을 올렸다. 놀라운 점은 재밌자고 만들었는데  영상을 보고 사람들이 운다는 것. 눈물의 의미는 두 가지였는데, 엄마의 품을 떠난 성인들이 어릴 적 시절로 돌아가 젊은 엄마를 마주할 때 그리움과 반가움이 차올라서 울었고, 엄마의 입장에서 보니 아이에게 자신이 세상의 전부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울었다고...


https// : 인간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존재인지 이해하려는 태도. com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 즉. 인간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존재인지 이해하려는 태도가 가장 우선시로 되어야 한다는 걸 영화로서 대변한다. "케빈에 대하여"라는 픽션을 통해 모든 관계를 염두에 두기에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최악의 현재를 자각시켜 주면서 내일의 태도를 비추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사랑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사실은. 내가 선택한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 태도만이 관계를 지속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우연으로 태어난 나의 인연. 나의 이기심을 뚫지 못했다는 이유로 늘 새로운 절망을 받은 사람. 

내가, 나를 버리는 순간마다 당신을 버려도 혼내지 아니하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며 파랗게 미소 짓는 사람. 

용서받을 수 없는 나의  끔찍한 죄악을 맹세하지도 않고 자신을 버리는 삶으로 홀로 증명하는 사람.  

끝내 그대는 행동을 통해 사랑을,  눈빛을 통해 내가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인 양 느끼게 한다. 

정말이지 죽어버린 심장으로 병들어 죽어도 애도조차 핑계 댈 수 없는 사람이다. 



https// : 사람은 누구나 손길이 필요하다. com


어언 2년이 흘렀다. 엄마는 반드시 묻고 싶었다. 궁금한 마음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고 이제는 시간이 되었다. 엄마는 아들에게 질문을 구걸하지만 무심하게 건네는 아들의 답은 우르르 무너트려 버린다. 그것은 사무치게 쌓아 올린 마음이었다. 그렇다. 하나의 방향으로 상실되는 사랑은 대체로 한없이 불쌍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더 이상 물음을 더하거나 다그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 기어코 아들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려 아들을 안아준다. 그 순간 엄마는 아들에게 일렁이던 떨림이 조금씩 사그라들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엄마 : 난 좋은 엄마가 아니었어.

아들 : 그래도 엄마잖아.  

엄마 : 엄마지...  - film,  Room- 


환상의 안개가 걷히면 진실의 바닥이 드러난다. 케빈은 엄마의 사랑을 사려고 절망을 모았다. 엄마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키웠다며 살아왔지만 현실은 아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랐다. 비극이 일어나고 나서야 자신이 정말로 무지한 상태로 살아왔다는 걸 깨달을 때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가 된다는 건 = 아이를 키운다는 건] 우선적으로 아이를 이해해야 하는 일이지만 절대적으로는 아이를 수용 <받아들임> 해야 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부모로서 자식을 대할 때  왜? 수용 <받아들임>이 출발선이 되어야만 한다고 묻는다면, 아이는 부모에게 무엇을 주기 위한 자질이나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으며, 아이는 그저 존재함으로써 사랑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고, 그 무엇보다 부모와 자식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 없는 타인으로 살아가는 참혹한 비극을 막기 위함이다.


에바가 엄마로서 보여준 행동은 이해가 아닌 수용 <받아들임>이다. 이해하는 것과 수용 <받아들임>에는 엄격한 차이가 있다. 부모는 자식이 처음 태어났을 때 마치 분신처럼 각별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마다 “저게, 누구 뱃속에서 나왔는지 몰라” 의구심이 들기 마련이고 사랑으로만 건네는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않고 이기적인 행동으로 받아칠 때면 지구 반대편에 살던 이방인처럼 낯설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어떤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면 “아이고 내 새끼”가 아니라 “만나서 반갑다.”라고 말한다. 아이를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의 인연 <인격체>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는 각각 하나의 인격체로서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상처를 주며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족이라고 부른다.  <어른들도 한때는 아이였다.> 결국, 사람은 누구나 손길이 필요하다. 


* 흑인 아이를 입양한 백인 아빠와 아들의 대화

백인 아버지 : 난 너에게서 색깔이 보이지 않아. 내 아들이 보여.

   흑인 아들 : 그럼 나를 못 보는 거예요, 아빠.   - drama, This Is Us-



https// : 진실은 정답이 아니다. com


에바 : 왜 저런 걸 <음란물>을 갖고 있니?

케빈 : 모으는 거야.


에바 : 왜 모으는 건데?

케빈 : 이유 없어. 그게 이유야.


케빈의 답은 사이코패스의 궤변일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케빈이 아니다. 사랑하는 자식이지만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내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진실은 정답이 아니다." 케빈은 자신의 욕망을 모르고 아이들은 욕망의 목적 <이유>을 모른다. 아이들에게 욕망은 그저 수단으로 이용할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저 장난감이 왜 필요한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지금 저 장난감이 내 손에 있었으면 좋겠는걸. 그렇다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쯤에서 시작이다. 사줘. 사줘. 사줘.  소리 지르기. 생떼 드러눕기.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아이에게 들린 장난감은 얼마 안 가 아이의 관심에서 벗어난다. 아이들에게 욕망은 가득 차 있을 때는 조용하게 만들지만 부족하게 느껴질 때는 예외 없이 소란스럽게 한다.  

 

아이들은 관심이 필요하면 이유도 없이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행동으로 대신 말하는 성향이 있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를 괴롭히고 여자아이가 화를 내면 남자아이는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여자아이가 화를 냈다는 사실보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남자아이의 입장에서는 그저 자신의 감정을 알리고 싶은 것이다. 


문제는 욕망이 수단으로만 이용될 때 상대방의 감정을 공감하는 능력이 무지하다는 것. 이렇듯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니 그 행동 자체를 진심으로 보면 안 된다. 아이는 엄마를 괴롭히는 게 아니다. 엄마 곁으로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아이의 미운 행동 속에는 

" 나를  혼자 두지 말아요. 사랑받고 싶어요. "라는 말이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로 아이가 미운 짓을 한다면 화를 낼 상황이 아니라 책임감을 느낄 시간이지 않을까? 


https// : 사랑하는 당신에게 손을 대었네. com


Q. 슬하에 아들을 둔 엄마들에게 물었다. 아들을 키우는 게 힘들다고 느끼십니까?  86% 

Q. 아들을 키우는 게 힘들어서 우울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습니까?  84%


엄마가 아들을 키우는데 이토록 힘겨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아들과 딸은 명백히 다르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면 딸은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 괜찮아”라며 엄마 걱정을 한다. 그때, 아들은 무엇을 하고 있냐? 아들은 자전거로 달려가서 자전거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일으켜 세우고 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참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의 사건으로 아들이 딸보다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아들은 억울하다.


남자아이는 태어날 때 공간 감각. 공간 지각. 논리적 사고. 시각적 능력을 타고나고 여자아이는 언어적 능력, 감정을 읽는 공감 능력. 청각적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즉.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키운다는 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대변한다. 자전거 상황은 딸에게 특출 난 능력을 발휘할 순간이었다. 만약, 엄마가 넘어진 상황이 아니라 길을 찾는 상황이라면 딸의 공감이 아니라 아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들은 딸에게 비교당할 때마다 남자라는 성별로 태어나 엄마의 서운함을 감당해야 하는 대가는 너무 억울하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잘못이 아니라 본성일 테니.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신경다발을 노량이라고 한다. 딸은 여러 가지 과제를 한꺼번에 과제를 수행하는 건 어렵지 않게 생각한다. 그에 반해 아들은 한 번에 여러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뇌량이 아들보다 넓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sbs 스페셜 : 속 터지는 엄마 억울한 아들-


아들이 엄마의 손을 놓쳐서 집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방향을 잃었다. 

길을 잃은 상황 속에서 정체 모를 불안함과 세상에 혼자라는 공포감이 아이를 짓누른다. 

엄마가 그렁그렁 맺혀있는 아이의 눈으로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기에 단 한 걸음도 내 디딜 수가 없다. 

아이는 이내  주저앉아 목이 메어 엉엉 울었다. 마치, 아이의 눈에서 엄마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https// : 정말 몰랐어요. 제가 얼마나 아들을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com


인간은 기본적으로 실수를 하며 살아간다. 인생은 안개 길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실수는 문을 노크하고 들어오는 게 아니라 문을 부수고 들어온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게 아니다. 방법을 몰랐던 것이고 멈추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야만 앞서갈 수 있는 상황이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오늘 일어날 일은 과거 무심히 보낸 시간의 대가이다. 그리하여 내일을 마주하기 위해 내가 번번이 저질렀던 사랑의 무례함을 과거와 의논할 시간이다. 후회는 아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아지기 위함이며 위대함은 반성에서 출발한다. 인생은 1분마다 인생을 바꿀 기회가 찾아온다고 했다. 그렇다. 무언가 다시 시작하기에 가장 완벽한 순간은 지금이다. 


사랑의 첫걸음은 그 사람이 나와 명백히 다르다는 것 이해하는 것. 그 다름이 무엇인지 공감하려는 태도를 가지는 것.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우선시하는 것.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을 배울 때 사랑을 주는 것과 사랑을 받는 법을 알게 될 거라고 믿는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말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도 보람 없이 말은 더 심하게 앓았고,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까지 절게 되었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정말 몰랐어요. 제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Q. 세상에서 바람둥이로 가장 유명한 남자는? A. 카사노바. 카사노바가 여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 그의 이름은 그저 바람둥이라는 형용사로 소비되지만 그가 카사노바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여성의 마음을 어떻게 쟁취할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사노바가 어느 날 밤 술집에 들어갔다가 아름다운 여배우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그녀에게 흥미로운 특징이 있었는데 R자가 들어간 단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카사노바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 3일 밤낮으로 극본을 쓴다. 이 연극에서 특별한 특징이 있었다. R이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것. 그는 여배우에게 연극을 선보이고 여성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카사노바는 이렇게 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가 언어 치료비를 낼게요. R자가 들어가지 않는 연극보다 언어치료가 필요한 여배우에게 실용적으로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는 핵심은 극본에 있었다. 왜 그렇까? 언어 치료를 제공한다는 말은, 당신은 문제가 있습니다. 고칠 필요가 있어요. 일이 해결된 후에 사귀겠습니다.라는 뜻이다. 


그에 반해,  카사노바의 극본의 뜻은  

"아무것도 바꾸지 마세요! 당신은 있는 그대로 완벽해요." 

저의 역할은 "당신의 완벽함을 세상이 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첫 만남에 매력적인 사람이 되는 유혹의 심리학, 이상한 리뷰의 앨리스 -



https// : 나는 가해자 엄마입니다. com


"Elephant in the room" 방 안의 코끼리는 영국의 비유적 표현으로 무시하거나, 말을 꺼내지 않고 지나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을 일컫는다. 이 관용표현은 아무도 거론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분명한 문제나 위험을 가리킬 때도 사용된다


엘리펀트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날씨는 화창하고 공기는 조용하고 조금은 나릇 한 일상이 이었다. 불현듯 두 학생이 학교로 들어서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람들을 향해 총기를  발악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벌이는 광란의 질주 뒤로 일어나는 괴질 한 소음 속에 애처로운 비명이 일렁인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의 엄마가 사건이 일어난 후 17년 후 출판한 책이 나온다. 그녀는 자신 책임을 변명하거나 아들의 죄를 항변하거나 옹호하기 위해서 애쓰지 않았다. 책 속에는 아들이 어떻게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비극의 물음을 직면한 무기력함이 담겨 있고 아들이 저지른 추악한 일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 그리고 반성과 속죄가 담긴 참회록에 가깝다.


그녀가 책을 출판한 이유는 자신의 아들과 같은 아이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내 아이를 끝까지 책임지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들이 저지른  모든 결과가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아들에게 나쁜 엄마가 아니었고 그의 아버지는 항상 아들에게 친절했다. 그녀는 내 아이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그리하여 부모로서 아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의 죄를 회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아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에 너덜너덜 해진 마음으로 아들의 죄를 더 힘껏 껴안았다. 그녀는 오늘도 신념을 가지며 살리지 못한 사람을 위한 반성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마음을 안고 누군가의 자식들이 스스로 포기하려는 자살 & 비극적 타살을 예방하는 활동을 통해 오늘도 책임을 지는 삶을 살고 있다.


부모가 된다는 것. 그것은 아이를 사랑만으로 키우는 것이 절. 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통감한다. 그 누구도 부모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조차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 숙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된다. 


그렇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필수조건이지만 책임은 불가피한 조건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왜? 그녀가 틀렸다면 모두가 틀릴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리즈. 아기를 낳는 건, 얼굴에 문신하는 거야. 

확신이 서야 해.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https// : 되돌이표로 울려 되는 애처로운 비명 소리. com


뉴스를 보면 충격적 사건을 다룰 때 시작보다 결과라는 초점을 맞춰 편집되어 있는 것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은 심리적으로 나쁜 사건에 흥미를 이끌기 때문에 뉴스의 대부분은 Negative 사건을 더 강력하게 편집하여 송출한다. 전달의 목적보다 뉴스의 생존에 우선순위를 두는 아이러니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 >


가짜 뉴스에 속는 이유는 의도된 편집된 장면만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보이는 것만으로 결과론적 해석을 한다면 죽음 사건에 연루되어 있는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현실이지만 동시에 우리는 생태계라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해  식욕을 삼켜야 하는 것은 동물만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또한 인간도 100% 동물이다. 그리고 식물도 살아있다. 


그런 관점으로, 전체를 맥락이 아닌 편집적으로 본다면, 엄마로서 에바는 모성애가 결핍된 여자이고 아이로서 케빈은 사이코패스에 불과하다. 하지만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결코 문제를 풀 수 없다. 콜럼바인 총격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총기사건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공간은 다르지만 군대에서 일어나는 총기난사 건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어느 아버지의 인터뷰처럼 군대 가서 참으면 윤 일병이 되는 거고 못 참으면 임 병장이 되는 현실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가 여전히 되풀이되는 현재에서 비극적 참사를 그저 괴물이 저지른 사건이라는 1차원적인 시각은 과정을 변질시킨다. 총기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의 외면적 결과가 아닌 내면적 과정을 들여다보면 공통점은 관계에 있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이해할 수 있다. 군대가 지옥처럼 느껴지는 건 죽을 거 같은 훈련이 아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 때문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뒤틀린 관계로 관통된다.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것은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뭔가를 확실히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 마크 트웨인 > 누군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플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실존적 자아가 타인에게 침해당하는 순간 약자가 된다. 약한 자는 작은 충격에도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감정이 조금씩 쌓여가다 구속된 감정이 극에 달하면 그의 모든 관계에서 타인은 지옥이 된다. 그는 생각한다. 지옥에 적응하려면 괴물이 돼야 한다. 이런 미친 생각을 한다는 건 제정신이 뚫고 나가 망각에 이른 상태다. 


어쩌면 그들은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살기 싫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들을 이해해 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명백히 지금도 누군가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때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힘들다. 결국, 사람을 죽이는 총기 문제만큼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뒤틀린 관계 문제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지 모른다. 


결과를 해결하기 급급한 방안은 죄를 저지를 사람을 벌하면 된다. 그렇지만 반복되는 사건 속에 불안감을 해소하려 그저 대상에게 돌려 문제를 해소하려 한다면 평생 더부룩함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총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의 결과를 마무리 짓기 위해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마침표로 사용한다면, 

같은 과정이 되돌이표로 울려 되는 애처로운 비명 소리를 누가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사회적 자살을 하면서 어떠한 대상을 미워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절망까지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블랙박스의 영상은 24시간 돌아간다. 하지만 그 영상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돌려서 확인한다." 


https// : Epilogue. com


자유를 갈망하며 여행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행복한 나날을 살아가던 에바. 어느 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뜻하지 않게 임신으로 인해 에바는 엄마라는 이름을 원치 않았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자유를 앗아갔다. 그래서 케빈은 태어날 태부터 사랑받아야 할 대상이 아닌 자유를 뺏어간 대상이 돼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녀도 에바라는 이름을 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행복한 나날들을 포기하고 그녀의 방식대로 케빈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엄마라는 이름은 너무 버거운 것이었다. 남자를 사랑하는 법은 알았지만 아이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그녀였기에... 적어도 그녀에게는 그랬던 것 같다


아이들은 관심이 필요하면 이유도 없이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행동으로 대신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지 그 행동 자체를 진심으로 보면 안 된다. 안타깝게 에바는 그것을 알리가 없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아이라면 더더욱 그래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가 끝나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가 문득 에바가 케빈을 병원에 데려가 의사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는 장면이 생각이 났다. 그때 케빈을 병원으로 데려가 검사를 받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번이라도 케빈의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하여 진심으로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생각해 봤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사무치게 들었다 


그렇다고 에바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에바는 준비되지 않은 엄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바는 피해자들 가족으로부터 온갖 험한 꼴들을 당하면서도 아들의 책임까지 다 감수하며 케빈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케빈 또한 어머니를 사랑하려고 했다. 다만, 서로의 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에바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하여 케빈에게 묻는다. 시간은 충분했다고 너한테서 직접 듣고 싶다고 "왜 그랬었냐고" 케빈은 에바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지만 에바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들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싸 안아 주었다. 그로 인해 에바는 뒤늦게 아들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고, 케빈은 엄마가 자신을 사랑했었다는 걸 안타깝지만 뒤늦게 느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지만 영화는 엄마라는 관점으로 비치는 영화이다. 그래서 결국 끝까지 케빈의 행동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라는 이름은 에바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케빈 또한 에바(엄마)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케빈은 엄마를 사랑했던 것일까?

케빈은 엄마를 증오했던 것일까?

에바는 원치 않은 아들이 사랑스러웠을까?

에바는 그런 아들은 사랑만으로 키울 수 있었을까?

케빈은 사이코 패스라는 특수성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케빈은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이코 패스가 됐을까?


"케빈에 대하여"는 모성애는 본능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확인시켜 준다. 또한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할 여자라면 모성애에 대하여 단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물음이라 말한다. 그리고 아빠라는 이름으로 살아가할 남자라면 반드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 관계로 이어져 있고,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아이들을 마주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그렇다. 결국, 우린 "케빈에 대하여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보라. 관람이 아니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끝나면 먹먹함이 한동안 사그라들지 않아 꼼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끔찍하고 참혹한 충격이 반복적으로 떠오르는 명료함은 정신적 트라우마가 아니라 현실적 인계철선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때때로 끔찍함이 떠오르고 들뜬 비위가 가라앉을 때마다 잊히지 않는 참혹함 덕분에 절대로 잊지 말고 살아야 할 진실을 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총기사건을 다룬 또 다른 이야기


엘리펀트 (Elephant, 2004)  

굿 월 헌팅의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작품으로 콜롬바임 총격 사건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영화. 


러덜리스 (Rudderless, 2014) 

총기사건이 일어난 후 가해자 아버지 일상에 정처 없이 떠도는 파멸적 선율이 담겨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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