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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Spir e Dition X Mar 19. 2024

[e] 안녕? 나야! 너는, 나야!®

 ■ 타인에게 대하는 모든 것이 나를 대하는 태도이다.



찰리: 그건 왜 물어봐?

앨런: 그냥 아무 이야기나 하려고... 지금은 혼자잖아.


찰리: 뭐?!

앨런: 그때 그 사건으로 가족을 잃었지만...


찰리: 나한텐 가족이 없어!!
앨런: 알아, 별 뜻 없이 이야기했는데, 내가 경솔했다.


                                                                                                            「 영화, 레인 오버 미 



https// :  타인에게 친절하다는 건, 나 자신을 존중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com


보이지 않는 걸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 문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이과.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관계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문과. 시인의 관점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마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사과는 어렵다. 왜?! 첫 번째. 과거 자신의 못난 모습을 거울을 통해 마주하는 일은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내 행동이 사과할 일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잘못하지 않을 걸 어떻게 사과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일반적으로 앨런과 같은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먼저 사과하지 못한다. 오히려, 나는 너를 위한 말을 건네었는데 내 마음을 몰라주고 화를 건네어 주다니. 상대방이 화를 내는 순간 속상한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벅차올라 뭘 그리 심각하게 화낼 필요가 있냐고. 고함을 뱉어내는 자신을 번번이 마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에 대한 반응이다. 또한. generation. 이것은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관계의 불협화음의 순간에 대한 포착이며 관계의 현주소인 현실의 현실을 강렬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앨런 : 미안해, 찰리. 내 탓인 것 같아.             

             내가 너무 성급하게 몰아붙였지?            

             난 그저... 네가 나아졌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야. 미안해.


총기 사건이 일어난 후 앨런이 사과하는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는 이 상황은 그저 찰리의 행동으로 일어난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는 과정을 본다. 이 사건의 트리거를 만들었다는 것이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것을 통감하기에 앨런은 찰리에게 정중히 사과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과는 대부분 잘못한 사람이 먼저 하는 게 아니고 더 많이 자란 사람이 먼저 한다는 걸 표현하는 한편 사과의 관점은 타인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개선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며, 후회되는 부분을 찾게 되는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앨런은 나 자신이 찰리를 위해 애썼다는 마음보다 찰리의 보이지 않는 마음을 먼저 바라보려는 태도를 보였다. 왜냐하면, 앨런에게 찰리를 대할 때 너와 나로 달리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에서 숨겨진 본질을 포착하고 그것을 적절한 상황마다 녹여내는 감독의 따스한 시선은 경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앨런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타인을 대할 때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마음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먼저 보려는 문과. 시인의 관점으로 타인을 봐야 한다는 걸 상기시킨다. 시인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은 그 대상 자체가 된 후 느껴지는 것을 표현한다. 영화에서 배우가 메서드 연기를 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배우는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캐릭터가 되기 위해서 메서드라는 연기법을 활용한다. 타인의 이야기. 대본을 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삶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배우는 보면 연기를 너무 잘한다고 느끼는데 감정이 이입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어떤 배우에게는 그 캐릭터가 되어 버리는 것을 목격한다. 그 순간 관객은 온전히 캐릭터 감정에 이입이 된다. 그래서 어떤 배우는 영화가 끝나도 배우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캐릭터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 사람에게 그는 배우가 아니라 그 캐릭터인 것이다. 그래서 배우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삶을 보여주는 직업이 아니라 느껴보지 타인의 삶을 경 혐시 켜주는 직업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감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공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마음의 문을 연다. 그것도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사과를 한다는 건. 지나치게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티브이 프로그램 어쩌다 어른에서 한 정신과 의사는 말했다. 친구란 거울 속의 나 혹은 그림자다.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상대방이 나한테 대하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 관계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대해주는 만큼 나를 대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행동이라면 상대방도 나에게 해도 된다는 것을 허락했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상대방을 배려해야 나 또한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다. 서는 위치가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었다. 타인에게 친절하다는 건, 나 자신을 존중한다는 뜻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 가장 올바른 방식은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독은 앨런의 태도를 통해 나를 버리고 우리를 담아 산산이 조각나버린 관계를 모아서 사람의 온기를 영화에 담았다. 그의 영화는 과거 지난날의 상처.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지금 이 순간 우리 따스한 손길이 담긴 사랑이야기다. 그 온기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 "우리를 대하는 마음" "먼저 건네는 푸르른 사과"가 품어져 있고, 그것은 너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관계를 하나로 관통하는 우리를 대하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건지도 모른다.


너를 대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관계는 함께 것이다. 너를 아닌 나처럼 대한다면 관계를 포기한 다는 것.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관계는, 너와 내가 아닌 우리를 사랑하는 이야기다. 나는 나와 너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을 사랑한다. 나와 너라는 말은 공간을 공유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반면, 우리라는 말은 하나로 존재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살아가면서 모든 대상을 대할 때, "너"가 아닌 "나"로 대한다면  


       너.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언젠가,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주인은 안저부절 못하고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다. 간절히 빌고 간절히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내. 반려견의 거친 호흡이 이어지고 이내 큰 숨을 들이켜는 순간을 끝으로 반려견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 순간. 죽음을 강렬하게 느끼며 절절하게 오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가 보는 죽음은 반려견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이 죽음을 보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만큼이나 그의 모습은 내내 안쓰러웠고 슬펐으며 아프고 애절했다.  


그래서인지 한참 동안이나 반려견 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잘 가. 라며 작별인사를 반복하고 이름을 불러주는 내내 나에게 반려견의 이름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마, 그 사람이 반려견과 함께하는 동안 자신의 마음처럼 대해줬을 거 같아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함께 해온 모든 순간에 "너와 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순간을 "너와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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