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네시아 발리 우붓 여행 -
@Ubud, Bali, Indonesia
전날 수상한 기운이 가득해서인지 발리에 가는 것 자체가 무리인가 싶다. 발리는 지금 우기가 접어든 시점으로 습도는 99%, 비 올 확률 99%. 강수량이 어마어마하고 천둥 번개가 표시되어있다. 도저히 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티켓을 따라 가보는 것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멜버른에 도착하자마자 발리 행 비행기를 쿠알라룸푸르로 바꿔 바로 한국으로 들어갈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새벽 다섯 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새벽 세시에 공항으로 출발했다. 서로 슬픈 눈에 몽롱한 인사를 가득 담아 나누고 항공편을 확인하니 콴타스마저도 새벽 여섯 시 출발 비행기가 취소 상태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공항에 오자마자 저 문구를 봤다면 얼마나 황당하고 헛웃음이 날까.
홀로 그 새벽에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지친 것도 잠시 슬슬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일단 멜버른까지 가긴 하지만 멜버른에서 발리로 가려고 했던 비행기를 취소할 수도 있는 경우와, 발리까지 갔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발리 공항에서 바로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구하는 경우와, 정말 우려했던 걱정과 다르게 날씨가 반짝반짝 좋아서 예정대로 발리를 여행하는 경우까지. 앞으로 정해진 게 없으므로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져 이것도 괜찮고 저것도 다 괜찮다고.
대부분 셔츠와 양복바지를 차려입고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 속에 홀로 여행자의 모습으로 탑승했다. 멜버른에서 발리까지 가기 전 따뜻한 커피와 기내식으로 배를 채웠고, 비행기 시간이 넉넉해져서 다급하지 않아도 된다. 멜버른 국내선과 국제선 이동 시간 때문에 걱정했는데 T1에서 나오자마자 30초도 안 걸려서 T2 입구로 들어섰다. 40분이나 1시간의 시간이 있다면 국내선과 국제선의 터미널 간 이동이 여유로울 터, 물론 수화물이 따로 없을 경우.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한껏 멋을 낸 멜버른 국제선 T2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에어아시아 부스를 찾아가서 항공편 변경에 대해 물었더니 발리에 가서 따로 쿠알라룸푸르 편을 구하는 게 훨씬 저렴하다며 별 문제가 없다면 그냥 취소하지 말고 가라고 하길래 일단은 발리까지 가보기로 했다.
애증의 에어아시아를 타고 드디어 호주에서 발리로 날아간다. 강약 중간 약이 철저한 멜버른의 땅을 지나 아무것도 없는 적색의 땅 위를 날아가는 동안 깨어있던 시간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다. 잠깐씩 깰 때마다 늘어가는 뭉게구름의 양. 기내식 없이 에어아시아의 장시간 비행을 버티는 방법은 미리 구비해 놓은 물 한 병과 간단한 군것질거리 그리고 피곤함이면 된다.
넓고 넓은 알 수 없는 호주의 땅.
I havent been everywhere, but its on my list.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발리는 우스울 정도로 맑다. 습도는 엄청났지만 걱정했던 천둥 번개는 커녕 비도 오지 않고 오히려 해가 쨍쨍하다.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도 잠시, 덴파사르 공항에서 어마어마한 택시 아저씨들의 경쟁이 시작됐다. 일단 급한 대로 호주 달러 50을 루피아로 1달러당 9,400원에 환전하고 사진을 찍는 척 분위기를 파악했다. 한 사람이라도 택시에 태우기 위해 바라보다가 사진을 찍으려 렌즈를 들이밀자 일제히 등을 돌리는 민첩함. 카메라를 내려놓자 우르르 다가오는 아저씨들. 그 사이에서 흥정을 시작한다.
눈은 부릅뜨고 있어도 실은 몸은 아주 많이 지친 상황, 그러던 와중에 한 아저씨가 250루피아에 가자고 하길래 냉큼 오케이하고 따라나섰다. 250루피아에 SUV 넓은 차를 타고 우붓까지 가는 동안 그는 이것저것 설명해주며 가이드북도 보여주고 원하면 무료 투어도 시켜주겠다고 했지만 비행기를 오래 타서 너무 피곤하다며 거부하고 철저히 귀를 막았다.
우붓에 도착하자마자 쏟아지는 비. 숙소를 찾아 배낭을 재정비하고 우산을 쓰고 걸어가니 처량하기 그지없다. 어디에 숙소가 몰려있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걸어가서 홈스테이 간판을 뒤적뒤적한 결과, 괜찮은 가격에 홈스테이 숙소를 찾았다. 실은 다 비슷비슷했지만 마지막으로 들어선 곳에서 정말이지 습도와 배낭의 무게에 지쳐버렸기 때문에. 200루피아에 싱글 침대 하나 더블 침대 하나 개인 욕실 선풍기 조식 포함에 와이파이는 그럭저럭 이지만 친절한 주인 가족이 있고 수영장을 사용할 수 있는 곳.
신혼여행지와 서핑을 위한 바다로 알려져 있는 발리에 온 이유는 단순히 우붓이라는 지역 때문이다. 우붓 마을을 향해 오는 동안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갔던 풍경들은 단번에 오길 잘 했다는 마음을 품게 한다. 캄보디아에서 마주쳤던 모습들과 비슷하지만 방콕보다 상업적이지 않고 안정적인 모습.
산책하는 동안 또 한 번의 스콜을 마주했지만 두려웠던 것에 비해 고작 우산을 쓰면 끝날 정도의 약한 비다. 직접 부딪치지 않았을 때 생기는 두려움이 무서움을 만들고 발을 묶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두려움에 맞서 싸워 서있으니 고작 이게 다야? 라며 우스워진다.
우붓 시내에서 9,950루피아에 지갑도 두둑이 채우고 배도 두둑이 채워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 이미 빈땅 레들러를 음료수처럼 마셨지만 가는 길에 슈퍼에서 빈땅 맥주를 또 사들고 방문 앞 테라스에 앉았다.
시원한 밤공기
맥주에 테라스
발 끝으로 보이는 달.
하늘을 나는 도마뱀은 덤.
한국 돈으로 17,000원 정도(호스텔은 하루에 6천 원, 8천 원 정도) 발리에서 때아닌 사치를 부리며 지친 몸을 눕히고 나니 그제야 아시아에 왔다는 게 실감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