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네시아 발리 우붓 여행 -
@Ubud, Bali, Indonesia
밤새 뒤척이다 보니 얼굴이 퉁퉁 부었는데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정신상태가 맑아진다. 테라스 밑으로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넨다. good morning 대신에 알려주신 selamat pagi, 그리고 terima kasih.
자연스러운 햇빛에 기분이 좋아지는 이곳의 아침. 마당을 쓰는 소리에 슬슬 일어나 테라스에 앉으면 신선한 공기 속에 향 냄새가 어우러진다. 깊은 마음으로 멀리 구름을 쳐다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한동안 개미들이 발등으로 올라와 간지럽히거나, 나무에 기대어있던 새들이 푸드덕 거리 거나, 밑에서 홈스테이 가족들이 주고받는 대화들을 듣고 있으면 걸어둔 빨래가 말라간다. 건조함과 습함이 적절하다.
어제 산책하며 봐 두었던 카페에 앉아 코코넛 주스를 시켜두고 작업을 하는 동안 어디선가 실로폰 맑은 소리가 들린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돌아가며 서로가 부딪히며 만들어낸 소리. 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끝났고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온전히 그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른 나른하다.
맑음도 잠시, 이내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질 구름이 나타났다. 숙소로 돌아와 씻고 나오니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진다. 날씨 때문에 와이파이가 좋지 않을 거라던 말은 흘려 넘길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테라스 의자에 앉아 비를 맞지 않고도 비를 맞는 듯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운 스콜 덕분에 더위가 한 풀 꺾였다.
30분도 채 안돼서 비가 그치고 다시 맑은 하늘이 나타난다. 시원해진 덕에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반대편 길을 따라 걸었다. 우붓에 처음 왔던 날에 차를 타고 지나가며 봐서인지 풍경이 눈에 익다. 다리 사이로 물이 흐르고 발 밑으로는 주렁주렁 나뭇가지들이 늘어져있어서 마치 숲 속 위를 걷는 기분.
시원한 물소리가 흐르고 주변에 흐트러짐 없이 자연스레 어울리는 다리가 보인다.
질주하는 차들과 오토바이를 피해 오래된 듯 아슬아슬해 보이는 다리. 전속력으로 달려드는 오토바이만 없다면 가만히 앉아 유유자적하기 참 좋은 곳일 텐데 마을 입구라 어쩔 수 없나 보다.
우붓 마을로 돌아가는 길, 큰길 사이에 뻗어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어느덧 오토바이 소리가 멀어지고 흙 밟는 소리로 가득하다. 우붓이 방랑자들에게 인기 있는 이유. 하지만 주변이 조용해서인지 홈스테이를 넘어선 고급스러운 호텔이 나지막이 들어서있고 곳곳에서 공사가 한창이다. for rent라는 문구가 지는 해와 함께 서글퍼 보이기는 처음이다. 현지인들의 삶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행하고 있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일본과 스페인, 포르투갈을 돌아 호주를 거쳐 이곳 발리에 도착했을 때 좋았던 건 물가였다. 다들 동남아 여행이 힘들고 고단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오히려 여행하기 편한 곳은 동남아 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평소에 아끼던 돈으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에. 여행이 편하다. 한국인인 내가 호사를 누릴 정도면 물가가 더욱 비싼 유럽과 기타 다른 나라에서는 얼마나 쉬울까.
비단 이곳뿐 아니라 나 역시도 삶을 위해 끝까지 누군가를 위해 일 해야 하는 현실. 그 심각한 굴레 안에서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해 결국은 가진 자가 되어야만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분명 물을 처음 보았을 때 맑은 소리가 날 정도로 쏟아졌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물줄기가 가늘어지고 결국 끝은 메말라있었다. 애초부터 자연이 이런 모습인데 인간이라고 바꿀 수 있을까. 물줄기가 끊겼고 시멘트 바닥에 끝났을 때 지금껏 우붓 내에서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모습이 메말라 가던 물줄기의 한계일지도 모르는데. 그동안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물만 보며 앉아있던 나는 그들 앞에 고개 숙여 걸어야 했다.
좁은 길을 빠져나오니 다시 시끌벅적 '마사지' 혹은 '택시'를 연신 외치는 사람들 틈에 들어섰다. 한참을 서성이는 동안 연신 붙잡혔지만 아무 말도, 냉정하게 뿌리치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둑어둑. 숙소에 도착해서 샤워를 하려던 참에 정전이 났다. 당황스러워 밑으로 내려가니 아저씨는 늘 있는 일인 양 전기 문제인가 봐하며 앉아있었고 아주머니는 접시 위에 초를 올려 건네주며 연신 미안해하셨다. 샤워하려고 했는데 불이 꺼져서 놀랐다며 웃었더니 더욱 미안해하시며 지금은 차가운 물 밖에 안 나올 텐데 어떡하냐며 걱정한다. 찬물이 나온다고? 마침 찬물 샤워를 원했어! 다행이야 라며 크게 웃었고 촛불에 의지한 채 어둠 속에서 씻는 동안 주인집 아이들의 커져가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선풍기가 꺼졌고 눈 앞이 안 보일 만큼 어둡고 따뜻한 물도 안 나오는 데다가 와이파이 조차도 안 되는 잠깐 동안 느낀 불편함을 이곳의 아이들은 신나게 웃어넘긴다. 무슨 걱정이냐는 듯, 아무 의미 없다는 듯. 정전이 지속되는 동안 점점 크게. 이런 사소한 기계에 불편함을 느끼고 어색해하는 마음이 초라해질 만큼.
테이블에 초를 두고 일기를 쓰려고 하니 다시금 불이 들어왔다. 떨어진 촛농과 연기를 만들어낸 불빛의 끝을 보다가 접시를 들고 내려가 아주머니에게 덕분에 찬물로 시원하게 씻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마음은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