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구름 조각 사이 햇살

- 포르투 트램길 여행 -

by 임선영
@Oporto, Portugal


느긋했던 저녁처럼 이곳에서의 아침은 여유롭다. 조식을 먹고 따뜻한 커피를 들고 앉아있어도 열시가 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떠들지 않는 곳.


여행을 시작하면서 한번도 빼지 않았던 손목시계를 풀어서 포르투 로컬 타임으로 맞췄다. 한동안 한국은 몇 시일까 그리워하느라 바꾸지 않았었는데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서 시계를 보기로 했다. 괜히 마음을 다잡은 것처럼 뿌듯하다. 여행 중에는 늘 그렇듯 사소한 변화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호스텔에서 나와 도루 강 카이스 다 히베이라 거리까지 천천히 걸었다. 파란 코발트블루 의자, 파란 스카이 블루 티셔츠, 파란 빈티지 블루 가디건, 파란 파스텔블루 니트.


어제 지나가다가 들어가 보고 싶었던 레스토랑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았다. 프란세지냐를 먹고 맥주를 다 마시고 서비스로 나온 감자튀김까지 다 먹을 때까지 바느질을 했다. 유독 포르투에 뜨개질과 자수 관련된 가게들이 많아서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간단히 실 두 묶음과 바늘 세트를 샀었다. 평범한 도구들이지만 실과 바늘은 여행 내내 심심함을 달래주기도 하고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여행 그 이후에 하고 싶었던 작업의 방향을 잡아주었다. 어떤 도안으로 해볼까 고민해보다가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움직였더니 역시나 나스러운 모양이 새겨졌다. 그 사이 구름이 걷히고 갈라진 구름 조각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하던 자수를 멈추고 어제 걸었던 중심 거리를 벗어나 도루 강을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제법 깔끔하게 칠해진 건물들을 지나 결혼식이 한창이던 성당을 돌아 골목길로 들어섰다. 언덕 위에 오래된 집들 사이로 엄청난 각도로 쏟아지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갔다. 아무도 없었던 길.


어디인지 감이 서질 않는다. 멍하게 서 있다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서 오랜만에 카메라를 내려두고 벽에 기대어 섰다. 문득 친구들이 그리웠다. 수도 없이 타이머를 맞춰놓고 뛰어놀았는데 혼자서 하려니 그마저도 재미가 없다. 역시 아무도 모르게 피사체로 선정됐을 때가 제일 자연스럽다. 혼자 여행에서는 피사체가 될 수도 없지만.

골목을 빠져나와 Museu dos Transportes e Comunicacao 맞은편 1번 트램이 지나가는 길과 마주쳤다. 이 좁은 길에서 나는 어디로 피해야 하지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는데 그냥 아무렇지 않게 휙 지나가버리는 트램. 트램 안에 앉아있는 사람들과 멋쩍게 웃어보았다.


트램이 지나간 길을 따라 코너를 돌아 다시 골목길로 걸어 올랐다. 아주 작은 성당을 중심으로 오밀조밀 차지하고 있는 색색의 집들 사이로 도루 강의 다른 모습이 보였다. 저 멀리 남산타워 같은 커다란 타워도 보이고, 군데군데 폐허가 되어버린 곳들도 보이고. 지나쳐온 길을 다시 한 번 뒤돌아 눈으로 훔치는 행동이 반복되며 길 위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


오르막 위에서 우연찮게 18번 트램의 발자국을 밟으며 자연스레 건너편 공원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좋을 것 같은 가로수가 펼쳐졌다. 한참을 앉아있다가 공원 옆 광장에서 열린 플리마켓을 보고 오늘이 토요일인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여행을 하다 보니 날짜도 요일도 시간도 사라진다.


알록달록한 섬유 작업들이 많아서 심심치 않게 눈요기하다가 뜨개질로 만들어진 3유로짜리 귀걸이를 샀다. 직접 내 눈앞에서 뜨개질을 하고 있으면서 3유로라는 가격에 팔 수 있다니. 3유로였지만 30유로의 가치를 가진 귀걸이를 사들고 봉투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소중한 것을 품에 안은 것처럼.
오늘 드디어 슈퍼마켓 발견했다. 동네 구멍가게가 있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상태의 과일들이 많아서 속상했다. 조금은 미안하지만 조금은 마트가 저렴하다. 1.5L 물은 0.29유로, 맥주는 한 병에 0.94유로 정도. 기쁜 마음으로 칫솔도 하나 새로 사고 과일도 마음껏 샀다. 천도복숭아 상태가 좋아서 3개 골랐는데 1.39유로 라니 행복하다.

짐을 두고 옷을 한 겹 더 챙겨 입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핸드메이드 가게부터 카페와 칵테일 바가 구석구석 자리 잡고 있었다. 또 가야 할 곳이 생겼다. 매일매일 다른 포르투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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