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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니스 Feb 24. 2024

잠시 오뎅

겨울 가기 전 묵혀둔 이야기

눈인지 비인지 모르게 내리는 퇴근길, 뜨끈한 오뎅 국물이 나를 유혹한다.

이름도 친숙한 부산오뎅. 어쩌면 자주, 아니 가끔 오는 이곳은 하얀 마스크를 쓴 50대 아저씨가 주인이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두꺼운 KF94, 두껍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종이컵은 인당 하나씩입니다!"


그의 대쪽 같은 말 한마디에 가뜩이나 손발 시린 날 난 순간 얼음.

싸늘하다!

저 멀리 빨간 오뎅을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스크 밖으로 입김을 뿜어내며 오뎅 트레일러 주변을 닦는 모습에 이내 포기하고 발걸음을 총총 옮겨 빨간 오뎅을 집어 들었다.


하얀 국물이 담겨 있는 종이컵에 빨간 오뎅을 넣기가 뭐해서 그의 싸늘한 눈빛을 외면한 채 나는 새 종이컵을 써도 되는지 몸짓으로 얘기했다. 말은 안 하는 건 승낙의 의미다.

아니라면 '종이컵은 인당 하나씩입니다!'라고 한마디 했을 터.

나는 빨간 오뎅을 잘게 씹어먹으며 뜨끈한 오뎅 국물도 후루룩 조금씩 마셨다.

몸과 위장은 따뜻해져 가는데 이상하게도 머리는 싸늘하다.

하나만 먹고 가면 분명 욕할 게 뻔했고 자연스레 배가 고파 떡 하나 더 집어 들었다.

대쪽 같은 아저씨는 말이 없었다. 감사의 의미겠지.


떡 하나를 다 먹을 무렵 아주머니 한분과 커플이 새로 입장했다.

네 등분 해서 마지막까지 깔끔히 먹고 남은 오뎅꼬치는 테이블에 그대로 올려놓고, 다 마신 종이컵은 반대편 재활용통에 잘 넣어뒀다. 이쯤 되면 매우 친절한 손님일 것이다.

모든 게 순탄했다. 이대로 배뚠뚠한 몸을 이끌고 버스 타고 집에만 잘 도착하면 된다.


!아아아ㅏㅏㅏㅏㅏ

커플 사이로 나가는 길목에서 박스 모서리에 걸려 다리가 꼬여 넘어지기 일보 직전, 다행히 나는 대형 냉장고에 손을 짚어 넘어지지 않았다.

냉장고 옆 일반쓰레기를 담아놓은 박스는 나의 현란한 몸놀림으로 입구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그때 친절한 커플이 바로 나서서 박스를 정리해 주었다.
고마움을 전할 겨를도 없이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냉혈한 아저씨의 욕 한 사발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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