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빛바랜 종이 끝자락

- 바르셀로나 언덕 여행 -

by 임선영
@Barcelona, Spain


아침에 일어나면 조식을 먹으며 오늘은 무얼 하지 고민한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이 나가면 혼자 여유롭게 씻고 나와서 전날 있었던 일을 정리하며 글을 쓴다. 가끔 호스텔에서 계속해서 마실 수 있는 커피를 뽑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오후 1시가 넘어갈 때쯤 괜찮은 기분으로 신발을 갈아 신고 나선다.


호안 미로를 보러 몬주익 언덕에 올라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몬주익 언덕에 있는 모든 곳이 월요일에 휴관이었다. 오히려 사람들이 없을 것 같아서 일정을 바꾸지 않고 일단 올라갔다. 지하철 녹색라인 Paral.lel 역에서 내려서 Funicular 푸니쿨라 등산열차 단어만 보면 찾아가기 쉽다. 다음 열차가 가고 10분 정도 기다리면 출발, 풍경이 그다지 멋지진 않지만 아주 빠르게 갈 수 있다. 그리고 T10이 있으면 별다른 요금 없이 탈 수 있다.


역에서 빠져나와서 호안 미로 미술관을 향해 넉넉잡아 5분, 10분 걷는 도중에 작은 공원으로 빠지는 길과 마주했다. 기분 좋은 밝은 녹색 타일에 앉아 쉬다가 뒤를 돌아보니 맑은 하늘이다.


스페인에서 가우디보다 보고 싶었던 호안 미로여서 만나고 싶었는데, 아쉬운 마음은 뜻밖의 맑은 하늘 덕분에 위로를 받았다.


호안 미로 미술관을 지나 멀리서 보이는 뾰족한 첨탑을 따라 걷다 보니 카탈루냐 미술관에 닿았다. 카탈루냐 지방의 중세 미술을 중심으로 소장하고 있다길래 온 김에 구경하고 싶었는데 이곳도 아쉽게도 휴관.


서양 미술사를 좋아했고 미술을 전공했음에도 여행을 다니면서 나라마다 꼭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은 입구부터가 매력적이었다. 입구 계단에 앉아있으니 탁 트인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상쾌하다.


I'M HERE!

따뜻하고도 강렬한 햇빛을 한꺼번에 받으니 감기 기운이 소독되는 것 같다.


코카콜라 한 캔에 시원하고, 살짝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한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자유롭고, 나의 계획은 휴관일로 인해 무너졌지만 오히려 한가로워서 기분 좋다. 햇빛이 강렬해서 좋다.


내려가려는 순간 저 멀리서 보이는 가를레스 부이가스 광장 분수, 순간 떠오르는 기억.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지만 아마 그 분수가 여기겠지.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다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셨다. 그래도 그때 보여준 동영상 속 호화로운 분수 덕분에 지금 서 있는 햇빛 속에서도 반짝이는 물을 떠올릴 수 있었다.

고마워.


에스파냐 역에서 숙소 앞 디아고날 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허무하게 숙소로 돌아와 물을 챙겨들고 구엘 공원에 가기 위해 와이파이를 연결했다. 6시 30분에 예약하고 7유로. 그때까지만 해도 무료존과 유료존이 어느 정도 나누어졌는지 몰랐었다. 만약 알았다면 아마 7유로를 주고 굳이 유료존에 들어가지 않았을 텐데.


딱 좋은 해의 길이. 입장 시간까지 여유로워서 구엘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오히려 중심을 벗어나 곳곳에서 저마다 한적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괜히 시간에 맞춰 줄을 서서 들어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까 롯데월드에서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유료존에 앞서 들어간 사람들이 회전 컵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듯했고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곧 탑승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가우디 유명지 중에서 그나마 구엘공원만 가기로 마음먹어서 왔다고 하지만 이마저도 제대로 실망했다. 오히려 놀이기구는 1시간을 기다려서 1분 동안이라도 짜릿함을 주는데 도대체 왜 7유로를 내면서도 허무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바르셀로나에서 쓴 돈 중에 제일 아까운 돈이지 않을까.


물론 가까이서 보면 화려한 색채가 너무나 아름답지만 앉아서 그 아름다운 모자이크를 감상할 시간도 없이 서로를 찍고 찍히는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기 위해 자리를 계속해서 옮겨야 했다. 그 속에서 앉아있는 것 자체가 민폐였다.


사람들을 피해 바다에 초점을 맞추며 한숨을 내쉬다가 나처럼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던 노부부를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즐기고 있으려나 허무한 마음이려나.


저녁으로 타파스와 맥주를 마시고 숙소로 올라가는 길에 대형서점 Casa del Llibre에 들어갔다. 열려있는 아트 서적이 가득했고 가운데 큰 소파를 두고 한쪽 구석에는 네스프레소 커피 머신이 있어서 커피를 내려마실 수 있었다. 한 잔을 뽑아서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소설이나 시는 언어를 이해하지 못 해서 읽을 수 없지만 아트 서적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한때 대학교 도서관에서 이미 출간된 지 한참 지났지만 도서관 밖으로 들고나갈 수 없어서 그 자리에서 한가득 안고 봐야 했던 비싼 책들을 이곳에서는 비닐 포장도 없이 마음껏 볼 수 있었다. 관심 있는 모든 분야의 책을 꺼내서 그림책 보듯 넘기다가 스티브 맥커리의 사진 인생이 담겨있는 비하인드스토리 <Steve Mccurry; Untold the stories behind the photographs> 책을 한참 바라봤다. 그가 기록했던 모든 것들, 찍혀진 도장, 갈겨쓴 글씨, 빛바랜 종이 끝자락, 오래된 기록의 흔적들이 좋다. 구엘공원보다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 앞 계단이 더 좋고, 메인 거리에서 터무니없이 비싸게 파는 타파스 맛집보다 동네 서점이 더 좋은 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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