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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Spir e Dition X Feb 27. 2024

키즈 리턴® 실패가 끝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 실패는 "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https// : "감독은 허물이 벗겨진 청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com


키타노 다케시 <감독>는 어느 날 크게 사고를 당했다. 그는 병상에 누워 "내 인생 70%는 끝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모티브 삼아 청춘이라는 소재와 매치업 시켜 키즈리턴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감독이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청춘을 대비시켜 영화를 만든 이유는 무의식적으로 청춘의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에겐 꿈이 없었다” 19살이 되었지만 나에게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저 매일밤 태수와 어울려 다니면서 툭하면 싸움질을 벌렸다. 그때는 그게 전부였다. <비트> 인생을 선택하라. 직업을 선택하라. 가족을 선택하라 TV와 세탁기도 선택하고 미래를 선택하라. 그렌데 내가 왜 이따위 것들을 선택을 해야 하지?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로 했다. <트레인 스포팅>


누구나 청춘의 시절에 방황과 방종 그리고 혼돈의 시기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이 아니라 뒤통수에서 날아오는 돌이기 때문이다. 고약한 일이지만 하나의 사건은 동시대에 일어난 한다. 그리하여, 감독은 "허물이 벗겨진 청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그것은 어딘가에나 발에 치이는 허황된 희망이 아니라 현실적 직시감을 선서한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끝나버린 70% 때문에 남겨진 30%를 얼마나 놓치고 살아왔는가?!


작품의 운명은 인간의 운명만큼 잔인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에서 혹독하게 등 뒤로 밀려난다. 대부분 기억의 창고 구석진 자리에 자리 잡아 먼지 속에 덮혀져 사라지는 운명을 타고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키즈 리턴 <작품>을 되찾게 되는 이유는 과거의 계절이 현재의 계절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결국. 키즈리턴은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청춘을 통해서 "과거로 돌아가야만 앞서갈 수 있는 상황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의미로 키즈리턴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야를 단면적 관점이 아니라 입체적 관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https// : Prologue. com


안개가 사그라들면 희미한 것들이 선명해진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나는 물었다. 마짱. "우리는 이제 끝난 건가?!" 그는 답했다. 그의 말은 명료하거나 명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진실되었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기억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래야 되는 이유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무엇이 될 거라 믿고 있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말이다. 생각이 없다는 건 무식하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테니까.  뭐가 되고 싶냐? 난 모델이 되고 싶어. 별 볼 일 없을수록 꿈은 크게. 패션모델?! 아니 프라 모델. 그 시절 나에겐 샴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마짱 <마사루>이 있었다. 우리가 하는 거라곤 뭐. 뻔하다. 동급생들 돈을 갈취하고 수업 땡땡이치며 옥상에 올라가 무료한 시간을 죽이는 것. 왜 이 딴짓을 하냐고?! 이유 따위가 있을 리가 없잖아! 


사건은 늘 불현듯 찾아온다. 어느 날, 우리가 돈을 갈취했던 녀석 중 한 명이 복싱을 하는 친구 데려왔다. 젠장~ 마짱이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마짱은 복싱을 배워 복수하자고 했다. 나는 그저 알았다고 했다. 복싱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마짱이 나에게 스파링을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저 알았다고 했다. 이런. 마짱이 내 앞에 쓰러져 있다. 내가 마짱을 쓰러트린 건가?! 마짱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미안함과 알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난다. 마짱은 그날 체육관을 떠나기 전 나에게 말했다. 네가 챔피언이 되고 내가 두목이 되면 다시 만나자. 항상 붙어 다니는 마짱이 없는 복싱은 재미가 없었다. 난 복싱을 그만두려 했지만 관장은 한마디로 마음을 바꿨다. "원한다면 그만둬도 된다. 하지만 친구 때문에 그만두는 건 안돼. 권투는 단체경기가 아니다. " 난 그날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권투를 대했고 어느 날 내 손에 신인왕 트로피가 들려있었다. 마짱이 체육관으로 찾아왔다. 그의 모습은 예전과 사뭇 달라져 있었다. 고급 외제차에 덩치들이 큰 부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마짱이 조직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거 같았다. 그 이후로 몇 번 마짱을 마주했지만 다른 길을 걷게 된 우리의 만남은 점점 적어졌고 어느 날부터 마짱을 보는 날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 만큼 흘렀다. 그래서 내가 챔피언이 됐냐고?! 아니. 난 지금 배달 중이다. 5번째 배달을 마치고 대문을 나서는 순간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인사하듯이 다가왔다. 마짱이었다. 마짱은 모습은 누군가 심하게 꾸겨버린 듯 망가져 있었다. 마짱은 불편해 보이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직도 권투해?! 나는 말했다. 그만뒀어. 마짱은?! 아무것도 안 해. 나는 물었다. 마짱. "우리는 이제 끝난 건가?!" 그는 답했다.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 그의 말은 명료하거나 명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진실되었다. 안개가 사그라들면 희미한 것들이 선명해진다. 하지만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이것은 "실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혹독한 청춘을 견뎌낸 우리의 이야기다"



https// : 청춘을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아이를 떠올리면 나는 꼭 울게 된다. com 


부푼 꿈을 가방에 챙겨 들뜬 설렘을 가득 안고 구름 위를 걷는 걸음으로 학교로 향하던 그날을 기억한다.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학교에 발을 디디는 그 순간 동심을 빼앗겨버리고 타자의 욕망을 습득해야만 하는 교육이 시작된다는 것을.... 학교는 배움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Curriculum : 학교에서 배우는 것 –김진표- 


▶ 1부 학 습 

chapter #01. 타인과 날 끊임없이 비교해 대는 법

chapter #02.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chapter #03.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 2부 적 응 

Step #01 동료가 되기 전에는 적 

Step #02 수많은 학칙과 악법 연필보다 주먹이 빠르다는 것 

Step #03 내가 가진 상상력을 굴복당하는 것 

Step #04 약자의 비굴함과 강자의 오만방자를 지켜보는 것 


▶ 3부 이야기 

Story #01 상처가 된 당신의 거짓말

Story #02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던 지난날 

Story #03 그럼에도 존경받기를 원하셨던 그 모습에 내가 배운 것

Story #04 닫힌 내 입과 억눌린 감정과 내게 짓밟혀 숨어버린 웃음까지 모두 다

Story #05 억눌렸던 모든 것들을 토해 저 위 하늘 향해 끝까지 외쳤던 날


학교는 지식 <배움>을 가르치는 곳만이 아니다. 그 공간에서 아이들이 교육받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환경에서는 아이들이 생존하는 법을 목격할 수도 있다. 어른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 너는 꿈이 뭐니?! 커서 무엇이 되고 싶어?! 대부분의 아이들의 꿈이 아니라 욕망을 답한다. 하지만, "꿈과 욕망은 명백히 다르다." 꿈에는 동사라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만, 욕망에는 명사라는 결과만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얻고 싶다".라는 것이다. 욕망은 이루고 싶은 것이 아니다.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즉. 과정이 없이 결과물이다. 그것이 없을 때, 채우지 못할 때 불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의 답은 꿈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욕망 쇼핑 목록이라고 부르는 것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꿈 <동사>에 대해 물으면 욕망 <명사>을 답하는 것일까?!

첫 <First> 번째는 꿈과 욕망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고

영 <Zero> 번째로는 아무도 그 차이를 알려준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많은 부모들이 간디를, 마더 테레사를 존경하라고 위인전을 읽혀요

그런데 아이들이 그런 삶을 살려는 기미만 보여도 기겁을 하죠.

- 고병헌, 성공회 대학 교육 학과 교수 -



https// : 욕망을 습득해야 환경에서 아이들은 과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com 


# 누가 너희더러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라든?

  다른 학생들 방해만 하지 말란 말이야. 수업에 안 들어와도 좋으니까


# 자퇴시키는 게 어떨까요?! 코미디언이라도 해 먹겠죠. 뭐. 

  코미디언은 아무나 하나요?




"청춘?!..." 가진 적도 없는 걸 그리워할 수는 없어... 


나는 태어나서 선생님이라 부를 만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살아생전 어른이라는 존재를 마주한 적이 없다. 선생님 그리고 어른. 그 둘은 나에게 마치 공룡 같았다. 어딘가에 기록되어 사실이라 부르지만 유니콘처럼 마주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단 한 사람이라도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어른이 없었다. 

교복, 두발 규제, 야간 학습 등등 학교에서 나열하는 규칙들은 학생들의 공부를 위함이라고 핑계를 대겠지만 창조성을 죽이는 환경을 만들어서 학생들의 개성을 죽이고 하나로 통일 시킬 때 통제권이 쉬워진다는 숨은 목적을 드러내지 않았고 선생님들은 자신만의 이득을 챙기면서 너희들을 위한다는 배려심까지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다. 


조금이라도 뒤처지거나 넘어지는 아이들을 다그치며 모르다는 학생들에게 무지를 교육하기보다 부끄러움이라고 학대했다. 그런 선생님들에게 학생들이 배우는 건 교육이 아니라 무지에 대한 부끄러운 상처를 수용하는 일이다. 그들은 더 높은 위치에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기보다 아이들의 등 뒤로 바짝 붙어서 오직 속도에 악을 쓰기에 바빴다. 배움을 통해 더해지는 건 지식이 아니었다. 친구가 늘어갈 때마다 비교 대상의 카운트 또한 올라간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푸는 건 벽에 가로막힌 것 같고 등 뒤로는 속도를 높이려는 고함소리는 더해져만 간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서태지와 아이들. 4번 트랙. 교실이데아 >


"선생님 저는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데요..." 높은 단상에 올라 지휘봉을 맘대로 휘두르는 선생“님”이라 불리기를 원하시는 사람이 말했다. 넌 공부도 못하는 놈이 아무 쓸모없는 소리를 해대고 있어. 잘 들어. 학생의 본분은 공부야. 너네들 지금 공부해야지 미래의 배우자 얼굴이 바뀌는 거야.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여기 봐! 이 공식부터 외워! 공부해! 학생의 의무는 공부하는 거야!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어! 성공하기 위해 이 공식을 외워! 더 빨리! 더 많이! 따라 잡히지 마! 따라잡아!


모든 사람은 천재다. 하지만 당신이 나무를 오르는 능력으로 물고기를 판단한다면, 물고기는 한평생 자신을 바보로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채찍질로 가득한 획일화된 고함을 거세게 지름으로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덮어버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어떠한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조차 앗아가 버린다. 그렇게... 표현의 장이 폐쇄되면서 발언한 권리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그렇게 아이들의 다양한 독창성은 죽이면서 일차원적인 성공의 공식 능력만을 살려나간다. "그곳에서 규칙은 법이었고 청춘 익사 사건의 증거물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새, 친구가 경쟁상대로 보이기 시작하고. “밝고 올라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 고함소리가 이명으로 느끼지는 순간 배우게 된다. 학교는 단지 배움을 교육을 받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 수업을 받는다고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지식은 경쟁을 위한 칼이라는 것. 학교에서 수업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학교라는 먹이사슬 환경에서 생존하는 게 더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 끝내 살아남아 졸업을 한다고 우리 모두가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 난 명백하게 깨우치게 됐다. 그들의 공식을 따라 살아간다면 평생을 동시대에 친구들과 경쟁 속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타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특출 난 인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을 직면한 순간. 나의 길은 벽으로 가로막아버렸고 그제야 나는 멈춰 섰다. 결국, 결과를 내지 못하면 처분되는 경주마처럼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학교는 교육을 가르치기보다 그저 공식을 주입시키는 것에 급급하다. 여전히 할아버지 시절의 교육 방식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손자에게 답습되는 획일화된 교육은 아이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가 다닌 학교는 배움의 환경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 끝내 스스로 독립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로봇에게 코드를 입력하는 것처럼 수많은 공식을 주입시킨다. 많이 넘어져 본 사람일수록 쉽게 일어선다.  반대로 넘어지지 않는 방법만을 배우면 결국에 일어서는 방법을 모르게 된다.  - 사이토 시계 타 <나를 위한 하루 선물> - 


빌어먹을... 

Navigation 목적지 <방향> 설정이 잘못됐는데 

아우토반에서 7000 RPM <속도>로 달려봐야 무슨 소용인가?! 


"나"답게 살아가야 하는 합당한 교육은 박탈당하면서 "남"들과 똑같아지는 일차원 삶의 공식을 주입받는 환경에서 말하는 삶은 성공하는 조건이지 그것이 행복한 삶은 아니다. "성공하는 삶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은 명백히 다르다." 아이들은 사회에 대한 본질과 시스템을 이해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독립된 존재로 키워진 것이 아니라 타인 <사회 규범, 규칙, 공식> = 그저 이미 누군가 정해진 규칙을 잘 따르는 아이로 교육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미래라는 문제에서 조차 "희망이 아닌 불안을 학습한다."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지식을 왜 배우는 걸까. 


이를테면 f(x+y)= f(x) + 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줄줄이 외게 하면서도 왜, 이별을 겪거나 극복한 개인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가. 지층의 구조를 놓고 수십 조항의 문제를 제출하면서도 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교육은 시키지 않는 것인가. 


아메바와 플랑크톤의 세포 구조를 떠들면서도 왜, 고통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는가. 남을 이기라고 말하기 전에 왜, 자신을 이기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영어나 불어의 문법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왜, 정작 모두가 듣고 살아야 할 말의 예절에는 소홀한 것인가. 왜 협력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을 가르치는가. 


말하자면 왜, 비교평가를 하는 것이며 너는 몇 점이냐 너는 몇 등이냐를 외치게 하는 것인가. 왜, 너는 무엇을 입었고 너는 어디를 나왔고 너는 어디를 다니고 있는가를 그토록 추궁하는가.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고, 왜 그토록 못을 박는가. 그토록 많은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왜이며, 그 조항들을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그냥 모두를 내버려 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냥 모두가 그 뒤를 쫓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러워할수록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누구이며, 보이지 않는 선두에서 하멜른의 피리를 부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드.  – 박민규-



https// : 내가 배운 것은 더럽게 생존하는 법이었다. com 


선배 : 훅이 쓸만한데... 이런 것도 해봐. 팔꿈치 치기야. 효과 만점이지. 반칙이지만 해볼 만해. 


선배 : 마셔. 

신지 : 못 마셔요. 

선배 : 마시라니까. 

신지 : 술 담배는 금물이잖아요. 

선배 : 상관없어. 일단 마시고 나중에 토하면 돼. 복서도 모델과 마찬가지야. 일단 먹고 토하는 거야. 


선배 : 안 마셔? 

신지 : 곧 시합이라서 

선배 : 강자는 항상 강자야. 너무 고지식하게 굴지 마. 

        술 끊는다고 약한 놈이 강해지냐? 강한 놈은 늘 강해. 먹어. 토하면 돼.


관장 : 상대가 나오면 발을 밟아. 상황이 불리해지면 팔이든 머리든 뭐든 사용해. 


코치 : 네가 먼저 발을 밟았어야지. 심판이 안 볼 때 팔꿈치로 치고 불리해지면 껴안아 


상사 : 몇백 대씩 파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밥값은 해야지! 밥버러지들 같으니, 창피하지도 않냐?


아이는 태어나는 동시에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엄마가 웃으면 아이는 웃는다. 아빠가 책을 읽으면 소년은 따라 읽는다. 친구가 가면 강남이든 어디든지 상관없이 따라간다. 우리가 가장 빨리 배우는 것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면 ”할 수 있다 “ 의지를 높일 것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설정을 하는 것이 성공 가능성이 확률적으로 높아진다.


내 곁에는 항상 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가거나 뺏어가거나 이용하려는 놈들이 바퀴벌레처럼 득실득실거렸어. 그들의 입은 모든 것이 나를 위한 방향이라고 지껄이면서 손가락의 끝은 항상 내가 아닌 자신을 향해 있었지. 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찰나의 빛이라도 비칠 때 드러나는 <겨우 나라고 느낄 수 있는> 그림자까지 먹혀버린 것과 다르지 않았어. 


나는 어리석은 아이였지만, 나쁜 아이는 아이였다. 방향을 설정하는데 한없이 연약했을 뿐. 속도는 그 친구들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선로를 벗어난 끝자락에 도착한 곳에는 자유와 쾌락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세계의 하늘에는 북극성이 보이지 않았다. 신뢰할 만한 어른이 없었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올바른지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뒷걸음치기에 바빴는지 모른다. 그래, 어쩌면... 그 순간마다 난 조금씩 나를 잃어버렸던 건지도 몰라. 그랬다. 청춘이라는 시절에 정작 나는 없었다. 내가 그곳에서 보고 배운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 아니라 더럽게 생존하는 법이었으니까."



https// : 청춘에 남겨진 그 아이는 혼자였다. 어제는 그때를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다. com


끼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 자리로 아이들이 모인다. 그다음이 되면 자연스레 아지트가 만들어진다. 그곳은 소음처럼 들리는 어른들의 목소리를 막아준다. 그리고 하는 거라곤 규칙 & 규율이라는 ”넘지 마세요 “ 적혀 있는 창을 쉴 새 없이 넘나드는 것.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숨쉬기 방법. 그렇게 그 짓을 매일 반복하는 것.


그들은 꼭 후회할 짓만 골라서 한다. 어쩌면 자신이 불나방으로 태어났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속으로 뛰어드는 게 유일한 삶의 목적인 것처럼. 자신을 나쁘게 할수록 느껴지는 고통에서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라 믿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앞에서 보기에는 그저,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자유를 얻을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지 못했다. 그것이 동시에 자신을 잃어가는 길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학교라는 붕괴된 시스템, 여전히 매해 가 되면 폐허가 돼버린 공간으로 아이들이 발을 딛는다. 규칙을 잘 따르는 아이들을 활용하고 규율에서 벗어나는 아이들을 몰아세우며 끝자락에 밀어내어 끝내 절벽으로 아이들은 내친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한마음으로 비는 하나의 소원은 그저 일찍 어른이 되고픈 마음뿐이다. 불합리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건 "적응"이지만 숨 막히는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건 "탈출" 뿐이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싶은 목적에는 청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숨 막히는 환경에서 자유롭기 위함이다


그들은 겉으로 강한 척하는 것에 부단히 도 애를 쓰지만 속으로는 외로움과 두려움으로 불안에 벌벌 떨고 있다. 그렇게 자신을 마주하는 추위를 반복하는 혹독한 겨울이라는 계절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가장 잘하는 건 그걸 내색하지 않는 일.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배웠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잡아먹힌다는 것을..."대부분의 비행 청소년들이라 불리는 아이들은 애써 길바닥의 삶을 선택하는 건 아니다. 현실이라는 미로에서 길을 잃어 궁지에 몰린 것이다.


하와이 군도 북서쪽 끝에 있는 작은 카우아이 섬. <쥐라기 공원>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섬은 한때 지옥의 섬이라 불리는 곳이었습니다. 다수의 주민이 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정신질환자였고 청소년들은 그런 어른들을 보고 배우며 똑같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카우아이 섬의 종단연구'라는 것을 시작했습니다.


1955년에 태어난 신생아 833명이 30세 성인이 될 때까지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는, 매우 큰 규모의 프로젝트였습니다. 많은 학자의 예상은 이러했습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인생에 잘 적응하지 못해 비행청소년이 되거나 범죄자, 중독자의 삶을 살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자 에미 워너 교수는 833명 중, 고아나 범죄자의 자녀 등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201명을 따로 정해 그들의 성장과정을 집중적으로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3분의 1에 해당하는 아이들에게 뜻밖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학교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등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보다 더 모범적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에미 워너 교수는 이런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했습니다. 조사 결과 이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끝까지 자기편이 되어 믿어주고, 공감해 주고, 응원해 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


잘 자란 아이들 주변에서 어김없이 발견된 존재는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와 사랑을 베푸는 어른이 최소 한 명은 있었다 [의지할 수 없는 부모 대신 조부모, 친척, 성직자, 선생님 등이 그 역할을 해 주었다. 언제든 내 편이 되어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가 <회복탄력성 : 어떠한 환경과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력> "삶의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힘의 원동력이 되는 속성이 되는 것이다"



데인저 :  물어볼 게 있는 데 좀 엉뚱한 거라서...

스크랩 <코치> : 엉뚱한 거면 어때서


데인저 : 이 작은 구명으로 어떻게 얼음을 넣었죠? 계속 생각해 봤는데, 정말 모르겠어요.

스크랩 <코치> : 가자. 직접 보여 줄게.


데인저 : 정말요? 정말이에요?

스크랩 <코치> : 아무렴.


데인저 : 그리고 전 시합에 나가면 안 될까요?

스크랩 <코치> : 되고 말고. - Million Dollar Baby -


누군가에게는 장미 한 송이로도 정원이 될 수 있듯이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 믿어주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단 한 사람만 있다면 그리고 있었다면 그들은 타인이 준 상처에 스스로 상처를 더해 흉터를 만든 짓거리는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테고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아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애써,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짓거리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로, 어른들에게 그저 반항으로 여겨졌던 아이들의 목소리와 몸짓 속에는...


외딴길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 

불안과 슬픔이 뒤섞여 울컥거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아니었을까?!...


혼자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덩이 속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잡아달라고 외치는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https// : 실패가 끝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com


절망의 카운트 펀치_  Shinji : "우리는 이제 끝난 건가요?"

희망의 카운트 펀치_  Masaru :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


난 정말로 무지한 상태로 살아왔다. 에밀 아자르가 남긴 문장처럼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희색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 "실패 <과거>가 끝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 끝. 에서 마침표가 아니라 ” 다시, return “를 붙인다면 시작점이다. 실패는 과거의 결과가 아니다. 누구나 겪는 일생의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 실패의 뜻은 자신이 가망이 없는 존재라는 것은 아니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었다. 삶을 돌이켜 보면 “때로는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존재의 어떤 차원에서 보면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행동이었고 언젠가는 그것이 뒷걸음질이 아니라 앞으로 내디딘 발걸음이었다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 무탄트 메시지 -


권투선수들이 무엇보다 취약한 것은 바로 패배당하는 일이에요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창의적인 사람들과 함께 일하니까 훨씬 편했어요. 연예계 종사자들을 트레이닝하는 일을 시작했죠. 복싱 선수들과 달리 배우들은 실패에 열려 있어요 예술 쪽으로 오니까 실패는 당연한 거였어요  <승리한 패배자들 : 링을 싫어한 챔피언>


이번 생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다. 처음이기에 실패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넘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생은 실패라는 연속의 과정이며 넘어진 것이 아니라 넘어졌기에 다시 일어서는 배우는 것이다. 넘어져 생긴 흉터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훈장이 된다. 결국,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넘어졌느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나아가고 있는가?! 그 과정을 통해 우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며 실패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라는 것을 증명해 낸 나 자신이 존재하기에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믿게 해 줌으로써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과거나 아픔. 상처. 트라우마라고 느껴지는 건 피할 수 없고 그것이 아픔 통증 아쉬움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나에게도 과거의 아픔으로 바스러지던 신음으로 지새우던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남아있다.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공허함으로 지새우는 수많은 밤들. 그날들이 여전히 너무 선명해서 그건 쉽게 잊히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해야 할 건. 왜 넘어졌는가?! 가 아니고 일어난 상황 = 성공 & 실패. 왜 일어서서 나아가야 하는가?! 에 대한 이유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해석> 상황에 대해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태도>


삶은 선택의 연속이야. 새로울 게 없지. 가장 오래된 선택은 피해자가 되거나 안 되거나. 피해자가 될지 안 될지 결정해. Film. - The Accountant-


학생의 신분을 넘어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게 무뎌져간다고 느낄 나이의 청춘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냐?! 이제 젊은 시절은 다 끝난 거 같아." 어느새, 어른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리며 정신없이 달려온 순간을 뒤돌아보니 자신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구 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와 비교해 보면 내가 이루어놓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실패했다."라는 말과 "끝났다"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는 아직은 이르다. 박명수가 그런 말을 했던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늦은 때"라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유재석에게 이적이 이런 말을 했던가? 우리가 서있는 지금 이 시간이 "내가 살아온 날 중에 가장 나이 든 날일지 모르겠지만 남아있는 날 중에 가장 젊은 날이다."


"우리는 절대 늦지 않았다" "우리는 끝나지 않았다" 

"왜?" →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


4살 아들이 스마트폰 게임을 하다 "Fail"이 뜨자 좋아하더라.  그래서 "Fail"이 무슨 뜻인지 묻자 ”실패”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실패"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말했다. “다시 하는 거야” -이영아 교수, 국민대 게임 교육원 -

 


https// : 실패는 "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었다.  


가장 짙은 어둠은 해가 뜨기 직전이고 해는 반드시 뜨기 마련이다. 혹독한 계절이 가고 봄이 왔다. 동굴 속에 머물러 있는다면 봄이 찾아온들 추위는 가시질 않는다. 큰 쇠문을 여는 건 작은 열쇠였고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오면 광활한 하늘이 있었다. 과거가 끝났다. 나는 서둘러 지독했던 과거의 방문을 열고 빠져나왔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한동안 움츠려있던 마음이 눈을 떴다. 과거가 아닌 오늘이 되었다. 드디어 오늘을 마주하게 되었다. 봄의 계절이 불어왔다.


난 무지개를 사랑하게 되었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가 필요하다. 는 것을 이제는 안다. 비가 오지 않았으면 모를 일이었다... 이제야 과거를 뒤돌아보니 그 혼돈의 계절에서 나 자신에게조차 믿음을 가질 수 없어. 이대로 끝일 걸까?! 비탄의 물음을 던지는 순간에도 핏기가 서린 고통을 잇몸으로 욱여넣고 파도에 끊임없이 부서지는 처절한 마음을 끌어안은 체 끔찍한 고통을 딛고 일어나던 그 순간이 "내 청춘의 하이라이트였다."


나는 억울한 희생자가 아니다. 나는 끝까지 나 자신을 지켜낸 위대한 생존자였다. 그런 의미로 난 나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낀다. 인간의 무엇을 이뤄내는 것보다 누군가를 지키는 데서 오는 자부심이 더 강렬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생 동안 100% 주인으로 살 것이다. 타인의 영화 속에 스쳐 지나가는 24번째 행인이라는 배역의 엑스트라로 낭비할 시간이 나에게는 없다. 그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깡통처럼 텅 비어버린 말로, 내가 못난 존재라고 나를 정의할 수 있어도 그걸 받아들이는 건 내 선택에 달렸다.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 =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렸다.


이제 실패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된다. 괜찮다. 이미 내가 해온 일이다. 추락하면 올라갈 길을 찾으면 된다. 할 수 있다. 여태껏 내가 해왔던 일이다. 추락의 순간에 날개를 피워내는 새처럼 과거의 실패는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니다. 생명의 탄생처럼 귀하게 축하할 일이이었다. 두려움에 물러서던 뒷걸음질은 최대한 멀리뛰기 위한 충분한 거리가 되었고 날개 따위 피워낸 적 없다는 듯이 나의 처절한 추락 <실패>을 고대하기 시작한다.


"나는 너의 실패를 축하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1%의 가능성만 있다면 99%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과거 불가능할 것 같이 느껴지던 것들이 현재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 그래서 "실패는 과정을 통해서 더 성숙해진다"라는 믿음은 언제나 희망적이며 그것이 오늘을 바꿀 수 있는 답이 되기도 한다. 그 무엇보다.... 실패 <과거. 트라우마>는 "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 사실을 마주하는 일이 될 테니까...


나무에 앉은 새는 가지가 부러질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는 나무가 아니라 자신의 날개를 믿기 때문이다. 

-BOOK : 류시화,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 보지 않는다 -


요시모토 바나나가 비유한 것처럼, 삶을 견디어내거나, 버티어내거나, 알 수 없이 아무튼 살아보는 것. 겨우 삶을 유지하는 것. 마치, 느린 자살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을 살지 않기로 작정한다. 성공하기 위한 삶. 평생을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사는 것. 그딴 건 나에게 의미가 없다.


나에게 중요한 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난 나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온전히 살아있음으로 존재할 것임을 스스로에게 맹세한다. 카이렘. “BECOME WHO YOU ARE “


움츠러들었던 청춘이 혼돈의 계절의 시간을 견뎌 활짝 만개하는 곳.

일생의 가장 큰 혼돈의 시기는 청춘의 시절일지도 모른다. 

혼돈의 세계를 뚫고 세상으로 나온 모든 아이들에게 한 철학자가 말했다. 


꽃은 지려고 피는 것이 아니다. 꽃은 피려고 핀 것이다. 

그러니, 활짝 핀 아이들이여 스스로를 믿어라. 

그대들은 이미 그대로 온전한 존재이다



https// : Epilogue. com


영화는 나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난 그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그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재의 고통은 너무 가깝게 느껴지는데 미래에 희망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그 시절의 풍경들과 다르지 않았고 어둠 속에 갇혀 그림자마저 빼앗겨 버린 그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비열하게 추악하고 더럽게도 버려지지 않는, 한없이 위태롭고 치사한 마음까지 더해 우울한 시절에 기댈 것 없는 청춘의 통증이 내 등 뒤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의 사는 세계 속에 머물 때는 나와 한치도 다르지 않은 그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누군가의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가 건네는 말은 타인이 건네는 구원의 말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에게 건네는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장엄한 절경을 마주할 때나 영화를 바라볼 때나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건 같은 상황에서조차 매번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똑같은 것조차 낯설게 느끼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다.


그래서 나는 삶이 버겁게 느껴질 때마다 키즈리턴을 본다. 똑같은 영화. 똑같은 장면이었지만 여태껏 봤던 것들에서 다른 것이 느껴졌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감정과 경험의 차이가 더해지면서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순간 눈뜨지 못한 공간의 시야를 확장시킨다. 그것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가 건네는 말에 “식어버린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마음이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여태껏 보지 못했던 진실은 그가 청춘에게 건네는 위로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자기 자신에게 대하는 태도"였다. 진실로 바라보니 그가 날린 카운터펀치는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과 상처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마지막 그가 무심하게 건네는 그 말속에는 =그 한마디에 울컥거리는 이유는 과거 <어릴 적 아이> 나 자신에게 유일하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고 초라한 마음에 용기 내지 못해 차마 건네지 못했던 붙이지 못했던 사과의 편지였으며 붙잡을 수 없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라는 구원의 메시지"였다.


결국, 두 청년을 통해 진실로 다가왔던 사실은 이미 끝장나버린 상황에 대한 결과적 위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피할 수 없는 실패라는 과정에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태도라는 것이었다.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 투성이었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 장미와 가시 -


나는 때때로 넘어졌을 때의 좌절감과 무력감의 피로감이 턱밑까지 차오르면 포기의 평온함과 안주함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에 실패, 좌절, 이대로 끝난 걸까? 불확실한 물음표가 떠오를 때마다. 이 불안한 감정을 한 번에 날려줄 카운터펀치를 고대하며 플레이 버튼을 누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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