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나가는 느린 발걸음

- 바르셀로나 거리 여행 -

by 임선영
@Barcelona, Spain


어제보다 흐린 날씨, 감기약을 먹을까 하다가 괜찮을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다. 호스텔에서 카탈루냐 광장이나 람블라스 거리를 향해 가는 동안 까사밀라와 까사 바트요를 매일 같이 볼 수 있다.


건축물보다 흥미로운 건 유명한 곳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모습.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사진기를 꺼내들고 가만히 서 있거나 포즈를 취하면 그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유명한 곳이구나 알 수 있다. 아무 정보 없이 돌아다녀도 나름 챙겨볼 수 있는 팁. 하지만 까사밀라와 까사바트요는 멋있지만 그것이 가우디이기 때문에 더욱이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 돈을 내고 기다리고 기다리며 볼 만큼 흥미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걸으며 더 관심 있던 건 그라시아 거리를 따라 이어진 오래된 서적을 판매하는 부스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각 서점에서 들고 나왔는지 오래된 종이와 책들이 가득했고 1유로부터 시작하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뒤적이다가 집어 든 카탈루냐의 역사라는 뜻인가 싶은 책은 1933년 출판됐는데 단돈 10유로. 하나하나 포장되어있는 책을 아주 조심스럽게 꺼내는 동안 느껴지는 종이 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두근거림을 준다.


카탈루냐 광장까지 천천히 20분 정도 느긋하게 걷다 보면 뿜어져 나오는 분수를 기점으로 사람들이 다시 늘어난다. 사람들이 가득한 람블라스 거리를 지나쳐서 라발지구가 있는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흔한 아파트 놀이터 앞 벤치에 잠시 앉았더니 아이들을 놀이터에 데려다주고 빈 벤치에 앉아 기타를 꺼내 든 어느 아이의 아빠 덕분에 나른해졌다. 다리를 모으고 신경을 열기 시작하자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와 지나가는 느린 발걸음과 어우러진 그의 기타 소리가 들렸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북적이던 거리와 이곳의 경계가 생겨버렸다. 평소에는 푸드덕 떨쳐내며 날아가던 비둘기도 걸어가기만 했다. 적당한 햇살 속에 적당한 사람들.


우직하고 고급스러운 현대미술관을 중심으로 바르셀로나 대학생들의 아지트라는 골목 사이에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참 괜찮은 가게들이 많다. 어디를 들어가 볼까 고민하면서 기웃거리는 중에 안에 있는 것도 아닌 밖에 있는 것도 아닌 테이블 위에 기타를 올려두고 열심히 무언가를 끄적이는 사람에 이끌려 카페에 들어섰다. 창 틀에 걸터앉은 것 같은 자리에서 직원이 추천해주는 포카치아랑 키슈를 먹어보고 나도 무언가를 끄적이며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감기 기운이 조금은 사라진 듯했다.


양 갈래로 나뉘는 길목 앞에서 잠시 주저했다. 길을 알 수 없으니 고개를 굴리다가 눈에 들어온 깡통 표지판에는 I'M DOING NOTHING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왠지 주춤하고 서 있는 지금과 딱 어울리는 것 같아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직진하기로 했다.


금방 빠져나와 마주친 옅은 길 끝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오는 많은 사람들 속에 우연찮은 노란 표지판, 노란 티셔츠, 노란 표지판, 노란 바지. 람블라스 거리를 이어가는 노란 나무의 잎과 잘 어울리는 바르셀로나였다.


그런 오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을 지나 느릿느릿 숙소로 돌아와서 마침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만나니 마치 이곳이 한국인 듯 모든 감각이 바뀌어버렸다. 빠에야를 먹었지만 철판볶음밥을 먹는 것 같았고 클라라를 마셨지만 레몬 사이다를 마시는 것 같았다.


현금을 인출하려는데 발견하는 곳마다 수수료를 3유로 혹은 5유로 내야 해서 돈을 뽑지 못했지만 그런 걱정을 내일로 미뤄두기로 했다. 어두운 밤 빛이 터지는 까사바트요 앞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언니 덕분에 내가 어떤 기분인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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